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대위 귀환하다 088화
23. 독 안개(3)
「랜덤 스킬 상자」
고양이는 이 상자를 확률 뽑기 게임에 비유했다.
상점 제작자가 대충 끄적여 만든 최하급 스킬부터, 심혈을 기울여 만든 최상급 스킬까지 무작위로 얻을 수 있는 상품.
기본적으로 일반 상점에서 판매하지 않는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것은 맞으나, 그게 좋은 스킬일 거란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상자 샀구나?”
영롱한 빛을 뿜는 상자에 관심을 가진 안이슬이 다가왔다.
“영혼석이 남기도 하고, 재고도 얼마 남지 않아서.”
“그래? 여기서 괜찮은 스킬 건졌다는 사람 거의 없다는 데도 잘 팔리는 거 보면 은근히 도박 좋아하는 사람들 많아.”
“이 상자에 대해서도 잘 아나?”
“응. 기록사에선 이걸 ‘쓰레기 박스’라 표현해. 요놈이 좋은 스킬을 뱉어내는 걸 본 사람이 없다더라고. 수백 년을 열심히 모아서 샀는데, 몸을 씻겨 주는「클리닝 바디」나 수면 유도 스킬인 「굿나잇」 같은 게 나왔다고 생각해 봐.”
“바로 욕설 튀어나오겠군.”
난 즉각 대답했다.
말로만 들어도 정말 쓸모없는 스킬이었으니까.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안이슬이 히죽거렸다.
“심지어 「굿나잇」같은 경우, 남은 재울 수 없고 본인에게만 사용 가능하대. 킥킥, 무슨 불면증 환자를 위한 스킬도 아니고…….”
“……그런 거 말고, 좋은 스킬에 대한 기록은 없나?”
“음……. 수천 년 동안 기록된 스킬 중 쓸만해 보이는 건 「데스 노트」나 「헬 파이어」 두 개뿐이야.”
“그건 뭔데.”
“「데스 노트」는 말 그대로 하루에 한 번 노트에 상대의 이름 적으면 그대로 소멸시킬 수 있어. 악마를 상대로 쓸 수 없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단 평을 받고 있고, 「헬 파이어」는 한 달에 한 번 운석 떨어뜨릴 수 있는 건데, 그것 때문에 한바탕 난리 났다 했었어. 거의 전략 병기 수준이잖아.”
“…….”
순간 괜히 샀나 싶었다.
분명 이전보단 나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에겐 쓸모없는 스킬들이었다.
누굴 죽여야 한다면 직접 죽이면 되고, 운석은 파괴력이 있지만 피아구분이 안 된다.
즉, 얻는다 해도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큰 기대는 말란 거야. 4영혼석 10개에 최상위 스킬들을 확정적으로 뱉어낸다면, 리필 되자마자 다 사라졌을걸?”
“흠…… 그렇군. 알겠다.”
아마 그녀가 본 기록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애초에 100년에 10개밖에 풀리지 않는 한정판 상품이기도 했고, 스킬 슥듭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 남들에게 정보를 알려주고 다니진 않았을 테니까.
“그럼 한번 열어 봐. 말은 이렇게 했어도 기대되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거든.”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는 그녀를 바라보며 난 빛나는 상자를 천천히 개봉했다.
[랜덤 스킬 박스가 활성화됩니다!]
텍스트 화면과 함께 응축되어 있던 빛이 하늘로 솟구쳤다. 손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미리 말을 들었음에도 내심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발, 쓸만한 게 나오길…….
[상급 스킬 「구사일생」을 획득하셨습니다!]
[랜덤 스킬 박스의 내구도가 0이 되었습니다!]
이윽고, 솟구친 빛이 내 머릿속으로 흡수됨과 동시에 상자가 순식간에 부식되었다. 그와 동시에, 스킬 정보가 텍스트에 떠올랐다.
〈스킬 정보〉
이름 : 구사일생
등급 : 상급
유형 : 패시브 (영혼 각인)
기간 : 한 달에 한 번
설명 : 상점 제작자가 심혈까지는 아니고 제법 성의를 들여서 제작한 스킬이다. 사용자가 죽음에 가까운 피해를 받을 경우, 그 육체를 자동으로 급조한 아공간에 5초 동안 이동시켜 몸을 회복시킨다. 그 후, 다시 그 자리에 뱉어낸다.
난 멍하니 정보를 확인했다.
웃기는 스킬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죽음이란 표현을 쓰다니.
