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대위 귀환하다 095화
25. 아베르노(3)
놈들은 골렘을 《‘구’ 5군단장》이라 불렀다. 미국에서 잡았던 브라키오가 새로운 5군단장이라 했으니, 앞에 ‘구’ 자를 붙여 구분하는 것 같았다.
아마 그놈도 여기 있을 텐데, 당장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떠올려봤다.
균열에서 처음 만났던 골렘의 모습은 확실히 대단했었다.
산을 움직이고, 지형을 비틀어 버렸던 막강한 힘.
깊은 호수 속에서 선소연을 끌어당겼던 인력.
그리고, 고유능력 「회복」
“예전보다 못해졌군.”
골렘의 상태는 딱히 좋아 보이지 않았다.
덩치만 클 뿐, 과거 보여줬던 위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여기 널려 있는 괴물들 중 하나 정도? 그냥 내가 성장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가?
[그때 같이 있던 인간 여자가 내 힘을 다 가져갔으니 그럴 수밖에. 아직 회복 중이다.]
“그런가? 그건 다행이네.”
난 골렘의 말에 속으로 안도했다.
이승에서 잃었던 힘이 이곳으로 왔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생긴다면 그건 정말 사기니까.
선소연이 놈의 핵을 부순지 벌써 1년이 흘렀다. 아마 놈 역시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펼쳐놨던 ‘골렘 펀치’를 다시 회수했다. 놈에게 적의가 보이지 않았고, 대화하면서 계속 유지하기엔 정신력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이곳은 적진.
최대한 힘을 아껴놔야 한다.
골렘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그렇군. 그대가 왕의 힘을 가져갔어.]
왕의 힘.
그러고 보니 그 거대한 호랑이도 이곳으로 왔을 텐데…….
산 몇 개를 합친 것만큼 커다란 호랑이.
죽어 있는 모습밖에 보진 못했지만, 그놈이 있다면 정말 위험해진다.
내가 힘을 뺏어갔다 해도, 신체 능력까지 뺏어간 건 아니니까. 아직도 발톱에 찢겼을 때의 고통이 뇌리에 남아 있다.
“왕도 이곳에 있나?”
[그렇다. 그대가 훔쳐간 힘을 복구하기 위해 회복 중이시지.]
“훔치다니. 제 발로 찾아온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발톱에 찢겨 쓰러져 있었을 때 결정체가 직접 우리의 몸에 들어왔다고 했으니까.
[그 힘은 인간이 품을 만한 힘이 아니다.]
“다들 그런 말 하더군. 근데 봐. 잘만 사용하고 있잖아.”
[……욕심부리지 말고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어떤가?]
“헛소리하지 마라, 골렘.”
저 빌어먹을 놈이 뭐라는 거야 지금?
그때 죽였던 오익마들도 그렇고, 이곳 괴물들은 하나같이 인간을 호구로 아는 건가?
“내가 말 좀 섞어 준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린 적이다.”
[……적, 그렇군.]
불의 종족.
이승에서는 지구를 침공했고, 저승에서는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했다.
이유도 없었다. 뭐, 그냥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른 거겠지. 순간, 궁금해졌다.
“저번에 봤을 땐, 삶에 지쳤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근데, 굳이 회복하는 이유는? 원한다면 소멸하는 방법도 있지 않나.”
[그때는 왕을 잃은 줄 알았으니까. 이런 곳이 존재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너희들은 인간을 가축 취급하고 있지.”
[…….]
나는 지금 상황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부활의 실마리인 줄 알았던 곳이 하필 놈들의 저승이라는 것에서 한 번.
다짜고짜 공격해오는 놈들에서 두 번.
그리고, 골렘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서 세 번 참았다.
금세 소문이 퍼진 건지, 기의 파동을 느낀 건지 주위에는 불의 종족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구 5군단장님은 온화하셔서 탈이야.]
[그러게, 겨우 인간 따위랑 말을 섞으시다니.]
[아마, 인간을 처음 보실 거야. 새의 함정에 빠진 후,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
[그나저나 뱀이 헛짓거리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 하는 거 아냐?]
[우리가 나서자.]
[너희들. 방금 와서 잘 모르나 본데, 인간 따위가 아니다. 저자는 왕의 힘을 가지고 있어.]
[맞아. 확실히 아까 그 공격은 위험했다.]
[왕의 힘? 그러면 되찾아야 하는 거 아냐?]
[그렇다. 저자를 잡는 순간, 왕께서 부활하실 것이다.]
놈들이 천천히 내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골렘은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슬쩍 뒤로 빠졌다. 그래. 한 번 보겠다는 거지?
