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대위 귀환하다 074화
19. 함정(3)
단장실 안.
선소연을 보내고 난 후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2주간의 연습을 통해 어느 정도 불의 능력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상태.
그러나, 어렴풋이 느껴졌다. 지금 이 정도로는 절대 놈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총사령관은 영리한 자라 했다.
5군단장을 손쉽게 잡는 내 모습을 보고 총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충분히 상대할 자신감이 있다는 거겠지.
입안이 바짝바짝 타올랐다.
원래 궤도로 잘 달리던 열차가 레일을 이탈한 기분이었다.
인제야 KH가 자리 잡았고, 최상급 결정체를 더 모아 단원들을 늘릴 계획이었는데 총공격이라니…….
피곤해 보였던 선소연에겐 조급해하지 말라 했으나, 실상은 한시가 급했다.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봐야지.”
각오를 다지며 만지작거리던 목걸이에 기운을 집어넣었다. 사전학습 겸 먼저 테스트해볼 생각이었다.
[혼자 순례길에 들어갈 생각인가.]
어느새 등장한 크라켄이 물었다.
“다음 수련도 도중에 나올 수 있는 건 마찬가지겠지?”
[물론이다. 그대들이 수련하고 있을 때, 지구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좋아. 일단 소연이가 일어날 때까지만 해볼게.”
[좋은 생각이다. 이젠 휴식할 시간이 없다. 놈들이 오기 전까지 4차 탈피를 마무리해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
“보채지 마라. 최선을 다해볼 테니까.”
[알겠다. 그대에게 건투를…….]
크라켄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시야가 컴컴해졌다. 몸이 둥둥 떠 있는 듯한 몽롱한 느낌 또한 들었다. 과거엔 이 과정에서 항상 잠에 빠졌었다.
그런데 이젠 적응한 것일까. 아니면, 나름 3차 탈피에 성공하면서 정신력이 는 것 때문일까. 정신이 또렷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수마에 빠지진 않았다.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공간이 천천히 생성되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과 바다.
그리고 썰렁한 섬 한 개.
여느 때와 같은 순례길의 모습이었다.
[허가받은 자여. ‘종족의 순례길’에 입장한 것을 환영한다.]
“그놈의 멘트는 바뀌질 않네?”
[2주 만에 보는군.]
“그러게. 상황이 급하다 해서 말이야.”
[알고 있다. 나 역시 물의 종족. 누구보다 불의 종족의 패배를 기원하고 있지. 그대는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
[현재 상황은 최단시간 탈피코스 1단계 통과. 다음 단계를 이어 진행하겠는가?]
“그래.”
[좋다. 1단계와 달리 그대의 ‘기’와 ‘체’는 제한하지 않겠다. 또한, 크라켄의 요청을 받들어 하루 12시간 제한 설정은 제외하도록 하지.]
힘을 봉인하지 않겠다는 건, 1단계와 같이 무식하게 체력으로 버티는 시험은 아니란 거다. 고개를 끄덕이자 인도자의 음성이 이어 들렸다.
[2단계 테스트는 간단하지만 어렵다. 그대는 24시간 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된다.]
“그냥 앉아 있으라고?”
[그렇다. 다만 그대에게 온갖 강렬한 욕구들이 발생할 것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절대 견딜 수 없는……. 그대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티면 합격이다. 이는 정신력을 늘리는 데도 도움이 될뿐더러, 정신계 능력을 갖춘 총사령관을 상대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욕구라면 대충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식욕, 성욕, 수면욕 등등 거기에 광기 어린 살의까지 무작위로 느낄 것이다.]
욕구라길래 매슬로우나 엘더퍼 등의 심리학자들이 떠올랐으나, 그런 고차원적인 욕구가 아니었다.
그저 생리적 욕구였다. 아니, 살인 욕은 생리적 욕구가 아니지.
“만약 참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 순간 모든 것이 초기화되며, 타이머는 처음부터 다시 흘러간다.]
“그건 다행이군.”
적어도 시간 낭비할 일은 없었다.
모든 게 초기화된다면, 욕구를 참지 못한 채 그것에 빠져 허송세월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나저나 수면욕은 그렇다 쳐도 나머지 욕구들은 상대나 음식이 없는데 어찌 참으라는 걸까. 환상이라도 보이는 건가?
