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대위 귀환하다 069화
18. 황혼(2)
“흐아아압!”
정민우는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울림과 함께 기합을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와 동시에 각성 능력을 이용해 온몸을 강철화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그의 대시(Dash)에 걸려서 무사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떤 각성 능력을 갖춘 헌터든 그의 몸에 부딪히는 순간 반항하지도 못한 채 뼈가 박살 났었다.
정민우는 힘차게 내달리며 눈앞의 남자를 노려봤다. 놈만 처리하면 이 철없는 어린애들의 파티에서 해방이다.
‘응?’
순간, 남자의 입에 걸린 섬뜩한 미소. 무언가 불안함을 감지한 순간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런!’
몸의 중심을 잡고 놈의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제동을 걸으려 했다.
까앙-
청량하게 울리는 쇳소리.
그가 시야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다리를 차올린 것일까, 정강이에 저릿한 통증이 전해져 올라왔다.
우당탕탕-
빨랐다.
너무도 빨랐다.
어떻게 당한 것인지 보지도 못했다.
정민우는 자신이 꼴사나운 모습으로 자빠져 있는 것보다, 남자의 말도 안 되는 스피드가 더 신경 쓰였다.
“뭐야. 자신감 넘치더니만 굼벵이보다 느려 터졌네?”
등 뒤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위험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정민우는 신속하게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통증에 다리가 떨려왔다. 그에 비해 남자는 여유로워 보였다.
관중들의 환호 소리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뭐, 뭐야. 방금?”
“류, 류세비 헌터가 당한 거야?”
“말도 안 돼. 보이지도 않았어. 이러다 홍이나 측이 이기는 거 아냐?”
“그럴 리가. 그냥 단순히 발에 걸려 넘어진 걸 거야.”
구경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류세비의 눈 역시 동그래져 있었고, 홍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민우는 재빠르게 팔을 올려 가드를 만들고 앞에 있는 남자를 노려봤다.
“제법 한 수가 있는 놈이었군.”
“한 수는 개뿔. 그냥 옆으로 피해서 다리에 손만 가져다 댄 것뿐인데.”
“허세는…… 방금은 잠깐 방심했을 뿐이다.”
아무래도 저 남자의 능력은 주먹 강화와 스피드인 것 같았다. 그것도 최소 A급 이상.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절대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신체 강화 계라면 순수 기술 싸움이 돼버릴 수 있으니까.
“그래도 인정하지. 그대는…… 나와 싸울 자격이 있다.”
그의 말에 남자가 웃었다.
“자격은 개뿔. 이봐, 정민우라 했나?”
“그렇다.”
“원래는 내 목숨을 가져가려 한 대가로 그냥 죽이려 했는데, 딱 3대. 3대만 버티면 살려주마.”
“놈! 얕보지 마라!”
정민우는 남자의 도발에 스텝을 밟으며 천천히 전진했다. 아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일단 2대부터 시작하자.”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또 쉭-하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정민우의 눈이 커졌다.
상상을 초월한 속도였다.
이번엔 어디지?
황급히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왼쪽, 그리고 오른쪽 복부에서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까앙-까앙-
“커허어억!”
강철이 찌그러지듯 움푹 파여 들어간 복부.
그 내부에서 북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위력이었다.
“우웁.”
입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상복부의 늑골이 다 부서졌고 온몸에 끔찍한 고통과 진동이 흘렀다. 호흡조차 하기 힘들었다.
“오……. 대단한데? 아무리 살살 건드렸다지만, 그걸 버텨낼 줄은 몰랐네.”
정신이 없었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엄청난 고통에 눈물이 쏟아지고 있을 뿐.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저자는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류세비 망할 년이 도대체 누굴 건드린 거야.
“그럼 마지막이다. 이번엔 좀 아플 거야.”
곧이어 들려오는 지옥 같은 목소리.
머리가 띵했다.
여기서 더 하면 분명 죽음이다.
“자, 잠깐.”
정민우가 긴급하게 말했으나 남자는 아까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이어 느껴지는 섬뜩한 바람기.
제기랄.
눈을 질끈 감았다.
콰앙-
굉음이 울려 퍼졌다.
온몸이 터져나갈 듯한 고통과 함께 경기장 바닥에 처박혔다.
어느새 위로 튀어 올라 정수리에 주먹을 내리꽂은 것이다.
“크하학!”
온몸이 비틀렸다.
강철 능력? 이 남자 앞에서는 쓰잘대기 없었다. 보여야 상대라도 해보지, 뭘 해볼 수도 없었다.
‘이제 곧 죽겠구나…….’
사방으로 피어오르는 흙먼지들을 바라보며 정민우는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
“꺄아악!”
“어억.”
지하 내부를 울리는 폭발 소리에 구경꾼들 중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경기장은 주변은 이미 먼지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윽고, 뿌연 먼지가 걷혔다.
단, 일격이었다.
주먹 한 방에 정민우는 찌그러진 상태로 바닥에 틀어박혀 있었고, 바닥 주변은 커다란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자글자글하게 갈라져 있었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건물이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나름 힘주어 때렸는데 아직 죽지 않았다.
의식은 잃었으나 생명은 붙어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대단한 맷집이었다.
“…….”
숨 막힐듯한 정적.
주변을 둘러다 봤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감탄조차 나오지 않나 보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쩐다…….”
“……미친.”
“X발. 내 돈.”
누군가의 욕지거리가 조용하게 홀을 울렸다.
류세비는 석고상처럼 굳은 채 넋 나간 표정이었다.
[홍이나 승리]
[홍이나에게 보상금 10억을 제공합니다.]
[류세비는 빠른 시일 내에 10억을 갚아야 합니다.]
[배팅 결과 산정 중…….]
