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70화 (70/128)

육군 대위 귀환하다 070화

18. 황혼(3)

“아저씨. 일이 너무 커진 거 아니에요?”

홍이나가 옆에 붙어 까치발을 들고 속삭였다.

그녀는 아직 일반인.

각성자들이 대놓고 뿜어내는 기세에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아니. 기다린 거야.”

“누구를요. 성낙연을요?”

“그래.”

“여기서 싸우시려고요?”

그녀의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당연히 걱정은 안 하지만.”

“네 옷깃조차 못 건들게 할 테니까.”

홍이나를 천천히 등 뒤로 보낸 후 다가오는 성낙연을 바라봤다.

그의 뒤로는 약 100명 정도의 붉은 옷을 입은 헌터들이 따라오고 있었고, 나머지 400명 정도의 헌터들은 전체 경기장을 둥글게 아우르는 상부 난간으로 이동해 일렬로 정렬했다.

당연히 모든 ‘결투’는 중단됐고, 제5경기장에 있던 구경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오빠!”

옆에 있던 류세비가 신속하게 경기장을 벗어났다. 잡을 수 있었지만, 굳이 잡을 필요성을 못 느꼈다.

‘쯧, 그래. 그렇게 외치던 네 희망한테 한 번 가봐라. 어디 바뀌는 게 있나.’

류세비는 그대로 성낙연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나 그는 무언가 맘에 안 들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꺼져라. 이 쓸모없는 년.”

그러고는 그녀를 냉정하게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꺄악!”

그녀는 예상치도 못한 그의 반응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오빠?”

머리는 산발에다가, 눈물에 화장까지 지워진 류세비의 모습은 참 초라하다 못해 처량해 보였다.

“기껏 부탁해서 A급 헌터 하나 내줬더니만 저따위 꼴로 만들어? 저게 얼마짜린 줄 알아?”

성낙연이 땅에 박혀 있는 정민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그게.”

“니 애비가 지원해준 돈으로도 못 만드는 거야. 어떻게 보상할래?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아,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짜증 나니까 닥치고 있어라. 문경그룹이고 뭐고 박살 내버리기 전에.”

“끄읍-”

류세비가 겁먹은 얼굴로 입을 막았다. 난 두 남녀의 모습을 보며 하품을 쩍- 내뱉었다.

지겨웠다.

결국, 현동이는 오지 않는 건가?

실전 경험이나 시켜주고 싶었는데.

“하-”

성낙연이 경기장 위에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감히 내 앞에서 하품을 해?”

“너 앞에서 하품하면 안 된다는 룰도 있었나 보군. 그건 몰랐네.”

“크큭- 역시 재미있어. 태현그룹에서 돈 좀 써 쓸만한 헌터를 키워냈나 본데. 상황 파악 잘 해야 할 거야. 네가 아무리 대단한 헌터래봤자 여기 있는 인원들을 상대로…….”

“……보기보다 겁쟁인가 보군.”

난 의미 없이 떠드는 그의 말을 끊었다.

“뭐라? 겁쟁이?”

“겨우 나 하나를 상대하려고 이 많은 인원을 끌고 온 건가?”

“크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

“그럼?”

“내 특성상 각성 능력을 쓰는 순간 피아 구분이 안 되거든. 여기 있는 건물은 물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를 소멸시킬 텐데 함부로 사용할 수 없지.”

아, 에너지 빔을 말하는 건가.

파괴력은 상당하지만, 하루에 한 번 밖에 못 쓴다는 능력. 내 기준에선 쓸모없는 능력이다.

“그래서 본인은 빠져 있고 부하들을 내보내겠다?”

“크큭- 아니, 사실 난 네가 마음에 든다. 정민우면 그래도 황혼에서 나름 알아주는 인재인데 주먹 세 방에 보내버리다니.”

성낙연은 날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기분이 더러워져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제안 하나 해도 될까?”

“제안?”

