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대위 귀환하다 076화
20. 또 이상한 곳에 떨어졌다(1)
“주세요.”
손나연이 양 손바닥을 내밀었다.
“먹겠다는 건가?”
“……네. 저 같은 소시민들 입장에선 결정체 하나 구하는 게 집 구하는 거보다 수십 배는 어렵거든요. 이런 기회를 마다할 순 없죠.”
“그래도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을 텐데.”
“신중하게 생각한 거예요.”
“그 짧은 시간에?”
혹시 ‘신중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는 걸까? 내 시간 감각에 장애가 온 게 아니라면 분명 결정체를 제안한 지 10초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다.
“네. 먹어도 죽고, 안 먹어도 죽는 거라면 먹는 걸 택할래요. 먹는 건 적어도 가능성이라도 있잖아요. 아마, 이대로라면 하루도 못 버티고 쓰러질 거예요. 그럼 단장님이 버리고 가실 테고…….”
그녀가 억지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죽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
아까부터 비서의 몸 상태가 점점 악화되는 게 느껴졌다. 애초에 그녀의 상태가 괜찮아 보였으면, 검증도 안 된 결정체를 권했을 리도 없다.
창백한 안색.
떨리는 팔다리.
곧 탈수할 정도로 심하게 흐르는 땀.
난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더운 공간에서 체온까지 높아져 있었다.
“포기하면 버린다 했지, 아픈 애 버린다고 한 적 없다.”
“사실 단장님도 딱히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먹으라 하시는 거겠죠.”
맞다. 이게 아니라면, 나 또한 방법이 없었으니까.
오늘따라 선소연의 능력이 부러웠다. 내 능력은 파괴하는 것 말고 쓸 일이 없으니…….
“그래, 그냥 네 선택도 존중해 주고 싶었다. 어쨌든 네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고마워요. 단장님.”
“뭐가.”
“끝까지 책임져 주시려 해서요.”
씁쓸하게 웃은 나는 손나연의 손바닥 위에 결정체 하나를 올려놓았다.
블랙 사파이어를 보는 듯한 짙은 먹색의 보석. 어찌 보면 불길한 색이고, 어찌 보면 아름다운 그것이 그녀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
손나연은 그 보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과감하게 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꿀꺽- 삼키고는 씨익 웃는다. 겁이 없는 건지, 긍정적인 건지 그 미소가 나름 봐줄 만했다.
“상당히 터프한 캐릭터네.”
“……그냥 어차피 먹을 거였으니까요.”
“힘들 때 웃을 줄도 알고. 보기 좋아.”
“아, 웃는 거……. 죄송해요. 버릇이라.”
“아니, 아니, 뭐라 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선 징징거리는 것보다 웃는 게 훨씬 나으니까.”
난 슬며시 입꼬리를 내리는 손나연을 말렸다.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녀가 예뻐서가 아니라 그냥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한층 우울해진 마음을 씻어주는 느낌이 든다.
“예전부터 정말 힘들 땐, 웃곤 했어요. 이게 정신적으로 진통 효과가 있거든요. 지금처럼…… 어?”
그녀가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고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세, 세상에. 배고픔이랑 갈증이 싹 사라졌어요. 몸에 열도 없어진 것 같고, 두통도 없고……. 이거 굉장한데요?”
결정체를 먹은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창백한 안색에는 혈기가 돌았고, 떨리는 근육이 진정되었다. 아까보다 한껏 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더위는?”
“아쉽게도 더운 건 여전해요. 땀도 멈춘 것 같았는데 조만간 다시 날 것 같아요. 으……. 찝찝해. 그래도 저 산 거 맞겠죠?”
목소리도 활기를 되찾았다.
“일단 부정적인 쪽은 아니니 다행이야. 정확한 건 아니니, 좀 더 경과를 지켜보자.”
“네에. 단장님.”
일단 급한 불은 꺼진 것 같았기에, 나는 괴인들이 메고 있던 가방을 확인했다.
뭘 들고 다니길래 인간이 사용하는 물품을 메고 다닐까 생각하며 손을 안에 넣는 순간-
“이게 뭐지?”
