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대위 귀환하다 084화
22. VIP 상점(2)
“빽빽한 밀림 위주로 지나갈 거야. 그게 제일 빠르게 가는 방법이거든. 빙빙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까.”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안이슬이 사냥터 쪽을 가리켰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비운 것 같았다.
신입들에게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 해놓곤, 당차게 통과하려는 것 보면…….
“또 왠지는 모르지만, 나무가 많은 곳에 악마들도 많이 살아.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지?”
“응. 영혼석이 많이 필요하거든.”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조건?”
협박당하는 처지에 조건이라……
그래. 웃기긴 하지만 일단 들어는 보자.
“먼저 날 확실하게 지켜줘.”
“그건 걱정하지 마라. 오익마의 위치를 확인할 때까지 넌 죽고 싶어도 못 죽어.”
“말을 해도 꼭……! 어쨌든 그다음엔……. 나도 성장할 수 있도록, 일익마 몇 마리쯤은 잡을 수 있게 해줘. 너희들이 오익마한테 죽고 나면 나 혼자 복귀할 힘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일익마라…….”
“아니면 정말 때려죽여도 못 가. 가서 죽으나 지금 죽으나 매한가지거든.”
그녀가 배짱을 부렸다.
그런데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이들이 성장할수록 여행길이 편해지고 속도도 빨라질 테니.
어차피 하급 악마들의 영혼석은 푼돈이다.
“좋아. 너희 둘이서 일익마, 아니, 이익마까지 맡아라. 삼익마부터는 내가 처리하지.”
“난 일익마밖에 못 잡는데. 무슨 이익마야.”
“걱정하지 마라. 케어해 줄 테니.”
이제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할 차례.
난 가방을 들었고,
안이슬은 놓아뒀던 검을 챙겼다.
그러자 옆에서 손깍지를 끼고 관절을 풀던 손나연이 물었다.
“혹시 사익마가 나오면 어떡하나요?”
안이슬이 곧바로 쏘아댔다.
“멍청하긴. 사익마는 추운 지방에서만 나와. 더운 지방에선 삼익마가 제일 센 놈이야.”
“왜 또 시비예요? 처음 왔는데 당연히 모르는 거지.”
“쯧쯧, 그러게 누가 교육을……. 하- 됐다.”
그녀가 핀잔을 주다 내 눈치를 보더니 말을 멈췄다. 교육을 받지 않은 게 그녀의 선택이 아닌 내 선택이란 걸 직감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의문이 생겼다.
이곳 전부가 열대지방인 줄 알았는데 한대지방도 있는 건가?
“추운 지방?”
“응. 구역 중앙이 추운 지방이야.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더워지고.”
“신기한 공간이군.”
“사실 나도 들은 거라 정확한 건 아냐. 직접 가본 적은 없거든.”
“뭐?”
내 표정이 굳자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난 거짓말한 적 없어. 분명히 가는 방법을 안다고 했지, 가봤다고 한 적은 없잖아. 그리고 구역 전체를 다 뒤져 봐. 그곳에 가본 사람은 손에 꼽을걸? 다 기록사에 남아 있는 거지.”
그놈의 ‘기록사’
그런데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확실히 옛날 사람들은 지금보다 사정이 나았을 테니까.
특히 어렸을 때부터 도검류에 친숙하며, 전쟁이 밥 먹듯이 일어났던 세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지금보다 이곳 생활에 더 빨리 적응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가는 방법은 정확한 거고?”
“그건 확실해. 믿어도 좋아.”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
출발하고 나서 꽤 시간이 흘렀는지 벌써 해가 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커다란 나무 밑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확실히 열대지방은 열대지방이었다. 잊을 만하면 내리는 스콜성 폭우. 안이슬은 나무 밑에서 푹 젖은 소매를 쥐어짰다.
“흐유- 이놈의 비. 정말 징글징글하네.”
“해가 진 건지, 먹구름에 가린 건지 구별이 안 되는군.”
내 말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큰일이네. 해랑 달이 안 보이면 방향을 잡을 수가 없는데.”
“나침반 없나?”
“무슨 놈의 나침반이야. 여기가 지군줄 알어? 그건 가져와도 쓸모없어.”
“아, 그렇겠군. 자기장이 없으니까.”
이곳은 지구도 아닐뿐더러,
끝이 없는 대륙이 이어진 세계.
