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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위, 귀환하다-62화 (62/128)

육군 대위 귀환하다 062화

16. 종족의 순례길(2)

모든 것이 고요한 시커먼 공간이었다.

시야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몽롱한 느낌만 일었다. 뱃속의 태아의 기분이 이럴까, 마치 우주에 둥둥 떠 있기라도 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까닭 모를 안정감은 있었다.

가슴이 포근해지는 따듯한 느낌이었다.

익숙하고도 향기로운 살 내음.

턱에 느껴지는 머리칼의 보드라운 감촉.

그래. 누군가를 꼭 껴안고 있었다.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소연아?”

“으음…… 오빠?”

“너구나.”

그녀도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꿈틀거렸다.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것 같았다.

“……네. 잠깐 잠에 빠진 것 같았는데…… 여기가 그 수련공간인가요? 아무것도 안 보여서 답답해요.”

오감이 멀쩡한데, 시야만 보이지 않는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선소연이 만들었던 4차 테스트 공간도 그랬었으니까.

“우선 불을 밝혀보자.”

여느 때처럼 오른손에다 불의 기운을 흘려보내려 했다. 그러나 기운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전혀 미동조차 없었다. 집중하고 집중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왜요?”

“각성능력이 안 움직여.”

“……그래요? 잠시만요.”

그녀도 시도해보려는 듯 조그마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진짜네요? 아무래도 이 공간은…… 응?”

선소연이 말하고 있을 즈음,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시야가 천천히 밝아지면서 공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이 만들어지고, 널따란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덩그러니 남은 작은 섬 하나.

정신 차리고 보니 그 위에 서 있었다.

풀떼기 하나 없는 땅에 사방은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으로 둘려져 있었다.

여기서 뭘 하라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였다.

[허가받은 자들이여. ‘종족의 순례길’에 입장한 것을 환영한다. 누군가가 찾아오는 건 실로 오랜만이군.]

허공을 울리는 울림이 귀를 때렸다.

크라켄과는 다른 종류의 목소리였다.

[음…… 그대들은 물의 종족이 아니구나.]

나와 선소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은 바다, 하늘, 섬 딱 3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공간이다.

심지어 바람도 불지 않았고, 파도도 치지 않는다.

목소리는 들려오는 데 어디서 누가 말하는 건지를 모르겠다. 난 작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넌 누구지?”

“이게 어디서 들리는 걸까요?”

우리의 질문에 정체 모를 음성이 곧바로 응답했다.

[이 공간이 나이며, 내가 곧 이 공간. 난 ‘종족의 순례길’ 그 자체이자, 영혼의 성장을 도와주는 존재다. 그냥 ‘인도자’라 부르면 된다.]

“인도자라…….”

그럴듯한 이름이었다.

크라켄의 말에 따르면 물의 종족은 불의 종족과 달리 이곳에서 수천 년간 수양하며 탈피한다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을 도와왔던 자라면 인도자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지.

[어디 보자…… 12시간 제한에, 최단시간 탈피 코스. 그리고 심기체(心氣體) 중 심. 흠, 그래…… 크라켄이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보냈는지 알 것 같군. 좋아. 이 정도면 됐고. 그럼 시작하기에 앞서…….]

“잠깐만!”

그의 말을 잠깐 끊었다.

“최단시간 탈피 코스? 심기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는가?”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강한 기운. 그리고 그것을 받쳐주는 육체와 정신력이 필요하다. 즉, 심기체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대들은 그것이 과하게 비틀어져 있다. 인지하고 있지 않은가. ‘기’와 ‘체’는 완벽하나, ’심’. 즉, 정신력이 그에 한참 못 미친다는 걸. 하여, 그대들은 정신력을 키울 수 있는 수련이 필요하다.]

크라켄도 5군단장도 말했었다.

수억 년 묵은 왕의 기운을 한낱 인간이 다룰 수 있겠냐고.

역시 그는 ‘인도자’답게 우리의 딜레마를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 이 수련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성장할 수 있는 거지?”