“왜. 뭔데, 뭔데.”
안이슬은 당당하게 스킬 정보를 요구했고, 손나연도 궁금한 표정이었다.
이것들 봐라. 스킬도 엄연히 개인정보일 텐데.
그래도 뭐, 말해준다 해도 딱히 위협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난 천천히 정보를 읽어줬다.
“뭐야. 너 같은 괴물한텐 별 쓸모없는 스킬 같은데?”
안이슬이 역시는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아베르노」에 어떤 존재가 도사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장의 한 수를 가지고 다닌다는 건 더 과감하면서도 치명적인 판단을 가능케 한다.
일단은, 목숨 하나를 보험으로 들어놓는 스킬이니까.
또, 영혼 각인이라는 말이 혹여나 부활하게 되더라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라면 총사령관과의 싸움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래도 상자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 알려준 안이슬에게 팁으로 3영혼석 1개를 던져줬고, 그녀들도 쇼핑을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아까부터 쭈뼛거리던 노숙자 세 명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저, 저기요.”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남자 둘과 나름 이색적으로 생긴 서양 여자 한 명이었다.
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용무이길래 저렇게 주저하면서 오는 거지? 아, 누워서 자고 있는 샤론이란 여자 때문인가?
“전 실비아라 해요.”
서양 여자가 대표로 말했다.
「의사 소통」스킬 때문일까, 발음을 보니 러시아어 같은데 의미는 그대로 전달됐다.
내가 입을 열려던 바로 그 찰나, 안이슬이 선수 쳤다.
“왜? 구걸 왔니?”
상당히 직설적이고 거센 화법이었다.
아니, 근데 얘는 아까부터 왜 이리 저돌적인 거야.
이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기본적인 ‘예의’라는 게 사라지는 건가? 그냥 아픈 동료가 걱정돼서 온 것일 수도 있는데 다짜고짜…….
“네. 맞아요.”
“…….”
난 순간 말을 잊었다.
저렇게 당당하게 구걸을 한다고?
안이슬은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크큭, 겁도 없네? 아까 남자들 절뚝이면서 도망가는 거 못 봤어?”
“……봤어요.”
“근데? 그니까 내 말은, 우리가 이 쉘터의 적일 수도 있잖아. 뒷감당이 두렵지 않은 거니?”
“……여유로우시잖아요.”
“음?”
실비아가 안이슬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찢어 죽일 놈들을 건물로 보내고도, 여유롭게 상점을 이용하고 계시잖아요.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요?”
“호오- 이것 봐라. 지금 이쪽으로 붙겠다는 거야?”
“……원하신다면요. 우리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온 이후로 이곳의 외부인은 당신들이 처음이거든요.”
대담했다.
아까부터 쭈뼛거리는 노숙자들이 많긴 했지만, 이들처럼 직접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악덕 쉘터에 반하는 행동이었으니까.
“그래서 대가는?”
“우릴 원하는 대로 사용해도 좋아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만 해주세요.”
“원하는 대로? 수위는?”
“끝까지요. 너무 함부로 대하지만 말아주세요.”
실비아가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옷을 슬쩍 내리며 말했고, 안이슬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자긴 어때? 얘 매력적인 게 가지고 놀만 할 것 같은데?”
난 당황했다.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답하지 않자, 안이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우리 대장이 아가씨가 맘에 들지 않나 봐. 뭐, 나도 그래. 난 기생오라비 스타일보다 우리 복덩이 씨처럼 사내다운 남자가 좋거든.”
어느새 옆에 다가온 그녀가 내 복근을 쓸었다. 징그러운 느낌에 반사적으로 손을 쳐내려는 찰나-
“게 썩 꺼지거라.”
저음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부터 건물 앞에 앉아 우릴 유심히 지켜보던 노인이었다.
그는 노숙자들에게 훈계를 시작했고, 실비아는 그 노인을 한번 째려보더니 뒤로 물러섰다.
우리가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자 노인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대뜸 안이슬에게 말한다.
“꼬마가 많은 걸 알고 있구나. 경험이 많거나, 아니면 기록사 공부를 꾸준히 했겠어.”
그 말에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누구니?”
“고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반말을 하느냐.”
“하- 웃기는 늙탱이네. 저승에 나이가 어딨어? 너 언제 왔는데.”
“쯧쯧. 버릇하고는. 오래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100년은 넘게 흘렀을 거네.”