동서남북의 개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해는 어떻게 지고, 떠오르는 거지? 뿐만 아니라 날씨의 개념도 이상하다. 중앙지역에서 멀수록 덥다니…….
마치 ‘트루먼 쇼’에 나오는 가상공간의 트루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내가 말없이 생각하고 있자, 가벼운 한숨을 내쉰 안이슬은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육포와 과자 등 간단한 비상식량이었다.
“다들 먹어. 원래 일박할 계획이 아니어서 조금밖에 안 가져왔어. 아마, 조만간 주변 쉘터에 들러야 할 거야. 성장도 좀 하고 식량도 구해야지. 큼……. 큼. 아이씨- 목소리 다 나갔네.”
그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도 어딘가 퀭하니 낯빛이 어둡다.
“그러게 소리 좀 작작 지르라니까. 겨우 일익마 잡으면서 무슨 소란이란 소란은 다 피우는 거냐.”
“무서우니까 그렇지!”
“분명 오익마 잡을 때까지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렇게 못 미덥나?”
“그런 게 아냐. 사실 이렇게 정신없이 사냥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일익마 30마리가 동시에 덮쳤을 땐 정말 오금이 저렸다니까.”
“왜. 또 지릴 뻔했나?”
“이게!”
나는 발끈하는 안이슬을 바라보며 육포를 뜯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린 밀림을 통과하며 악마들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찾아다녔다. 보이면 보이는 대로 다 잡으면서 이동한 결과 꽤 많은 영혼석을 수집했다.
3영혼석 20개
2영혼석 52개
1영혼석 320개 (안이슬 45개, 손나연 35개 포함)
가방에 쌓아둔 결정체를 본 안이슬이 ‘이 정도면 쉘터 하나를 세워도 될 정도야!’라고 외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물론, 내 성에 차진 않았지만…….
손나연도 나름 잘 적응했다.
알려준 대로 주먹을 휘둘러 일익마들을 잡았는데, 점점 자세가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여자 전부 이익마를 상대하기엔 버거워 보였다.
안이슬은 이익마 이상부턴 신체 능력만으로는 무리고 스킬을 배워야 비벼볼 수 있다며, 계속 나보고 괴물이라 했다.
어쨌든, 나에게 편하게 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안내자로서의 역할은 훌륭했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안이슬.”
“뭐!”
“오늘처럼 계속 잘 안내해. 그러면 팁을 주지.”
“정말이야? 뭐, 영혼석이라도 주려고?”
“그래. 오늘치 3영혼석 1개 주마.”
“꺄악!”
그녀는 언제 피곤했냐는 듯 다시 활기를 찾았다. 그러고는 땡잡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앞으로 성심껏 모실게!”
“저…… 저는요?”
손나연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온종일 말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안이슬보다 10마리 못 잡았다는 것에 경쟁심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너도 잘 보필해. 앞으로 노숙이나 식사는 네가 담당해. 그럼 팁 줄게.”
“……알겠어요.”
***
짧은 휴식 후, 우리는 다시 이동했다.
이번엔 사냥이 아닌 밤을 지새울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목적지로 이동하기엔 먹구름이 껴도 너무 많이 꼈다.
어스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빠르게 적당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하이고- 환생은 어찌하라고,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건지. 망할 놈의 신들. 안 그래도 시커먼 애들인데 밤에 상대하면 진짜 안 보일 텐데…….”
이동하면서 안이슬이 앓는 소리를 했다.
“단장님이 계시는데 뭐가 문제에요…….”
“상황이 공포스럽잖아. 상황이. 넌 공포영화 볼 때 진짜 죽을까 봐 무서워하냐?”
“전 공포영화 안 무서워하는데요?”
“됐다. 됐어. 너랑 무슨 말을…….”
“그래도 말해야 할 텐데요?”
“에이씨- 제기랄,”
그녀들이 억지로 대화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2영혼석 두 개를 조건으로 시켰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는 일행인데 서로 견제만 하는 게 불편하기도 했고, 높은 데시벨의 수다는 악마들을 자극하는 좋은 유인 수단이 되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사람들은 왜 환생을 하는 걸까요?”
손나연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그것도 옛날 말이지. 요즘 환생하는 사람 거의 없을걸? 맨날 영혼석 모아다가 술판이나 벌이느라 사익마는커녕 이익마도 못 잡는 게 태반이거든.”
