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68화 (68/128)

육군 대위 귀환하다 068화

18. 황혼(1)

“으아아…….”

“제기랄. 류세비다. 일단 피신해.”

“쉿! 조용히 해. 들으면 어쩌려고!”

류세비가 A급 헌터와 함께 등장한 5번째 경기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그녀에게 배팅은 해야겠는데, 희생양으로 선택되기는 싫은 딜레마.

일단 다른 경기장에 가 있다가, 결투하려는 징조가 보이면 다시 모여들려는 것이다.

“흥……. 어차피 결투할 사람은 정해져 있는데, 설레발들은.”

류세비가 코웃음을 쳤다.

곧 있을 홍이나와의 ‘결투’가 기대되는지 서글서글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의 치욕을 떠올렸다.

홍이나는 원래 그런 성격인 걸 알았으니 그렇다 쳐도 그녀 옆에 있었던 정체 모를 남자.

‘뭐? 부모 잘 만나서 철떡 서니 없게 컸다고? 웃기는 소리. 나만큼 세상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과거엔 돈으로 세계를 움켜쥘 수 있었다면, 지금은 헌터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어. 언제까지 내 앞에서 허리 꼿꼿이 세우고 있을지 한 번 두고 보자고.’

류세비는 재벌 집안 딸로서 평생 모자란 것 없이 지냈지만, 한가지 흠이 있었다.

바로 홍이나의 존재.

부모님이 어렸을 적부터 항상 비교했던 아이. 그동안 그녀에게 외모, 학벌에 밀리면서, 남모르게 자격지심을 쌓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성낙연이 그룹의 문을 두들겼다. 강현이 등장하기 이전 대한민국 랭킹 1위의 존재.

성낙연은 초창기 시절 문경그룹에 초기 자금을 원했고, 그의 가능성을 크게 본 문경그룹 회장, 즉 류세비의 아버지는 그를 믿고 큰 금액을 지원해 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인연이 닿았고.

연애까지 하는 사이가 됐다.

남 부러울 것 없었다.

뒤바뀐 세상에서 학벌이나 돈보다 더 확실한 것은 바로 힘(power).

성낙연만 곁에 있다면 적어도 국내 재계 내에선 그 누구도 그녀를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사귄 지 2개월이 됐을까.

덩어리를 불린 그는 황혼이란 단체를 만들며 그녀에게 본인의 사업을 공개했다.

처음엔 좀 충격이었다.

황혼의 목표는 한국을 필두로 세계를 지배하는 것.

그 방법 또한 잔인했다.

먼저 노숙자나, 고아들을 데려와 얻은 결정체들을 먹인다. 그다음 쓸모있는 능력이 나오면 황혼 소속으로 들이고 공포를 이용하여 통제한다.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잔인하게 죽인다.

쓰잘머리 없는 능력이나, 전투 감각이 없는 놈들은 D급 이하 결정체 수급 노예로 이용한다.

그렇게 헌터의 수를 점차 불려 나가는 것이다.

류세비의 고민은 짧았다.

‘도덕적인 게 밥 먹여 줘? 어차피 헌터가 나오기 이전부터 세상은 요지경이었어. 힘 있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게 당연한 거지.’

그녀는 그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마음에 들어 했다. 황혼에게서 가능성을 봤고, 성공한다면 엄청난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으니.

류세비는 한술 더 떠 기존 사교모임을 각색해 YEO를 만들어냈다.

곧바로 ‘결투’ 제도를 도입하고, B급 결정체를 상금까지 내걸며 사교계 아이들이 헌터에 혈안이 되도록 만들었다.

결정체 수급 노예 헌터들을 멍청한 자제들에게 비싼 값에 팔고, 더 좋은 능력의 헌터를 양성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녀의 의도는 적중했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관심을 가졌고, 그들은 황혼이 더 커질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줬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10승 이상 챙긴 검증된 C급 헌터들을 B급 결정체 하나에 구할 수도 있었으니 일거양득의 효과였다.

어정쩡한 B급보단 확실한 C급이 낫다는 게 성낙연의 지론이었으니까.

그렇게 YEO도 덩치를 키워가려는 찰나, 애송이 티를 벗지 못한 홍이나에게 연락이 왔었던 것이다.

