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대위 귀환하다 092화
24. 서로 다른 선택(3)
“결국, 안 가려고?”
내가 태연히 대답하자 손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표정의 의미는 분명했다. 이곳에 남는 걸 선택했다는 거겠지…….
사실, 그녀가 이곳 생활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표정에서 다 드러난다. 얼굴에 쓰여 있어. 가기 싫다고.”
“그, 그래요?”
“최근 들어 고민하는 게 그거였구나?”
식사시간이나, 수면시간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던 그녀.
처음엔 그냥 가족 생각 하나보다 싶었는데, 커다란 구덩이를 본 이후로부터 더 심해졌다.
부활을 시도하는 게 두려운 것이다.
“……네, 맞아요.”
“그렇군……. 진짜로 남는다 할 줄은 몰랐는데.”
지구의 상황이 많이 좋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는 삶의 터전이다.
무법지대인 이곳과는 성격 자체가 다른 인류의 진정한 고향.
아무리 저승이 힘과 영혼석만 있으면 지구보다 편한 곳이라 해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갑자기 넘어온 그녀에겐 힘든 선택이었을 거다.
그냥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니…….
“사실, 전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운이 좋다고? 네가?”
죽음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녀는 나름 정말로 억울하게 이곳으로 왔다.
그녀로선 직장 상사에게 이불 덮어주다가 죽은 거니까.
아마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고도 웃긴 사인(死因)일 것이다. 그런데도 운이 좋다고?
“네. 단장님 덕분에 이곳에서 나름 상류층 소리 들을 정도로 성장했고, 또 외모도 가장 맘에 드는 나이에 온 것 같거든요. 이슬 언니가 그랬잖아요. 젊을 때 오는 것도 이곳에선 엄청난 축복이라고.”
“그럼, 가족들은?”
“아마, 제 걱정은 안 할 거예요. 그게……. 집안 사정이 좀 복잡거든요.”
씁쓸히 말한 손나연이,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사실, 지구에 남은 것도 없어요. 별로 가고 싶지도 않구요. 그리고 혹여나 부활한다 하더라도 죽으면 늙어서 다시 이곳으로 올 텐데, 그러면 지금껏 쌓아놓은 신체 능력 다 잃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전 이곳에 남는 게…….”
“알겠다.”
내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선택은 그녀의 몫.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없으면 기동이 편해진다. 입장권 하나를 덜 구해도 되고. 나로선 환영할 일이다.
“죄송해요.”
“뭐가?”
“끝까지 보좌하지 못해 드려서…….”
“보좌는 무슨…….”
보좌는 오히려 내가 했지…….
살려주고, 키워주고, 기술도 알려주고…….
물론, 나 때문에 사고에 휘말린 것에 대한 책임감이었지만.
하지만 오늘 그녀는 선택했고,
이로써 내 책임은 여기까지다.
***
쉘터 입구.
여자들의 가방 셔틀로 전락한 이지한과 그녀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렇다.
이제 떠날 시간인 것이다.
그녀들은 오늘부로 독 안개 지역에 다시 들어서겠다고 했다. 안 그러면 15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나?
“복덩이 씨. 죽지 마.”
“그게 이미 죽은 자에게 할 소리냐.”
“큭큭, 여전하네.”
난 안이슬과 눈동자를 마주했다.
정말이지 운명이란 알 수가 없다. 신입과 간부로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식으로 흘러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곧바로 도망치거나 까불다가 얻어터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잘 해줬다.
나름 심심치 않게 분위기 메이킹 역할도 해줬고…….
“나머지 팁이다. 둘이 나눠 가져라.”
난 가방에서 남은 영혼석 전부를 털어줬고, 안이슬이 냉큼 옮겨 담았다.
4영혼석 132개.
모든 스킬을 강화한 나에겐 이제 쓸모없는 돌멩이일 뿐이다.
“고마워. 뭐, 이런 걸 다.”
“푼돈이긴 하지.”
“큭큭, 푼돈은 무슨. ‘고려’에 가서 이거 하나만 풀어도 난리 날걸?”