나 역시 참을 생각이 없었다.
놈들이 약육강식 원리에 따라 인간을 공격한 것처럼 나도 똑같이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것도 놈들 왕의 힘을 이용해서.
고 오 오-
놈들의 투기가 온 피부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힘은 약하다지만 수천 마리의 기운이 한 곳에 집중되니 장난이 아니다.
난 슬쩍 눈을 감았다.
이제 온 정신을 불의 기운을 통제하는 데 써야 한다.
나에게 기회는 총 두 번뿐이다.
지금 한 번.
그리고, 「구사일생」발동 후 한 번.
그 안에 놈들 전부를 태워 죽여야 한다.
“덤벼라. 쓰레기들아.”
곧바로 커다란 골렘을 소환했다.
아까 그 정도의 크기로는 부족했다.
놈들의 수가 너무 많았고, 하나하나 크기도 대단했다. 주변 시야를 꽉 채워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우글우글했다.
난 골렘의 크기를 점점 더 키워갔다. 악을 쓰며 키우고, 또 키우고 반복했다. 내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담을 생각이었다.
열기에 대한 통제도 끊어버렸다. 그 강력한 힘에 지반 전체가 통째로 익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강산이 점점 용암으로 변해갔다.
[어찌, 인간이 저 정도의 기운을…….]
[크으윽. 다들 견뎌내야 한다. 저 힘을 되찾아내야 해.]
[확실히 인간이 저 힘을 완벽히 다스릴 줄 알게 되면 우리 종족이 위험해질 것이다.]
[다들 힘을 모아라. 협공해야 한다.]
놈들 역시 기운을 한 곳에 뭉치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군단장급도 섞여 있는지 그 힘 역시 막강했다.
내가 만든 골렘 못지않은 정도였다.
콰아아아-
천지가 거세게 요동쳤다.
가공한 기운들이 꿈틀거리며 엉키기 시작했다. 이미 주변은 불바다였다.
인제야 조금 저승 같아 보인다.
“그래, 한번 부딪혀 보자.”
육체에 점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옷과 가방은 이미 녹아버린 지 오래고, 시야 역시 점점 흐릿해졌다.
아무래도 안구가 열기에 무리가 가는 것 같았다.
난 온 힘을 다해, 다시 한번 골렘의 주먹을 뻗으려 했다.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최선을 다해서.
그때였다.
흐릿해져 가는 안구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뿌옇게 퍼진 시야였지만 텍스트만은 또렷하게 잘 보였다.
그 말은 안구에 무리가 간 게 아니라, 누군가 내 시야에 간섭하고 있는 것이다.
[‘상점 제작자’가 그대를 강제 이동시킵니다.]
상점 제작자?
잠깐. 왜 하필 지금?
저 빌어먹을 놈들을 다 쓸어버릴 타이밍인데.
[10초 후 이동합니다. 10…… 9…… 8…….]
10초?
10초면 충분하다.
난 다시 한번 집중했다.
강력한 에너지 덩어리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진다. 놈들 역시 기운을 다 모았나 보다.
난 그 기운에 맞서 있는 힘껏 골렘의 주먹을 뻗어냈고, 순간-
번쩍-
하얀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강력한 폭발과 함께 강력한 고열이 주변 모든 것을 한순간에 녹여버렸다.
[7…… 6…….]
마치 핵폭탄이 터진 것처럼 중심부에서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부딪친 공기들이 하늘로 떠오르며 생기는 버섯구름.
웃긴 건, 그 광경이 생생하게 눈에 보인다는 거였다.
그래서 확인할 수 있었다.
군단장급 몇몇을 제외하고 놈들 대부분이 먼지처럼 녹아버리는 것을.
[5…… 4…….]
그러나 내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폭발 속에서 살아남은 몇몇과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 수도 없이 몸을 부딪쳤다.
끝없이 요동치는 소용돌이에 몸이 점점 넝마가 되어가는 게 느껴질 찰나-
[구사일생이 활성화됩니다.]
[죽음에 가까운 피해로 인식, 아공간으로 1분간 이동시킵니다.]
[회복을 시작합니다. 스킬 Lv.10. 회복률 100% 적용됩니다.]
스킬이 발동했다.
그렇게 붕 뜨는 의식을 느낌과 동시에-
[3…… 2…… 1……. ‘상점 제작자’가 있는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시야가 암전했다.
***
텅 빈 공간.
빛은 없지만, 육체는 보이는 곳.