“아니, 제 말은, 어차피 환생해도 결국은 이곳에 오는데 굳이 왜 하냐는 거죠.”
“아, 별거 없어.”
안이슬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곳에 소환될 때의 모습이 지구에서 죽을 때 모습 그대로인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젊은 모습을 가지고 싶어 하잖아.”
“그렇죠.”
“근데 대부분은 늙어서 온단 말이야. 오면서 잔병은 다 두고 온다지만, 젊을 때 죽은 애들을 보면 부럽지.”
“어차피 환생하면 기억 잃는 거 아니에요?”
“맞아. 그냥 도박하는 거야. 다음 생에는 예쁠 때 자살이라도 하기를……. 이러면서.”
“으엑. 그게 뭐예요.”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단 얼굴로 대꾸했다.
“소멸하자니 무섭고, 쭈글쭈글하게 살긴 싫고 그런 거지. 뭐, 나도 걔네가 어떤 마음인진 몰라. 나야 지금 모습이 마음에 드니까 환생할 생각 없는 거고.”
확실히 어이없는 이유였다.
손나연의 말 따라 기억을 잃는다는 건, 곧 죽는 거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그건 소멸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말도 있어. 다음 생을 보내고 다시 이곳에 오면, 전생이 전부 기억난다는 말.”
“오, 그거라면 좀 이해되네요.”
“물론 근거 없는 소문이야. 애초에 최근 들어 환생에 성공한 사람 자체가 없으니까. 아마 이번에 오익마 만나게 되면 놈이 설명해주지 않을까?”
그렇게 잡다한 대화를 하며 한참을 걷던 중 안이슬이 무언갈 발견했는지 멈칫했다.
“왜.”
“빛이야.”
“빛?”
“응. 저기 푸른색 빛 봐. 아무래도 여기에 쉘터가 있나 봐.”
그녀의 말대로 나무 사이로 푸르른 빛이 살짝 비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 상점의 벽 색이 저렇게 빛났었다. 안이슬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어. 오늘은 저기서 보내면 되겠네.”
“누구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 보통 밀림 속에 있는 쉘터는 다 빈 쉘터라 보면 돼. 악마 출현 빈도가 높아 유지를 못 하거든. 그래서 좀 크다 싶은 명문 쉘터들은 다 평지에 있어.”
“그렇군요.”
“아마 저기서 뒤진 애들도 꽤 있을 거야. 저런 데서도 가끔 신입이 소환되거든. 불행한 녀석이지.”
***
어느새 해가 완전히 졌다.
다행히 고양이 상점 앞은 가로등이 켜져 있는 것 마냥 밝았다. 손나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세상에, 여긴 건물 하나 없이 빈 평지네요?”
“응. 빈 쉘터라 했잖아. 쉘터 업그레이드하면 기본적인 천막은 생기는데, 어쩔래?”
“샤워실은 안 생기나요? 찝찝한데.”
“그거까지 하려면 적어도 삼익마 영혼석 정도는 있어야 할걸? 근데 어쩌나, 숙식은 이제부터 네 담당 아닌가?”
안이슬이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됐네요. 그냥 천막에서 자야지.”
“글쎄다. 네가 친애하는 단장님을 그런 후진 곳에서 주무시게 하겠단 거니? 아이고~ 팁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아니, 아까부터 왜 자꾸 견제하세요?”
“견제? 무슨 견제?”
“제 영혼석 쓰게 하려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실은 본인이 씻고 싶은 거잖아요.”
난 또 티격태격하는 그녀들에게 영혼석을 배분했다. 팁으로 3영혼석 1개씩, 그리고 본인들이 잡은 1영혼석의 개수만큼.
그리고 열심히 수다 떨어줬으니 2영혼석 두 개도 보너스로…….
“상점은 알아서 이용해라. 능력개발을 하든, 스킬을 익히든 본인이 잘 판단해서. 그리고 나연이 넌 가방 하나 구하고.”
그러자 두 여자는 언제 싸웠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영혼석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상점으로 달려갔다. 난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봤다.
안이슬은 그렇다 쳐도, 손나연이 조금 걱정되긴 했다.
환생 얘기도 그렇고 영혼석에 욕심내는 것도 그렇고, 그것 외에도 뭔가 이곳 생활을 즐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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