그녀가 4영혼석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확실히 여유가 생겼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3영혼석 하나에 득달같이 달라붙던 그녀였는데 이젠 별 감흥 없다는 태도다.
하긴, 독 안개 지역 쉘터에서 웨이브 한 번 겪고 나면 이 정도 영혼석은 우습다.
내가 피식 웃자,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한다.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운을 빌게.”
“그동안 감사했어요. 단장님.”
그녀들이 고개를 숙이자, 얼타던 이지한도 함께 고개를 숙인다.
약 반년.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들이 있었기에, 두려울 수도 있었던 저승 생활을 외로움 없이 보낼 수 있었다.
다시 고개를 올린 안이슬이 내 모습을 보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당차게 말한다.
“지구랑 똑같이 만들 거야.”
“응? 뭘.”
“우리 쉘터 말야. 나중에 일 다 끝내고 온대지역으로 와. 살기 좋은 사후세계를 만들어 놓을 테니까. 음…… 그러니까, 천국 같은?”
아무래도 그녀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 같았다.
좋은 현상이었다. 수명이 없는 공간에서 명확한 목표란 삶의 원동력이 되니까.
“기대하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려 걸어나갔고, 곧이어 그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잊지 마! 435구역이야!”
***
[텔레포트 스킬을 활성화합니다.]
[지정 등록된 장소가 있습니다. 1. 구덩이 2. 없음.]
[구덩이로 이동하시겠습니까?]
[5초 후 이동합니다. 5…… 4…… 3…… 2…… 1…….]
VIP 상점에서 뽑은 스킬이라 그런지 일반 상점에서 얻은 스킬보다 훨씬 친절했다.
복잡한 기운의 움직임 없이도, 사용하겠다는 의도를 가지는 순간, 텍스트가 떠오른다.
‘지정등록’은 예전에 미리 해둔 상태. 그녀들과 헤어진 이후 곧바로 이곳에 도착했다.
멀찍이 보이는 시커먼 홀.
이곳이 구역 내에서 오익마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자, 환생을 위한 마지막 관문이다.
예전과 변한 게 없었다.
아래에 느껴지는 찌릿찌릿한 기운.
왕의 힘을 얻지 못했다면 감히 도전조차 못 해봤을 것 같은 원색적인 공포가 피어오르는 곳.
순간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항우나 여포는 어떻게 이곳에서 오익마를 잡았단 거지?
그 사람들이 전설처럼 강했다 하더라도, 괴물인 불의 종족보다 강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신체 능력을 상점 한계 끝까지 올렸다 해도 이런 느낌을 받았을 텐데…….
“일단 들어가 봐야지. 혹시, 위험하다 해도 「구사일생」이 있으니까.”
나는 곧바로 홀을 향해 몸을 던졌다.
구덩이는 깊었다.
배에 느껴지는 알싸한 느낌이 선소연과 균열에 떨어졌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눈을 부릅뜬 채 하강한 지 5분 정도 흘렀을까, 구덩이는 점점 넓어져 더 구덩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커져갔다.
그와 동시에 시커멓던 공간이 점점 밝아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막대한 기운 역시 점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밀도가 높아졌다.
“크윽.”
절로 나오는 비명 소리.
숨이 턱턱 막혀오기 시작했다.
순간, 눈앞에 텍스트가 떠올랐다.
[의사소통이 활성화됩니다.]
이종(異種)과도 대화할 수 있는 스킬인「의사소통」이 활성화되었단 것은 무언가 나타났다는 말인데…….
난 급하게 주변을 돌아다 봤다.
그러고는 기겁했다.
떨어지는 곳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바닥이 있었고, 그 바닥 한가운데엔 원형으로 설계된 구멍이 보였다.
‘구덩이’ 속에 ‘구덩이’라니…….
어쨌든 기겁한 이유는 그 원형 구멍 속에 보이는 무언가 때문이었다.
하얀빛으로 넘실거리는 막대한 에너지의 응집체.