딜러는 전광판을 조정하랴 배팅액을 정리하랴 바빠 보였다. 그러나 난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경기장 밖으로 나가 류세비의 앞으로 걸어갔다.
“안녕, 애송이.”
가벼운 인사에 그녀가 흠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뭐…… 뭐야. 뭔데 당신.”
“우리 할 얘기가 아직 남아 있지 않나?”
“난 당신이랑 할 얘기 없어!”
“꼬맹이. 그건 네 판단이고.”
난 고개를 빠르게 숙여 그녀의 얇은 발목을 낚아챈 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꺄아아악!”
당연히 그녀의 몸은 물구나무서듯 뒤집혔고,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있던 터라 검은색 속옷까지 남들에게 다 공개되어 버렸다.
물론 그녀가 수치스럽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추악한 방법으로 계약도 없이 들어온 날 죽이려고 했고, 난 그 대가를 받을 생각이었다.
“뭐 하는 거야! 이거 안 놔? 헌터가 참가자를 건드는 건 규칙 위반이야!”
류세비는 두 손으로 흘러내리는 드레스를 끌어 올리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규칙?”
웃음이 나왔다.
다짜고짜 ‘결투’를 신청해 놓고선 규칙이라니. 난 서약이나 계약을 한 적도 없고, YEO가 설정해 놓은 유치한 규율에 따를 생각도 없었다.
“내가 황혼이 만든 규칙을 따라야 할 이유라도 있나?”
“꺄아악!”
“애초에 설명도 안 해주고 초대한 사람이 누구였지?”
그녀의 발목을 흔들며 경기장 위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류세비는 얼굴에 피가 쏠리는지 수치스러운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고, 주변 구경꾼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웅성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몰라. 원한 관계가 있나 봐.”
“이러면 곧 황혼 멤버들이 들이닥칠 텐데 두렵지도 않은 건가?”
“내 생각엔 아까부터 그냥 미친 거 같은데…….”
난 정민우가 박혀 있는 경기장 바닥에 류세비를 내동댕이쳤다.
“꺄아악! 아파. 흐흐흑.”
그녀는 바닥에 부딪힌 무릎을 부여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 해 놓고, 겨우 무릎 조금 까졌다고 우는 건가?”
“끄윽……. 너……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사람 잘못 건드렸어.”
“글쎄, 과연 누가 실수하는 걸까.”
“여기 다 모니터링되고 있거든? 좀 있다 오빠 오면 두고 봐. 가만 안 둘 거야.”
질질 짜면서도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그녀를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다 봤다.
우스웠다.
수군수군하면서도 직접 나서서 류세비를 구하려고 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평소 그녀가 이들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 잘 설명해 주는 상황이었다.
“너희들도 다 똑같다.”
구경꾼들에게 말했다.
“남들은 목숨 걸고 외계종족과 싸우고 있는데 본인 이득 챙기기에 급급하면서 한심한 유흥이나 즐기고 있다니, 사회 상류층이란 사람들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들이 벌이는 한심한 행각들은 인류에 도움 될 게 없었다. 단순한 ‘결투’라면 몰라도 이들은 승리를 위해 헌터의 죽음을 강요한다.
이는 한 명의 헌터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심각한 결정체 낭비다.
“저 새끼. 지금 우리한테 뭐라 하는 거야?”
“쉿, 조용해. 상대는 미친놈이야.”
“왜. 쫄 거 있냐? 류세비 헌터 하나 잡았다고 자신감 붙은 모양인데,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순 없을걸. 게다가 우리 뒤엔 황혼도 있다고.”
몇몇 구경꾼들이 선동하기 시작했다.
한숨이 나왔다.
그들은 본인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건지 자각이 전혀 없었다.
단순히 나랑 싸우면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각만 재고 있는 것이다.
헌터 부족으로 멸망 직전인 국가가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이 한심한 꼴을 보고도 지나칠 순 없지.
“더 이상 봐줄 수 없군. 오늘부로 YEO는 해체다.”
내 결정에 몇몇 구경꾼들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자세히 보면 헌터들은 가만히 있고, 재벌가 자제들만 흥분하고 있었다.
“니가 뭔데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냐!”
“나가 뒈져라!”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이들 모두 살인자 혹은 살인 방조자다.
불공정 계약으로 끌고 와 헌터들을 노예로 부리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자들.
마음 같아서는 다 쓸어버리고 싶은데, 혹시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결투를 즐기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사람도 있을 수 있을 테니.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주인이건 헌터건 관계없다. 내 생각에 동의하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나가라. 그렇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
내 말에 앉아 있던 류세비가 외쳤다.
“나가지 마! 나가는 순간 황혼에서 가만두지 않을…….”
짜악-
“꺄아악!”
어느새 올라와 있던 홍이나가 시끄러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언니. 이제 이빨 좀 그만 털어줄래?”
“너…… 너.”
“아까부터 황혼, 황혼. 뭐 본인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마냥 찌질하게. 쪽팔리지도 않아?”
홍이나의 일침에 류세비가 뺨을 부여잡고 분노의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짝짝짝-
1층 계단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 참 강단 있는 친구일세. 감히 황혼의 본거지에서 깽판을 치는 헌터가 있을 줄이야.”
“오빠!”
류세비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반갑게 소리쳤다.
그곳에는 편안한 복장을 한 한 명의 남자가 서 있었고, 뒤따라오는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사내들이 끝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황혼의 정예 헌터들인 것 같았다.
“화, 황혼이다!”
“성낙연이다!”
“쟤낸 이제 끝났다.”
“아무리 홍이나라 해도 황혼 앞에선 별수 없지.”
언제 나오나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다 늦게 등장하는군.
난 천천히 다가오는 성낙연을 보며 씨익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