[한계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대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르겠지. 다만, 이 공간에서 탈피하는 것과 놈들을 죽여서 탈피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효과를 보여줄 것이다.]

원래 군단장 세 마리를 더 죽여서 완전히 탈피하려 했다.

그러나 인도자의 말에 따르면, 수양을 통한 탈피가 더 효과적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군단장이 출현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다.

잘만 한다면 이곳에서 5단계 탈피를 완전히 이끌어내 왕의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당부하자면, 최단시간 탈피코스는 그대들에게 끝없는 고통과 심리적 압박을 가해 강제로 성장을 요구하는 기법이다. 효과는 좋으나 잘못하면 정신이 붕괴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방법이지.]

크라켄에게 충분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심해에서도, 조금 전에도 계속 경고했었으니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차피 우리가 성장하지 못하면 위험한 건 매한가지.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

“후우, 정신 차리자.”

내가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자 선소연이 옆에서 손을 꼬옥 잡았다.

“오빠. 그때 기억하죠?”

“언제?”

“우리 푸른 새 발톱으로 자해했을 때요.”

당연히 기억한다.

그때 느꼈던 끔찍한 고통.

그걸 어떻게 있겠는가.

정말 죽다 살아났는데.

“아무리 심해도 그때만큼 하겠어요?”

“그치. 좋은 자세야.”

대견하게도, 그녀 역시 각오가 되어 있었다.

파르르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은 두려움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긴장감이리라.

그동안 우리가 했던 경험들 역시 보통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주를 뛰어넘었다.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다짐을 끝내자 인도자가 물었다.

[이제 준비됐는가.]

“그렇다.”

“후, 준비됐어요.”

함께 고개를 끄덕이자 인도자가 전반적인 설정 사항을 읊었다.

[현재 이 공간에서 그대들의 ‘기’와 ‘체’는 완벽하게 제한된다. 또한, 그대들의 정신력은 아직 인간 수준. 크라켄의 보호 요청을 받들어 하루 12시간의 제한, 그리고 ‘포기’를 선언하면 곧바로 복귀할 수 있는 설정을 추가하겠다.]

아마 당분간 수련은 계속 진행해야 할 것 같았다. 하루 12시간이면 밤에 수련하고 낮엔 업무를 보거나 휴식하면 되니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이었다.

볼을 꼬집어 봤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느껴진다.

육체 또한 다시 일반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도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럼…… 시작하지.]

***

“언니, 오랜만이야.”

“홍이나. 니가 어쩐 일이니? 먼저 연락도 다 하고.”

카페에서 다리를 꼬고 차분하게 말하는 여자를 바라봤다. 세련된 미모에 딱 봐도 귀티나 보이는 여자. 문경그룹 장녀 류세비였다.

문경그룹은 태현그룹과 함께 국내 선두를 다투는 기업이다.

요즘 결정체 사업 건으로 떠오르면서 세간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데, 그 사업의 핵심 인물이 류세비란다.

그녀는 나보다 세 살 위로, 어렸을 적부터 언니, 언니 부르며 따르던 기억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연락한 거였다.

이번에 KH에 입단했다는 소식도 알릴 겸.

“무슨…… 언니도 알잖아. 나 유학 갔다 오느라 한국에 없었던 거.”

“하아-그래서?”

“응?”

“쯧.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나 바쁘거든?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줄래?”

까칠했다.

언니의 말투가 적응되지 않았다.

순둥순둥했던 말투가 아닌 뭔가 톡 쏘는 느낌. 오랜만에 본 언니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눈을 쳐다봤다.

무언가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살짝 피비린내도 느껴졌다. 왜지? 당황스러움에 하려던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으음…… 그게…….”

“너 아직도 그러고 다니니?”

“무슨?”

잠깐 생각해 봤다.

그러고 다니냐니. 무슨 말이지?

류세비가 한심하다는 듯 날 쓸어보며 다시 물었다.