밖에서 느꼈던 기운의 정체는 오익마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정체불명의 ‘하얀 용암’이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오익마 두 마리가 서 있었다. 날개 수가 다섯 쌍인 것을 보니 확실하다.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신체 능력이 이렇게 반응한다는 것은 위기상황이라는 것. 난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신을 집중했다.
고 오 오 오-
기괴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리는 ‘하얀 용암’.
이 궤적 그대로 떨어지게 되면 저 응집체에 곤두박질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일단 발이나 손을 디딜 수 있는 곳이 필요한데, 당연히 없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최대한 비틀어 주먹을 내지르기로 했다.
옆으로 에너지를 보내면, 역학 법칙에 따라 궤적이 틀어지겠지.
난 날개를 퍼덕이는 오익마를 쳐다봤다.
느껴지는 기세로만 봤을 때는 군단장보다 좀 더 낮은 수준? 해볼 만했다. 게다가 두 마리라니 고맙기까지 하다.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놈을 향해 주먹을 뻗으려는 찰나-
고 오 오-
하얀 용암 줄기 하나가 뻗어 나와 내 몸을 움켜쥐었다. 내 신체 능력으로도 반응하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였다.
“끄아아악!”
엄청난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왕의 발톱에 베인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충격이었다. 온몸에 있는 활기가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나타난 영혼인데, 이렇게 강하다고? 세상에 거기다 생령이잖아?”
“이거 어떡하지? 빨리 닫아야 하는데, 오래 열면 공간 자체가 위험해진다고.”
순간, 내 모습을 지켜보던 오익마 두 마리가 대화를 시작했다.
분명 귀로는 ‘키르륵’, ‘케르륵’하는 소리로 들릴 뿐인데, 내 머릿속에는 일반 사람들의 대화처럼 해석된다.
기록사에선 분명 오익마와 의사소통 스킬 없이도 대화가 가능하다 했었는데, 역시 믿을 게 못 된다.
하얀 용암은 날 움켜쥔 채로 서서히 밑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불의 기운을 끌어내려 해봐도 기운이 턱 막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불가항력의 상황이었다.
고작 ‘터치’ 한 번에…….
“이제 30초밖에 못 열어.”
“괜찮아. 거의 다 끝났어. 아마 곧 훌륭한 에너지원이 될 거야. 정말 역대급이겠군.”
“왕께서 칭찬하시겠어.”
놈들이 못 알아들을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도 도저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온몸의 신경세포를 다 절단하는 것 같았다.
방심했다.
4차 탈피를 목전에 둔 나에게 이런 무력감을 줄 수 있는 무기가 있을 줄이야.
빠져나가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내 육체는 하얀 용암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이제 이 속에 빠지면 죽음이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
[구사일생이 활성화됩니다.]
아공간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
[죽음에 가까운 피해로 인식, 아공간으로 1분간 이동시킵니다.]
[회복을 시작합니다. 스킬 Lv. 10. 회복률 100% 적용됩니다.]
아공간은 신비했다.
시간이 정지한 듯, 움직일 수 없는 몸과 붕 떠 있는 의식.
사라졌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복구되기 시작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스킬이었다.
난 일단 놀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런데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적어도 놈들과 싸움이라도 해볼 줄 알았지,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지는 몰랐다.
「구사일생」이 없었으면 진짜 죽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스킬을 만든 상점 제작자는 뭐 하는 놈일까.
불의 종족 전체가 덤벼도 안 될 것 같은 ‘하얀 용암’을 상대로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스킬이라니.
어쨌든 남은 시간은 1분이다.
그 응집체가 뭔진 모르겠지만, 놈들이 분명 30초밖에 못 연다고 했다. 일단 위기는 넘긴 것이다.
그거와 별개로 의문이 남는다.
놈들은 나를 ‘생령’이라 표현했다.
생령(生靈)이란 살아 있는 영혼. 그렇다면, 난 아직 죽은 게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에너지원?
놈들은 영혼을 잡아다 에너지원으로 쓰는 걸까? 환생은? 「아베르노」는? 그리고 왕은 또 누구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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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아베르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