육군 대위 귀환하다 102화
27. 헌터의 생존방송(1)
[‘상점 제작자’가 그대를 강제 이동시킵니다. 이동 위치 : 「아베르노」 꼭대기.]
[10초 후 이동합니다. 10…… 9…… 8…….]
텍스트와 함께 세이렌의 모습이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그리고 다시 공간을 가득 채운 커다란 뱀의 육체가 나타났다.
정보주입이 끝나고, 레비아탄의 아공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7…… 6…….]
묘한 이질감이 사라졌다.
시야에는 다시 내 육체가 정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5…… 4…… 3…….]
난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이곳에 떨어졌을 때부터 고대해 왔던 부활.
이제 총사령관이 펼쳤던 함정에 대한 대가를 받을 차례다.
[2…… 1……. ‘꼭대기’로 이동합니다.]
***
곧이어 도착한 꼭대기의 광경은 장엄했다.
일단, 공간은 어둡다면 어두웠다. 그러면서도 밝았다. 어둠 사이에서 활개 치는 기묘한 빛줄기들 때문이었다.
“저게…… 타 행성의 에너지?”
채찍처럼 휘몰아치는 빛살들은 마치 「아베르노」의 핵인 ‘하얀 용암’을 연상케 했다.
그 엄청난 기운에 전신이 자동으로 위축되었다.
대단한 압박감이었다. 나는 그 강렬한 중압감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하얀 용암’의 무서움은 저번에 뼈저리게 느꼈다. 「구사일생」이 있다지만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
난 천천히 길쭉한 빛들을 따라 이동했다. 이미 ‘레비아탄’의 기억을 봤기에 답을 알고 있었다.
저 넘실거리는 빛들을 따라 끝까지 걷다 보면, 전신이 꽁꽁 묶인 채로 봉인된 테르미노를 만날 수 있다.
그오오오오…….
곳곳에서 공간이 찢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대한 에너지의 흐름과, 그것에 대항하는 테르미노의 힘이 부딪치는 소리다.
여기서 조금만 삐끗하면 그대로 영혼이 녹아 저 에너지의 일부가 될 것이다.
물론, 진짜 두려운 존재는 이 에너지가 아니었다.
“이쯤인가?”
10분 정도 걸었을까,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 느껴졌다.
‘하얀 용암’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절대적인 존재.
그 강력한 ‘레비아탄’의 영혼도 이 존재의 말 한마디에 피를 토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자는 신이니까.
그것도 ‘종말’을 뜻하는 파괴신(破壞神).
[왔구나. 초대받지 않은 자여.]
그 한마디에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보주입을 통한 기억으로 느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끝없이 쏟아지는 행성 에너지를 감당하면서도 이런 저력을 보여줄 수 있다니, 역시 대단했다.
심장 속에서 불의 능력이 강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기억 상, 그에게 절대 저항해선 안 된다.
난 날뛰는 기운을 재빨리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멈추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세이렌의 말대로구나. 재미있어.]
말 한마디였다.
그 한 마디에 통제되지 않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 강력했던 불의 능력 또한 테르미노의 힘 앞에 손쉽게 굴복한 것이다.
순간, 궁금증이 생겼다.
레비아탄, 세이렌, 다곤, 메갈로돈, 불의 왕. 그들 전부 「아베르노」에 소환되면서 그간 길렀던 힘을 전부 잃었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힘이 계속 보존되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때보다 더 발전했다.
그 이유가 뭘까?
죽어서 온 게 아니라 총사령관의 함정에 빠져서 왔기 때문에? 그러기엔 성낙연 역시 본래의 힘을 전부 사용했었다.
[쓸데없는 것을 궁금해하는구나.]
나는 깜짝 놀랐다.
그를 앞에 두고 무슨 잡생각이란 말인가. 테르미노 역시 크라켄이나 세이렌처럼 내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인간과 달리 저들의 힘의 근원은 심장 속에 있는 결정체다. 불의 종족이건, 물의 종족이건 이승에서 소멸할 당시 그 결정체를 잃었으면 당연지사 이곳에서도 힘을 잃는 법. 그것이 ‘에너지 총량 보존의 법칙’이다.]
그는 친절하게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특히 불의 왕이나 물의 왕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왔다.
나와 선소연이 그들의 에너지를 이어받았기에, 그들이 「아베르노」에서 힘을 잃은 것이다.
죽었다는 이유로 힘이 다시 생긴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테르미노.”
나는 간신히 힘을 주어 목소리를 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날 지구로 보내줘라.”
순간, 그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온몸이 쪼그라들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곧바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곳에서 피가 흘러나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장했다. 호흡도 점점 거칠어졌다.
[지구라……. 세이렌에게 들었지. 좋다. 다만, 지금 당장은 안 된다.]
“……그게 무슨 소리냐!”
분명, 1년이 지났다 했으니 지구는 절체절명의 위기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바로 이동할 수 없다니?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이곳에서 보니 인간 역시 불의 종족과 다를 거 없더군. 조금 더 내버려 두면 오히려 그들보다 더 심하게 우주를 훼손할 것이다. 아직 인간의 인구는 포화상태. 더 줄일 필요가 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거라.]
난 순간, 잘못들은 줄 알았다.
이건 뭐, 영화나 소설 속 악당들이나 하는 대사 아닌가?