일단 진행해 보기로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일행이라 했으니.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자,
누군가가 내 앞에 소환됐다.
익숙한 얼굴에 비서 복을 입은 여자. 아침에 잠깐 봤던 손나연이 바닥에 엎어진 채로 자고 있었다.
갑자기?
너무 뜬금없었다.
하고 많은 인물 중 왜 하필 손나연일까.
그녀와 나의 접점은 단장실에 들락날락할 때 가볍게 인사한 거밖에 없는데. 아무리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해도 이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인도자. 대상이 저 사람이야?”
[이, 이게 무슨. 허가받지 않은 자가 어떻게 순례길에…….]
“그게 무슨 소리야. 저거 환상 아니…….”
콰르르-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공간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늘이 갈라지고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난 흔들리는 섬에 주저앉아 중심을 잡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안 된다! 이럴 순 없다! 아무리 정신계라 해도, 왕의 힘을 가지지 않는 이상 순례길에 간섭할 수는 없는 법인데…….]
인도자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봐!”
[불의 종족 총사령관. 그녀가 이 공간에 개입하고 있다. 당장 나가야! 크허억…….]
총사령관이라고?
놈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순례길에까지 개입할 수 있었단 말인가.
골머리가 아파졌다.
난 땅에 바짝 붙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갈라진 하늘이 점점 벌어지면서 공간이 깨져가고 있었고, 바다 또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 그로테스크한 현상을 지켜보며 일단 옆에 자고 있는 손나연을 챙겼다.
인도자의 반응을 보니 그녀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내 비서기도하고.
“제기랄, 인도자!”
허공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푸른 막이 그녀와 나를 감쌌다.
[크윽, 1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1분뿐이다.]
“그럼 어떡해야 하지? 일단 우릴 내보내 줘!”
[순례길이 닫혔다.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상태. 이젠 어쩔 방도가 없다.]
“…….”
그 말은 꼼짝없이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 공간이 부서지고 있으니까…….
“그럼 이 상태에서 그냥 죽어야 한단 거야?!”
[그건 아니다. 그녀가 순례길의 통로를 틀었어.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다면, 그녀는 그대를 「아베르노」로 보낼 것이다. 테르미노가 봉인되어 있는 그곳. 아아…… 물의 왕이시여. 그대가 틀렸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좀 설명해봐. 아베르노?”
[아직, 그 이야기를 해주기엔 그대의 정신력이 부족하다.]
또, 그놈의 정신력 타령이었다.
심해에서 크라켄이 말했던 것처럼 과거에 관련된 것일까.
[말해줄 수 있는 건, 그곳은 미지의 세계라는 거다. 나 역시 들은 적만 있을 뿐 가본 적 없는 곳. 또한, 그 누구도 나올 수 없는 곳. 안타깝지만 그대에게 희망은 없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버텨왔는데!”
[크으…… 미안하다. 난 여기까지인 것 같…….]
“제기랄!”
분이 터졌다.
지금껏 무엇을 위해 힘을 키워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아니다.
차라리 다행일 수도 있다.
이게 총사령관의 함정이라면, 더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나와 선소연 모두가 이곳에 갇히는 인류에게 희망조차 남지 않는 상황 말이다. 지금도 썩 좋게 흘러가고 있진 않지만.
곧이어, 인도자의 보호막이 풀렸고, 깨진 공간 사이로 거대한 통로가 보였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놈의 의도대로 따라줄 수밖에.
난 그곳을 향해 자발적으로 몸을 던졌다. 이 순간에도 자고 있는 어찌 보면 대단한 비서와 함께.
그리고 다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구로 복귀하겠다고. 절대 총사령관이 뜻하는 대로 되진 않을 거라고.
***
손나연은 짜릿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인지 단장님이 출근하셨고, 곧 있으면 점심시간인데도 나가시질 않는다.
‘드디어 단장님이 일하실 생각이 드신 건가?’
사실 그녀는 요즘 회의감에 빠졌다.