“아직도 니 오빠들 질투하면서 할아버지 조르고 다니냐고.”

“…….”

류세비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녀도 분명 알 거다.

우리 집안이 얼마나 여자를 무시해왔는지, 그리고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도.

굳이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일부러 내 속을 긁겠다는 거다.

난 심호흡을 했다.

침착해야 한다.

아직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했으니.

“후우, 그런 적 없어. 이젠 사업 물려받을 생각도 없고, 그냥 내 삶을 살 거야.”

“그래. 잘 생각했다. 괜히 유학이다 뭐다 골 아픈 짓 하지 말고 상황에 맞게 살아야지.”

순간, 내가 쟤한테 밉보일 게 뭐 있을까 생각해 봤다. ‘유학’이란 단어를 꺼내는 거 보니 쓸데없는 열등감일까? 언니는 생긴 대로 빡통머리라 공부를 잘 못했었으니까.

심호흡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자 류세비가 물었다.

“골프는 배워 뒀어?”

“아니. 별 취미 없어서.”

“배워 둬. 그거 시집가면 유용하게 써먹는다? 내가 머리 올려줄까?”

“생각 없어.”

“하긴…… 남자도 없는 애가 무슨. 아, 혹시 생겼니?”

“아니.”

“그럴 줄 알았다. 야. 그래도 남자 잘 만나면 엄청 편해. 사실 내가 요즘 사람 하나를 만나는데 무려 S급 헌터야. 한국 랭킹 1위였었던 성낙연이라고 알지? 그 오빠랑 저번에 같이 골프 치러 갔는데 싱글 정도는 해줘야 주변 사람들이…….”

블라블라…….

류세비는 내가 별다른 말대꾸를 하지 않자 별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들을 신나게 떠들어 댔다.

은근슬쩍 S급 헌터와 사귄다는 걸 자랑하면서 압박을 가했다. 옛날 같았으면 솔직히 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근데 지금은 나도 KH 소속 신규 사업팀장에, 곧 있으면 S급 헌터 거든. 전혀 타격이 없었다.

어쨌든 바쁘다면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저 모습이 참 재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제 그만 끊어야겠다.

“말 도중에 미안한데 언니.”

“응?”

“혹시, 그 언니가 가던 모임 있잖아.”

“모임? 아…… YEO 말하는 거야? 내참-무슨 소리 하는 거니? 내가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운영하는 건데.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지. 쯧.”

그녀는 별 시답잖은 거로 트집을 잡았다.

YEO (Young -Entrepreneurs Organization).

재벌 자녀들의 모임이다. 말로만 들었었는데 그게 류세비가 운영하는 거였다니.

난 눈 딱 감고 관심 있는 척을 했다.

“와-진짜? 거기에 누구누구와?”

“유명한 헌터들이나 경영수업 같이 받는 애들. 왜. 저번에 오라고 꼬실 땐 들은 체도 안 하더니. 마음 바뀌었어?”

“사실 이제 곧 있으면 나도 성인이잖아. 괜히 참여 안 했다가 왕따라도 당하면 어쩔까 걱정도 되고…….”

거짓말이다.

단지, 현재 결정체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조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참여할 수 있는 모임 중 가장 정보를 얻기 쉬운 곳이니까.

“음…… 2주 후에 있는데…….”

“언니. 나도 초대장 좀 주면 안 될까? 부탁할게.”

내가 저자세로 부탁하자 그녀는 빨대를 돌리며 고민하는 척했다.

사실 류세비는 항상 내가 오는 걸 바랬다.

YEO 주요 행사 중 하나가 서로의 배우자를 구하는 자리이기도 하니까.

태현그룹 장녀인 나는 모임의 수준을 올릴 수 있는 좋은 미끼였다.

류세비의 꼴 보기 싫은 모습을 웃으며 계속 바라보고 있자 마침내 그녀가 말했다.

“단, 조건이 있어.”

“뭔데?”

“이번엔 좀 큰 축제라. 반드시 파트너 한 명 데려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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