누군가가 이 공간을 굳이 표현해 달라 부탁한다면 ‘별이 보이지 않는 우주’라 대답할 것이다. 내가 이동한 곳은 「구사일생」 스킬 속 아공간과 비슷했다.
다만, 그곳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 속에 나 말고도 또 하나의 생명체가 있다는 것.
난 시선을 돌려 그 존재를 천천히 확인했다.
온몸에 덮인 날카로운 비늘들.
크라켄과 비슷할 정도의 거대한 크기. 똬리를 튼 채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커다란 뱀이었다.
“네가 ‘상점 제작자’인가?”
분명히 텍스트에서 나를 ‘상점 제작자’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겠다 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것 보니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요.]
놈을 보니까 오익마나, 불의 종족들이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뱀이 장난을 친 모양이군.〉
〈뱀이 허술하게 만들었나 보군. 새가 만들면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나저나 뱀이 헛짓거리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 하는 거 아냐?〉
그놈의 뱀이 누군지 궁금했었는데, ‘상점 제작자’였을 줄이야. 그리고, 창조의 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넌, 물의 종족이구나.”
[……그렇습니다. 그대의 정보에 따르면 ‘레비아탄’이라 부르시면 될 겁니다.]
새는 균열에서 봤던 물의 왕일 테고, 문어는 크라켄, 뱀은 레비아탄인 건가?
그나저나 「아베르노」엔 불의 종족만 있는 줄 알았는데, 물의 종족도 있었구나.
“날 이곳으로 왜 불렀지? 그리고 물의 종족이 왜 인간을 위협하는 저승을 만든 것이냐. 허술한 상점까지 만들어가면서.”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요. 나중에 ‘정보 주입’으로 알려주겠습니다. 우선…….]
‘정보 주입’
오랜만에 들어본다.
크라켄이 아직 정신력이 부족하다며 시도하지 않았던 기술. 이제 놈들의 과거에 대해 들을 준비가 되었단 건가?
[그대가 원하는 것은 부활이겠지요?]
순간 귀가 쫑긋했다.
“부활할 방법이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대의 기억을 들춰보니 이곳이 호리병 모양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군요.]
문어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물의 종족들은 하나같이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편하긴 한데, 무언가 께름칙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호리병의 구멍은 맨 위에 있지 않습니까. 이곳 꼭대기를 통과하면 다시 지구로 갈 수 있습니다. 단, 그게 무척이나 힘들다는 점이지요.]
내가 눈을 크게 뜨자 뱀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곳엔 「테르미노」라는 끔찍한 존재가 봉인되어 있습니다. 그 존재를 설득해야 합니다.]
“설득?”
[그렇습니다. 그대가 부활하기 위해서는 그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인도자가 잠깐 흘러가듯 얘기했던 「테르미노」.
그 존재가 이곳의 출입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였단 말인가.
“놈은 강한가?”
[그 존재와 절대 싸울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아마 불의 종족, 물의 종족 전부가 덤벼도 이기지 못할 겁니다. 무조건 설득해야 합니다.]
“그 정도야?”
[네. 차후에 설명해 드리겠지만 불의 종족이 지구를 침공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테르미노」 때문에 지구를 침공한다고?
[저는 수천 년 동안 이곳에 봉인되어 있으면서, 많은 인간을 이곳으로 인도했습니다. 대다수가 부활을 원했지만, 그 누구도 그 존재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단, 한 명을 빼놓고는…….]
“그런데 무슨 수로 설득하란 말이냐.”
[당신은 다릅니다. 그대는 「테르미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해결해 줄 능력을 갖추고 있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곧 정보 주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자연히 알게 되실 것이고, 그 존재도 간단하게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대신 한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
[부활에 성공하면 그대 기억 속에 있는 크라켄을 죽여주십시오.]
“뭐라? 크라켄을?”
[정보 주입이 다 끝나면 알게 되실 겁니다.]
레비아탄이 서서히 똬리를 풀기 시작했다.
‘정보 주입’인지 뭔지를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서 나오는 빛이 내 머리를 비추기 시작했으니까.
[기억 전송이 시작될 겁니다. 많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잠깐.”
[무슨 일이십니까.]
“테르미노를 설득했단 그 사람이 누구지?”
그냥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왕의 힘도 없이, 단순히 본인의 힘으로 「아베르노」까지 올라와 부활까지 성공한 존재는 누굴까.
레비아탄이 커다란 혀를 날름거렸다.
[그 사람 말입니까? 그대의 기억 속에도 있군요. 저승에서도 유명했었지요.]
“그래? 누군데.”
[많은 사람이 그를 지저스(Jesus)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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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레비아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