처음엔 가벼운 장난이었다.

만약 그녀가 남들처럼 설설 기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웃으며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처럼 도도하면서 싸가지도 없었다.

데려온 남자는 그녀보다 더했다.

감히 황혼 보고 버러지라니.

‘겁도 없는 연놈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류세비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느새 시끄러웠던 제5경기장은 텅텅 비었고, 딜러 한 명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뒤에 있는 헌터에게 말했다.

성낙연이 선물로 잠깐 내어준 황혼 소속 A급 헌터였다. 그것도 확실히 검증된 엘리트 중 엘리트.

“야.”

“네, 아가씨.”

“아까 그년 기억하지. 태현그룹 홍이나.”

“그렇습니다.”

“찾아와.”

류세비는 A급 헌터고 뭐고 없이 그를 수족으로 부렸다.

황혼의 안주인이 본인이고, 뒤에 성낙연이 있는데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저기 오고 있습니다만.”

A급 헌터는 손가락으로 4경기장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홍이나와 그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응……? 뭐야. 저것들은.”

류세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본인을 피해 도망가야 할 연놈들이 당당하게 앞으로 찾아오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언니, 혼자 여기서 뭐 해?”

홍이나가 그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류세비는 어이없다는 듯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금 니 발로 내 앞에 온 거니?”

“그러면 안 돼? 언니 혼자 찌질하게 궁상떨고 있는 모습이 우스워서 구경차 왔지. 무슨 왕따도 아니고…….”

“뭐, 뭐라고?”

“어머, 못 들었어? 벌써 귀도 안 좋은 거야?”

“참나, 너 되게 겁 없다?”

류세비가 허리에 손을 짚고 혀를 차자, 홍이나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도대체 내가 왜 겁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네.”

“…….”

“이상하게 겁이 하나도 안 나. 왜 그럴까? 신기하네……. 언니가 좀 알려줘 봐.”

류세비가 이를 갈았다.

홍이나가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한번 경고하는 것뿐이었다.

“분명히 말했어. 너 때문에 저 남자 죽는다고.”

“응? 언니 옛날부터 무식한 건 알았지만 아직도 돌대가리인가 보구나?”

“뭐?”

“만약 죽는다 해도 언니가 죽이는 거지.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이익!”

홍이나가 웃음기 있는 얼굴로 대꾸했고, 그 모습을 본 류세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곧이어 참을 수 없단 표정으로 딜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봐, 딜러. 결투 신청 넣어줘!”

“알겠습니다. 류세비 아가씨. 그럼 상대는…….”

“보고도 몰라? 홍이나 저년으로 걸어!”

“아,. 알겠습니다.”

그녀의 결투 신청이 있고 난 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전광판에 글자가 떠올랐다.

띠링-

[류세비 vs 홍이나]

[9승0패 vs 0승0패]

[보상금은 기본 10억으로 책정됩니다.]

[배팅을 시작합니다.]

“와아아아!”

순간 멀리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주변 경기장에 있던 구경꾼들은 류세비가 결투를 걸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류세비가 ‘결투’를 걸었다!”

“가자. 베팅해야 해. 난 오늘 여기다 전 재산 건다. 말리지 마라.”

“아무도 안 말려. 돈 놓고 돈 먹기인데 누가 말리냐?”

“근데 상대가 홍이나라고? 태현그룹 딸 아냐?”

“소문 들었어. 모임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래.”

“흐음……. 그래도 태현그룹인데 실력 좋은 헌터 구해 온 거 아니야?”

“그래 봐야 류세비 못 이겨.”

어느새 5경기장에는 구경꾼으로 가득 찼다.

대박의 주역 류세비의 헌터와 사교계에 첫발을 들인 홍이나의 헌터. 그들의 호기심은 증폭했다.

딜러는 자제들이 던지는 칩들을 정신없이 끌어모아 계산하고 있었다. 홍이나도 대여한 검은 칩 5개를 본인에게 올인했다.

“도대체 언제 시작하는 거야?”

“나 흥분돼.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돈이 끝없이 모이고 있는지 전광판은 계속 멈춰 있었고,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정말 괜찮으세요?”

“뭐가.”