깜짝 놀랐다.
분명 생긴 건 작은 배낭인데 팔을 깊숙이 넣어도 끝이 닿질 않는다.
그냥 허공을 휘젓는 느낌이었다. 벌써 어깨까지 들어갔는데도 말이다. 무슨 확장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건가?
“뭐, 뭐에요? 그거?”
손나연이 그 기괴한 장면을 보고 놀랐다.
“기다려봐.”
난 팔을 뺀 후, 가방 속을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집어넣었다.
내부는 딱히 불의 기운을 쓸 필요 없을 정도로 환했다.
약 4평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원룸 크기의 공간. 그 안에는 인간이 사용했을 법한 각종 옷가지와 무기들이 조금씩 쌓여 있었다.
난 얼굴을 뺀 후, 비서에게도 보여줬다.
“와……. 대단해요.”
“아무래도 신기한 마법이 걸린 물품 같다.”
“오늘 하루 정말 많은 걸 경험하네요. 이런 것도 가능한 세상이라니. 아, 단장님. ‘괴상한 동물 사전’인가? 그 영화 보셨어요?”
“아니, 그게 뭔데?”
“2년 전쯤 개봉한 영화인데 거기에 이런 가방이 나오거든요. 안에 집 지어놓고 사람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가방이요.”
“그래? 한번 들어가 볼까?”
우리는 가방에 대한 간단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후 소정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1. 그녀의 예상과 달리, 가방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들어가려고 시도하면 정체 모를 막이 밖으로 튕겨낸다.
2. 팔을 넣고 원하는 물품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손에 집힌다.
3. 안에 들어 있는 물품과 관계없이 가방의 무게는 동일하다.
4. 모든 물품을 꺼내겠다고 생각한 후 쏟으면 전부 튀어나온다.
“그냥 단순한 아공간 아티펙트라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겠어요.”
“편리하게 쓸 수 있겠군.”
우리는 가방 안에 있는 모든 물품을 바닥에 쏟아냈다.
얻은 것은 수십 벌의 의류, 수십 개의 무기, 그리고 지도하나.
“후우……. 문제는…….”
손나연이 복잡한 표정으로 뜸 들이며 말했다.
“이 옷들이지.”
“네. 딱 봐도 현대 옷인데 이거.”
청바지, 트레이닝복, 티셔츠, 핫팬츠…….
몇몇 괴상한 옷들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지구에서나 입을 수 있는 트랜디한 옷이었다. 골머리가 아파졌다.
“이곳에 인간이 존재한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저런 걸 괴인들이 입을 것 같지는 않고. 우리가 봤던 애들은 옷 입고 있지도 않았잖아요.”
“그랬지. 그냥 시커멨으니까.”
순수한 흑색 피부에 두 쌍의 날개.
확실히 그들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몸 전체가 검은색이었는데, 만약 옷을 입고 있었다면 색이 보였겠지.
“아마 괴인들이 사람들을 대량으로 죽였고, 전리품 삼아서 가방 속에 넣어 놓은 것 같아요. 이곳에 사람이 있는 건 확실한데, 여기에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우리처럼 불시착 한 건지 그게 문제겠네요. 아, 무기는 어떻게 구한 거지? 무기를 만들 정도면 아무래도 이곳에 무리 지어 사는 걸까요?”
“옷이 현대 복이잖아. 표류하던 사람들끼리 뭉친 걸 수도 있겠지. 어쨌든 차차 알아가 보자고.”
궁금했다.
그들은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
이런 곳에서 현대문물을 겪었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것을 목표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그래도 다행이었다.
나로서는 소통이 안 되는 괴인들보단 그래도 사람을 상대하는 게 더 쉽다. 정보를 얻기에도 편하고.
결정체 2개와 바닥에 있는 물품들을 다시 가방 안으로 넣었다.
지도와 날카로운 장검 하나만 빼놓고 전부.
난 칼을 손나연에게 건넸고,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칼도 쓸 줄 아세요?”
“아니.”
“그, 근데 왜.”
“네 거야.”