혹여, 그렇다 하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인간」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
악마를 닮은 그 존재가 다시 웅혼한 음성을 울렸다.
[딱 2년 후, 2년 후로 보내줄 테니 그때 가서 상황을 해결하거라.]
“……절대 안 된다. 지금 인간 대다수가 죽어 나갈 때까지 구경하고 있으란 소리냐.”
[지금 인류의 힘이면 그 정도는 충분히 버텨낼 것이다.]
웃기는 상황이었다.
갑(甲)과 을(乙)이 뒤바뀐 느낌이었다.
“내가 나가서 상황을 해결해 주면 그대에게도 이득 아닌가?”
슬슬 짜증이 났다.
말로만 들어보면 총사령관보다 테르미노가 더 위험했다.
“게다가, 그대는 한 종족당 3억 년의 기회를 주는 것 아니었나?”
[잘 알고 있군.]
“그렇다면, 적어도 인간의 3억 년은 보장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개입해서 인간의 수를 줄이려는 이유가 뭐냐.”
[나 역시 최근 인간의 발전속도에 놀라고 있는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봉인된 상태라 못 나섰을 뿐이지……. 아마, 이 상태로 천 년만 흘러도 온 우주의 자원은 씨가 마를 것이다.]
난 그 강력한 존재에게 반발심이 들었다. 그의 억지에 굴복하기에는 내가 가진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배짱을 부리는 것밖에 없었다.
“별수 없군. 그렇게 나온다면 나 역시 불의 종족을 잡지 않겠다. 그렇다면 너는 억겁의 시간 동안 이곳에 봉인된 채로 살 거야. 불의 종족의 행패를 두고 볼 수밖에 없겠지.”
[아쉽게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불의 종족의 낭비로 우주 속 존재하는 대부분 행성들의 에너지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대가 굳이 가지 않아도 봉인은 풀릴 것이고, 곧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그는 진짜 본인을 갑(甲)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총사령관이 지구로부터 도망친 지 벌써 6,600만 년이 흘렀다.
겁이 많다던 그녀가 무리해서 지구침공을 시도하는 이유는 뻔했다.
이제 더 이상 사용할 행성 에너지가 없는 거겠지…….
“하지만, 지구의 핵은 아무리 당신이라도 위험할 텐데?”
[과연.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든 힘을, 불의 종족이 다룰 수 있으리라 보는가?]
당치도 않다는 듯한 목소리.
그는 위압적인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난 한숨을 쉬었다.
이거 어쩔 수 없나.
세이렌은 아마 대화가 이렇게 흘러갈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떠나기 몇 분 전 그가 절대 거절하지 못할 대비책을 알려줬으니까.
난 질식할 것 같은 느낌에도 온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후……. 좋아. 지금 바로 보내주는 것을 대신해서 대가를 지급하지.”
내 선언이 예상치 못했는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느꼈다. 동요하는 테르미노의 기운을…….
[대가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건가.]
대가 지불.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우주의 법리이며, 왜인진 모르겠지만 테르미노는 그 제안을 거스를 수 없다고 했다.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사실,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대가를 내놓아야 할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여기까지가 내 마지막 발악이었다. 이게 안 되면, 나도 어쩔 수 없다.
[좋다. 거래가 성사되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반대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승낙했다. 테르미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 육체를 쳐다봤다. 순간, 불안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그것들은 가져갈 생각인가?]
그가 가볍게 눈짓하자, 내가 가지고 있던 물품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억의 목걸이」,「특급 마법 가방」그리고 그 속에 있는 수많은 먹거리.
역시 지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품들이구나.
“……가져갈 수 있다면. 쓸 만은 하겠군.”
[뭐, 상관없지. 좋다. 대가는 가는 즉시 지불받겠다.]
그의 선언에 꼭대기 위에 있는 출구가 활짝 열렸다. 그리고 몸이 자동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벌써?
“잠깐!”
난 다급하게 외쳤다.
아직 ‘대가’가 뭔지 듣지 못했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것이라면 나에게도 거절할 권리가 있었다.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처리할 일은 아니란 거다.
특히 저 악마같이 생긴 존재가 짓는 비릿한 웃음은 내 불안감을 더욱더 증폭시켰다.
[끌끌.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거래는 성사되었다고. 이미 돌릴 수 없다.]
“……그게 무슨?”
[난 그대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바로 「기억」을 대가로 받겠다. 그대의 육체는 지구에서 재구성될 것이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망각할 것이다. 너희들의 말을 빌리자면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것이지.]
당했다.
애초에 그는 나를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 지구로 가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놈은 애초에 2년의 유예기간을 가질 생각이었던 것이다.
기억을 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이건 불공정 계약이다! 차라리 2년 후에 가겠다. 당장 멈춰.”
[이미 늦었다. 하지만 그대에게도 숨통은 만들어 줘야겠지.]
내 육체는 이미 출구 앞까지 도달했다.
지구로 가는 통로.
시공간이 뒤흔들리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그 앞에 있었다.
안간힘을 써봐도 소용없었다.
나는 완벽히 그의 통제 안에 들어가 있었다. 제기랄.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야, 이 개새끼야! 당장 안 멈춰?”
[문어를 찾아라. 그게 마지막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왜 항상 편하게 가는 길이 없는 건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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