“황혼으로 와라. 태현그룹에서 얼마를 받는진 모르겠지만, 황혼에서 그 이상을 약속하지. 보다시피 우리는 수많은 헌터를 보유한…….”

블라블라블라…….

성낙연은 갑자기 황혼의 위대함과 비전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냥 입에 바로 주먹을 틀어박아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찰나, 눈앞에 치지직- 하며 전파가 아른거렸다.

이건 또 뭐지?

[단장님. 4 팀원 한동엽입니다. 현재 옵저버를 통해 단장님의 상황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4팀이 도착했나 보다.

그나저나 옵저버?

아……! 잠깐 들은 적 있었다.

테스트 당시 만났던 한동엽의 각성 능력.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정보 능력을 다루고 있어 기억에 확실히 남았었다.

1. 의사전달능력.

본인의 의사를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다만, 받을 수는 없다.

2. 관찰능력.

반경 3㎞ 내 모든 지역을 그 자리에서 투명 옵저버를 보내 관찰할 수 있다. 옵저버는 모든 물질적인 벽들을 충격 없이 통과할 수 있다.

3. 영상송출능력.

옵저버의 관찰 내용을 팀원들에게 영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비록 전투능력은 아니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겨줬었다. 피터 잭슨도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며 극찬했던 능력. 그게 이런 식으로 활용될 줄이야.

[20분 전, 유현동 팀장을 비롯한 4팀 30명 전원은 단장님이 지정하셨던 장소에 도착했었습니다. 옵저버를 통해 건물 근처를 수색하는 찰나 또 하나의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고, 특이사항이 발견되어 선조치했습니다. 조치사항 보고드려도 되겠습니까?]

선조치 후보고.

팀장들에게 강조했던 사항이었다.

난 성낙연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사항에 대해서 전달하란 소리였다.

내 모습을 본 성낙연은 본인에게 끄덕이는 줄 알았는지 더욱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곳에선 온갖 추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민간인들을 강제로 납치해 구속하고 있었고, 결정체 실험, 강간, 살인 등 비상식적인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위급 상황이라 판단하여 곧바로 투입했고 현재 모든 피해자들을 구조 완료했으며, 가해자들은 유현동 팀장의 판단 하 전부 척살했습니다.]

황혼의 본거지가 이곳 말고도 또 있었나 보다. 그리고 예상대로 놈들의 뒷모습은 추악했다.

그나저나 아직 어린 유현동이 전부 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니, 생각보다 꿋꿋하게 잘 해주고 있었다.

또 아직 2주밖에 안 됐는데 나름 체계적으로 잘 처리하고 있는 4팀의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다.

[저희는 그럼 단장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성낙연이 대화를 멈추고 웃었다.

“하하하, 잘 생각했다. 그 웃음은 긍정의 의미로 생각해도 되겠지?”

“아니, 그냥 한심한 버러지들인 줄 알았는데 폐기처리도 못 할 쓰레기 집단이었군.”

“……?”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YEO뿐만 아니라, 너희 황혼 역시 이 자리에서 해체된다.”

“참…… 마음에 드는 놈인 줄 알았는데 역시 그냥 미친놈이었군.”

난 성낙연의 말을 무시하고 성대에 기운을 눌러 담았다.

참가자들, 그리고 황혼 멤버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지하 공간 전체를 울릴 수 있게 만드는 목소리로 대중들에게 읊조렸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그대들도 이 모임과 집단이 비도덕적으로 흘러간다는 걸 적게나마 인지하고 있을 터. 나와 함께 황혼과 싸울 자들은 어느 경기장이든 올라와라. 언제까지 황혼이 두렵단 이유로 남들의 피를 빨아가며 살 것인가.”

정적이 흘렀다.

500명의 헌터 앞에서 기죽지 않고 오히려 선전포고하는데, 이들도 생각이 있다면 무언가 이상하단 것을 감지했겠지. 단순한 미친놈이라 생각하는 자들도 많겠지만.

“4팀 영상 송출해.”

[명 받들겠습니다.]