“이런 광대놀음에 참여하는 거요.”

“걱정하지 마라. 다 생각이 있으니.”

“……알겠어요.”

약 5분 정도가 흘렀을까,

띠링-하며 전광판이 바뀌었다.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배율 1.72 : 102.01]

당연히도 류세비에게 돈이 압도적으로 많이 몰렸다. 역배를 노리는 인원들도 있었는지 홍이나에게 거는 인원들도 소수나마 있었지만.

홍이나는 전광판을 보고 감탄했다.

“와-102배면 얼마야. 50억의 102배니까……. 히엑, 5,100억?”

“푼돈이네.”

“에이, 그래도 기분은 좋잖아요.”

홍이나의 웃음과 함께 다시 한번 전광판이 바뀌었다.

[결투 진행을 위해 양 헌터들은 경기장 안으로 입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류세비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홍이나의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아니야. 황혼의 엘리트 헌터가 질 거라곤 생각할 수 없어.’

무려 A급 헌터다.

그것도 상성 없다는 강철 능력.

능력을 쓰는 순간 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진다. 웬만한 공격은 다 무시하고 들이박으면 게임 끝.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또 다른 A급 헌터나 S급 헌터 이상.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 KH 말고 S급 헌터를 가진 단체는 황혼뿐이다.

저 남자가 KH의 단원일 확률?

거의 없다.

만들어진 지 2주밖에 안 된 KH에서 단원들을 자유롭게 풀어둘 리 없으니까. 저 홍이나가 KH와 연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자신 있지?”

“물론입니다.”

A급 헌터는 짧게 대답한 후,

당당한 몸짓으로 경기장 안으로 진입했다.

순간, 사람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겨라! 너만 믿는다!”

“류세비! 류세비!”

“72%의 배당이 너한테 달렸다!”

홍이나가 데려온 남자 역시 경기장 안으로 진입했다.

마침내 두 헌터가 가지런히 마주 섰다.

기선제압을 할 생각이었을까, 류세비의 헌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정민우.”

“뭐?”

“내 이름이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는데.”

강현이 손을 털며 대꾸했다.

관중들 역시 ‘오 기 싸움인가?’ 하고 둘의 대화에 관심을 가졌다.

“9명.”

정민우가 표정을 사납게 했다.

“뭐?”

“내 주먹 앞에 죽어간 사람의 수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 이만큼 살인했으니까 죽여줍쇼 외치는 소린가?”

“아니. 이제 곧 너로 10명을 채우겠단 소리다.”

정민우는 말하면서도 이상했다.

여태껏 자신 앞에서 이토록 여유 부리는 자는 성낙연 말곤 없었으니까. 뭔가 불안했다. 이럴 땐 심호흡을 하는 게 최고다.

“후-”

깊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자,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황혼 소속이지?”

“…….”

정민우가 눈을 번쩍 떴다.

류세비밖에 모르는 정보를 저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동요하는 거 보니 맞나 보군. 주적은 다른 곳에 있는데 한심한 짓거리나 하는 집단.”

“웃기는군. 그러는 넌 뭐라도 되나?”

“그건 알 필요 없고……. 여태껏 남을 죽여왔고, 앞으로도 죽일 생각이면 너 역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각오는 서 있겠지?”

“너 따위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군. 네 각성 능력이 뭔진 모르겠지만 너무 자만하지…….”

“주먹.”

강현이 그의 말을 끊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정민우는 ‘저게 갑자기 뭐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지켜보던 관중들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이 주먹 하나로 상대해 주지. 애송이.”

“……정신 나갔군.”

그의 말에 정민우가 코웃음 쳤다.

류세비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간 걱정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저 남자는 그냥 미친놈이었던 거다.

성낙연 조차 저 A급 헌터를 상대로 각성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오만한 말은 꺼낼 수 없다.

특히, 강철 능력을 주먹으로만 상대한다는 건 달걀로 바위를 깨겠다는 소리다.

관중들 역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류세비에게 돈을 걸었단 사실에 안도했다.

류세비의 경기를 자주 지켜봤던 그들은 그녀의 헌터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알고 있는 탓이었다.

[자, 그럼 5초 후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5, 4, 3, 2, 1…….]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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