“……제거요? 전 칼 못쓰는데요?”
“하나 들고 있어. 없는 것보단 낫잖아. 혹시 모를 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아…… 알겠어요.”
손나연은 한번 사용해볼 생각인지 검을 빼 이리저리 휘둘렀다. 꽤 무거운 칼이었는지 낑낑거리면서…….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지도를 바닥에 깔았다.
사실상 놈들에게 얻은 수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지도였다. 이곳이 어떤 공간인지 빠르게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내 모습을 본 그녀가 휘두르던 걸 그만두고 내 옆에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어?”
난 지도 상단부를 보고 현대 옷을 봤을 때보다 더 놀랐다. 영어로 ‘435 area’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435구역……?”
“영어네요. 괴인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놈들의 지도가 아니라 놈들에게 당한 사람들의 지도겠지. 아무래도 그 사람들이 지구인인 것 같다.”
“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거기다가 이 구역의 지도를 만들 정도라면, 이곳에, 그것도 꽤나 오래 거주하고 있다는 거겠지.”
인도자는 이곳을 「아베르노」라고 했다.
분명히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세계라 했는데 지구인이 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망할 인도자 새끼. 하긴, 그도 정확히는 모른다고 했으니…….
지도는 총 6장이었다.
축적 1:500,000의 넓은 지역을 간략하게 나타내는 소축척지도. 난 그것들을 전부 바닥에 깔아, 순서대로 연결했다.
“빽빽하네요?”
“근데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다.”
지도가 나타내는 공간은 무척 넓었다.
아메리카 대륙 정도의 크기를 B4용지 6장에 꾸겨 넣은 느낌.
대축척 지도였으면 흐르는 강 모양을 이용해 독도법이라도 사용할 텐데 이 정도 축적으론 정확하게 우리의 위치를 판단할 수가 없다.
본인의 위치를 모른다면 지형도는 쓸모가 없어진다.
그저 대략적인 공간파악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혹시나 표시라도 남겨둔 게 있을까 싶어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다.
“신기한 건 바다가 없어.”
지도는 정사각형으로 잘려 있었고, 바다 없이 빽빽하게 육지로 가득 차 있었다.
강은 있는데 바다가 없다?
전부 완성된 지도가 아니거나, 아니면 진짜 이런 모습이던가. 둘 중 하나일 거다.
“정말 그러네요. 설마 이곳 전부가 열대우림은 아니겠죠?”
“그거야 모르지.”
“435구역은 무얼 뜻하는 걸까요?”
“겨우 이 지도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이제 이동할 준비 해.”
“넵!”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알아볼 건 다 알아봤고, 비서의 상태도 나름 호전되었으니 이제 출발해야지.
지구인이나 그들의 흔적을 더 찾아볼 생각이다. 손나연은 서둘러 칼을 챙겼고, 난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고작 10분 정도 걸었을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땀에 흠뻑 젖어 생쥐 꼴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업혀라.”
“……네?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잔말 말고 업혀. 시간 아깝다.”
“아니, 괜찮은데…….”
무슨 일인지 한사코 거절하는 그녀를 그냥 강제로 안아 들었다.
생각해 보니 등 뒤엔 가방을 메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앞쪽으로…….
“꺄악! 땀 냄새날 텐데…….”
그녀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것 때문에 거절했던 거였나?
확실히 과거 운동하고 난 후 느꼈던 쉰내가 느껴지긴 했다.
“지금 그게 문제냐?”
“그, 그래도.”
“그럼 놓고 갈까?”
“…….”
간단하게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고, 천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게 이동하면 그 압력만으로도 바람에 압사당할 수 있으니 조심스럽게. 그런데도 진행속도는 100배 이상 빨라졌다.
“꺄악. 너, 너무 빨라요.”
침엽수 꼭대기를 가르며 나아가는 게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무서웠는지 비서는 두 팔로 내 목을 꽉 붙들어 맸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이다. 선소연과는 다르게…….
“땀이나 식히고 있어라.“
“으아아아!“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찾은 것 같다.”
멀리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잡혔다.
난 신속하게 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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