제5경기장 상부에 커다란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황혼 멤버들이 송출됐다. 불과 20분 전 벌어졌던 행동들이었다.

노숙자들에게 강제로 결정체를 먹이는 모습.

납치한 여성 실종자들을 겁탈하는 모습.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고 잔인하게 살해하는 모습.

한동엽은 내 의도를 곧바로 이해했다.

헌터 집단의 탈을 쓴 범죄조직 황혼의 추악한 모습들을 이들에게 다시 한번 인식시켜준 것이다.

“으…… 윽. 저게 뭐야.”

“저게 뭐. 별것도 아니네.”

“인제 와서, 우리보고 어쩌라고.”

재벌가 자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자들도 있었고, 당연한 모습이라는 듯 팔짱 끼는 자들도 있었다.

“10초 주겠다. 경기장에 올라라. 알고 저질렀던, 모르고 저질렀던 본인들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후회를 하고 있다면 목숨 걸고 책임을 져라.”

내가 마지막으로 경고하자 성낙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생각보다 깜찍한 놈이었군. 이런 영상까지 구해올 줄이야.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혼자 황혼을 상대하기라도 하겠단 건가? 나 성낙연의 이름을 걸고 단언하지. 경기장으로 올라가는 놈들은 저 영상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지독하게 죽여주겠다.”

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다 쓸어버리고 싶었는데 혹시나 하고 기회를 준 것일 뿐. 그들이 올라가든 말든 상관없었다.

[단장님. 유현동 팀장이 다 쓸어 버리냐고 묻습니다.]

허공에 한동엽의 메시지가 작성됐다.

각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몇몇 인원이 올라와 있었다.

“나, 난 그냥 끌려왔었던 것뿐이야. 애초에 이런 곳인지도 몰랐다고.”

“어차피 ‘결투’하다가 뒈졌을 몸. 조금이라도 싸우다 죽겠다.”

“역겨운 부잣집 새끼들. 사람 목숨이 우습지?”

그중 대다수가 불공정 계약에 노예 취급당하던 헌터들이었다. 소수의 재벌가 자제들도 있긴 있었다.

이미 10초는 지나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황혼 멤버는 전부 죽여라. 나머지는 팔 하나씩 뽑되 반항하는 자는 죽여도 좋다. 경기장 위에 있는 인원들은 건들지 말고.”

[4팀. 명 받들겠습니다!]

한동엽의 메시지를 보고 명령을 내리자, 성낙연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좀 쓸모 있어 보여 기 좀 살려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까부네? 태현그룹이고 뭐고 다 지워버려야겠어.”

“쯧쯧- 뭔가 오해하고 있군.”

“오해?”

“홍이나와 나는 이 모임에 태현그룹을 대신하여 참석한 게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태현그룹이 아니라고?”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성낙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멍하게 앉아 있던 류세비도 날 올려다 봤다.

“그럼 어디서 왔는데.”

“KH.”

난 그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감히 KH 홍이나 팀장에게 장난질한 대가는 치러야지. 안 그래?”

“그, 그게 무슨?”

콰즈즈즉-

파지지직-

순간, 지하로 내려오는 1층 계단에서 순도 높은 푸른 전류가 튀겼다.

“끄아아악!”

“으아아아!”

상부 발코니에 있는 약 20명 정도의 헌터들이 뭔가 해볼 새도 없이 감전되어 죽어 나갔다.

4팀장 유현동의 등장이었다.

“형님! 저 왔습니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다 튀겨버려 주마!”

[제5경기장을 제외한 모든 경기장에 방어 능력을 가동했습니다. 척살 시작하겠습니다.]

한동엽의 메시지와 동시에 4팀을 상징하는 하얀 KH 유니폼을 입은 30명의 단원들이 등장했다.

성낙연이 다급하게 황혼 헌터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고, 밑에 있던 대기업 자제들은 벙찐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지, 진짜 KH라고?”

류세비의 넋 나간 목소리와 함께 축제가 시작되었다. 피의 축제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