매일 아침 출근해서 청소나 하려고 대학교에 다닌 것도 아니고, 업무시간에 의자에 앉아 웹툰이나 보려고 4개국어까지 해가면서 스펙 쌓은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 한다며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랬다.
그런데 이제 단장님이 펜을 뽑으신 것 같으니 기분이 들뜬 것이다.
‘난 잘할 수 있어. 일단 단장님의 스타일을 알아내야 한다.’
비서라는 직업이 또 그렇다.
초기에 상사의 오른팔과 같은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점수를 가득 따낸다면, 그 상사가 은퇴할 때까지 일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손나연은 요즘 빠져 있는 웹툰 「이 비서가 왜 그럴까」를 떠올렸다.
보니까, 거의 비서가 주도적으로 회사 일까지 처리하던데. 거기에 달콤한 로맨스까지. 물론 영원히 그럴 일은 없다는 건 잘 안다.
상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
잘생긴 외모와 조각 같은 몸매.
결혼하고 싶은 남자 1위.
KH의 단장이니까.
그저, 누구나 꿈꾸는 그녀만의 판타지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몸이 쑤시네.’
허리를 곧게 펴고, 단정한 자세를 유지한 지 벌써 1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꺾어 단장실 내부를 들여다봤다.
그러자, 의자에 기대어 주무시는 단장님의 모습이 보인다.
‘헉, 주무시고 있는 거였어?’
손나연은 숨을 깊게 내쉬고 몸에 힘을 풀었다. 긴장했던 몸을 위해 스트레칭을 했다.
띠리리링-
순간, 수화기 음이 울렸다.
원래는 3번 기다렸다 받아야 하는 걸, 한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급하게 들었다. 혹시나 단장님이 잠에서 깰까 봐.
“네~ 감사합니다. 비서실 손나연 사원입니다.”
비서의 전화 예절은 중요하다.
단장을 대신해서 받는 것이 대부분이기에 더욱 친절하고 정확한 발음으로 해야 한다.
“나연아, 나 희주. 점심 먹으러 가자!”
“…….”
뚝-
손나연은 수화기를 곧바로 내려놓았다.
세상에. 휴대폰으로 하라니까 그걸 비서실 번호로 전화하다니.
단장님이나 팀장님들이 아신다면 경을 칠 일이다. 그녀는 급하게 고개를 꺾어 단장실 내부를 확인했다.
‘휴……. 아직 주무신다.’
손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희주는 그녀의 입사 동기로 홍보팀에서 일하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
평소 단장님이 출근 안 하신다는 말에, 장난삼아 전화한 것 같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든 채 메신저로 동기를 꾸짖다 문득, 생각했다.
‘단장님은 어쩌지?’
이제 곧 점심시간.
비서는 그녀 한 명.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가기에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혹여나 밥 먹는 도중에 찾으시면 낭패니까.
그러고 보니 웹툰에선 남주가 항상 비서랑 같이 밥 먹던데.
‘깨워야 하나? 아님, 희주한테 삼각김밥이라도 사오라 해야 하나…….’
그녀는 아직 사회초년생이고, 단장님의 스타일을 모른다.
잠에서 깨는 것에 불쾌함을 느끼실 수도 있고, 정말 천운이 따른다면 같이 밥 먹자고 할 수도 있다.
손나연은 짧은 고민 후,
단장실 문을 두들겼다.
그래 결정했으면 과감하게 하자.
“단장님. 비서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몇 번을 두들겨도 반응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의자에 고개를 젖히고 주무시는 단장님의 모습이 보인다.
‘깨우기 미안할 정도로 곤히 주무시네. 쩝, 그냥 희주한테 부탁해서 끼니나 때워야겠다.’
손나연은 조심스럽게 움직여 본인의 자리에서 자신의 담요를 들고 왔다.
‘덮어 드려야지’
입사 후 서로 인사밖에 하지 않은 단장님께 조금이나마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점수를 딸 생각이었을까 손나연은 그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고, 손이 그의 어깨에 맞닿았다.
“……어?”
순간, 그녀에게 엄청난 수면욕이 몰려왔다. 자동으로 눈이 감기고, 몸에 힘이 풀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리고, 그대로 그를 향해 넘어지며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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