안이슬이 50년 정도 있었다 했으니까, 확실히 그녀보단 나이가 많았다.
“겨우? 난 200년 넘었어.”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안이슬.
황당했다. 아니, 의심했다. 이거 애초에 50년도 거짓말 아니야?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인할 방법도 없는 것 가지고 의미 없는 논쟁은 그만하자꾸나.”
“아니, 그래서 넌 누구냐니까. 왜 다짜고짜 와서 쟤들 쫓아내는데. 왜. 노인이 대주게?”
“흘흘, 내가 누구냐고…….”
노인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전 쉘터장이라네. 난 이곳에 자리 잡고 40년 동안 독 안개 지역에 대해 연구했어. 그리고, 오익마에 대한 명예로운 도전을 하는 자들을 위해 도와왔지. 약 한 달 전 소환된 그놈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놈?”
“새로운 쉘터장을 말하는 거라네.”
“뭐? 한 달도 안 된 피래미가 쉘터장이라고?”
안이슬이 놀랐다가 날 보고 아차 했다.
“하긴, 이런 괴물 신입도 있는데. 뭐.”
“놈의 적응력이 대단하더군. 어디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았네. 무슨 갓 소환된 놈이 기존 쉘터 간부들을 다 때려잡고, 나중엔 삼익마까지 잡더군. 그것도 영혼석 하나 없이.”
“근데 넌 왜 안 잡았대? 생긴 게 딱 때려잡기 좋게 생겼는데.”
“고얀……! 쉘터 회원들이 곧장 놈에게 붙었고, 그들이 내 독 안개에 대한 지식이 꽤 쓸모 있을 거라고 말해줬다네. 그러니 죽이진 않더군. 결국, 내가 만든 쉘터에 갇혀 이들이 하는 천벌 받을 짓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된 거지.”
노인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일궈낸 쉘터를 한순간에 빼앗긴 억하심정의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분명 소환된 신입은 지구에서 힘 좀 썼던 헌터였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그래서 그 대단한 놈은 어딨는데.”
“지금 여기엔 없네. 아마 주변 쉘터 점령 겸 순찰을 떠났을 걸세.”
“아하- 그래서 건물에 틀어박혀 안 나오는 거였구만.”
“아마, 그럴걸세. 실력 있는 놈들은 죄다 데려나갔거든.”
“그래서 노인네. 우리한테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뭐야? 뭐, 쉘터라도 되찾아 달라는 거야?”
안이슬의 물음에 노인이 눈을 빛냈다.
“자네들도 기록사를 보고 온 거겠지?”
“그런데?”
“그곳에 제대로 된 정보가 적혀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렇지 않을까?”
“아마 그 말을 믿고 도전했다 죽어 나간 사람만 수천 명이 넘을 걸세.”
“뭬야?”
그녀가 당황했다.
기록사만 믿고 ‘안내자’ 역할을 맡고 있는데, 노인이 그것을 부정했으니까.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내 도와주겠네. 자네들이 꼭 중앙지역에 다가갈 수 있도록.”
노인이 진심을 다해 말했다.
사실 그를 보다 보면 무언가 거장의 냄새가 난다.
40년간 이 지역을 왜 연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화 하나하나에서 노련함과 자부심이 느껴진다.
난 이번엔 안이슬보다 그를 믿기로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즉, 공짜가 없으니까.
내 말을 들은 노인은 잠깐 고심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없다네. 이건 애초에 내가 하던 일이야. ‘도전자’들을 인도해주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의미였고, 이 지루하고 끝없는 삶 속에서의 유일한 보람이었네. 난 단지 그걸 다시 찾고 싶을 뿐일세.”
살아가는 의미.
그것이 노인이 이 지역을 연구하는 이유였다.
오랫동안 늙지도 않고, 병에도 걸리지 않는 공간.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면 사람은 게을러질 수밖에 없다.
쉘터 ‘고려’에서 오직 유흥과 술값에 모든 것을 퍼붓는 이들처럼.
어차피 늙지 않으니까.
굳이 힘겹게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내일 해도, 1년 후에 해도, 어차피 시간은 널널하기에.
노인은 환생이란 목표 대신에, 남을 돕고자 하는 목표를 잡고 그것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40년 동안 올바른 인도를 통해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꼈을 것이다. 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악덕 쉘터장은 노인을 죽이지만 않았을 뿐,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만들어놨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도움 좀 받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노인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쉘터장과 그 무리들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보초들 다 어디 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