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55화 (55/128)

15. 홍이나(1)

“후우…… 얘기가 길어도 괜찮죠?”

“뭐, 힘들지 않다면? 어차피 가면서 할 말도 없고.”

내 답변에 홍이나는 속도를 줄이며 호흡을 골랐다.

“먼저 저한텐 오빠가 둘 있어요.”

“2남 1녀야?”

“네. 제가 막내예요.”

“이쁨 많이 받았겠네.”

“그렇죠. 근데 그게 문제였어요. 저희 집안이 좀 남자 위주로 돌아가거든요. 오빠들은 결정체 사업이다, 후계자 수업이다 하면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전 여자애라고 오냐오냐 예뻐만 해주는 거. 어떤 느낌인지 짐작 가죠?”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혈통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잔존하고 있다.

그러니까 경영권을 세습 가능한 재산권으로 잘못 인식하고 ‘재벌’이라는 말이 나온 거겠지.

어쨌든 난 그녀의 말에 동조해 줬다.

“대충은? 여자라고 무시하는 거 아냐?”

“정확해요. 가족끼리 잘 대화하다가도 사업 얘기 나오면 은근슬쩍 저를 빼두고 말해요. 제가 껴들어도 허허 웃으면서 피하기 바쁘구요. 심지어 오빠들이 먹은 최상급 결정체만 각 2개씩이에요. 전 하나도 못 먹었는데. 엄마한테 토로해봐도 맨날 쇼핑에만 관심 있지 별 신경도 안 쓰고요.”

그녀가 말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냥 갑자기 제 인생은 딱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든 거죠.”

“어떻게?”

“그냥 온실 속 화초처럼 살다가 급 낮은 계열사 몇 개 받은 담에 할아버지가 정해준 남자랑 결혼하는 삶?”

“좋네.”

“남들은 배부른 소리 한다고 욕할지도 모르죠. 근데 전 그런 게 싫었어요. 나름 오빠들보다 머리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조선 시대도 아니고 21세기에 말이죠.”

그녀의 목소리에는 울분이 가득했다.

하긴, 남들이 부러워한다고 본인이 삶이 행복한 건 아니니까.

홍이나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최근에 할아버지가 결정체 사업에 관심 있는 걸 알아낸 거예요. 최강수라고 아시죠? 연합회장하고 있는.”

“그럼, 알지.”

아저씨에 대해서는 그녀보다 훨씬 잘 알 거다.

“할아버지가, 거의 한 달째 최강수한테만 목매고 있더라고요. 번번이 실패하면서도요. 아무리 재계에서 알아주는 할아버지라 해도 헌터 연합엔 한 수 접어줘야 하거든요.”

그렇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연합은 초인들의 모임. 암살도, 협박도 안 먹히는 헌터들을 상대로 큰소리를 낼 순 없었을 거다.

게다가 나 때문이지만, 한국 헌터 연합의 결정체 보급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태현그룹뿐만 아니라, 전 세계 거부들이 컨택을 보낼 텐데 당연히 힘이 부족했겠지.

“전 이해가 안 갔어요. 왜 할아버지는 최강수한테만 목을 맬까. 단신으로 쿠바 지역을 쓸어버렸다는 세계 최강의 헌터인 강 현도 있는데.”

아무렴. 맞는 말이지.

하지만 잘못 짚었다.

난 결정체 보급에 관심이 없으니까.

“근데 그 자존심 높은 할아버지가 누가 그를 포섭하겠냐면서 시도조차 안 하더라고요. 그래서 조사해봤죠. 깜짝 놀랐어요. 기사들 보니까 미국 대통령도 한 수 접고 들어가던데요? 그래도 무슨 방안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다 딱! KH에서 낸 공고를 본 거죠. 그래서 결심한 거예요.”

“뭘”

“KH에 입단하자. 그래서 그분이랑 일단 친분을 쌓아보자. 그러다 사귀게 되면 더 좋구요. 솔직히 저 정도 외모면 어디 가서 밀리는 건 아니잖아요?”

“…….”

얘 봐라? 당돌한 꿈을 가지고 있네.

얼굴은 예쁘장하다지만 우선 나이가 너무 어리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겐 누구보다 아름다운 선소연이 있다. 즉, 현실이 될 수 없는 꿈이란 얘기다.

“잉……? 아저씨 표정이 왜 그래요. 걍 농담한 건데…….”

“강 현이 어떻게 생긴 줄은 알고?”

“사진들 구해서 대충 봤죠. 딱 제 스타일이던데요? 그러고 보니 아저씨랑도 묘하게 닮았네요. 머리 스타일은 다르지만.”

“큼큼, 뭐 그래서…… 단지 기업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KH를 이용하겠다?”

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최강수가 허위 사진까지 유포해가며 내 얼굴을 숨기려 노력했지만, 대기업 수준에서 조사했을 때 내 사진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공항에서 누군가는 나와 선소연의 모습을 찍었을 테니까. 새삼 설아 표 메이크업의 위대함을 느꼈다.

“아니요. 전 경영권에 관심 없어요. 단지 집안의 힘 없이 제힘으로도 우뚝 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할아버지도 오빠들도 제가 KH 단원이란 걸 알게 되면 절대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난 KH를 이용해 뭘 하든, 재벌이든, 거지든 상관없다. 능력이 되고, 불의 종족이 나타났을 때 함께 싸워주기만 한다면.

난 홍이나와 이야기하는 게 즐거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녀는 첫인상과 다르게 유쾌했다. 또 말을 재밌게 잘했다.

홍이나의 과거 시절은 화려했다.

그중 하나가 오빠들과 달리 중학교부터 미국 명문 사립인 세인트폴에서 유학 시절을 보낸 것.

그녀는 그곳이 철저한 성적제에, 절대 기부금을 받지 않는 곳이라는 걸 강조했다.

19세의 나이에 고교 올 스트레이트 A와 SAT 만점으로 하버드 조기입학까지 따놨었는데, 균열 사건이 터진 이후 급히 한국으로 복귀했다고 한다. 그 후엔 쭉 집안에서 지냈고.

KH 단원으로서는 어떨까?

솔직히 말하면 마음에 들었다.

판단력도 좋고 어린 나이에 비해 배움도 짧지 않으며, 직감도 있다.

물론 앞으로 테스트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모르고, 더 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아직까진 괜찮았다.

[남은 시간 16 : 55 : 13]

대화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대략 2시간이 흘렀음에도 덕분에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도 발바닥에 이는 고통에 적응한 건지, 참고 있는 건지 당차게 걸음을 지속했다.

공기의 농도와 주변 정경의 높이가 고지를 얼마 남기지 않았음을 알려줬다.

스르륵- 스르륵-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들려 왔고, 앞장서던 그녀가 멈추었다.

“다 왔나 봐요. 일단 숨어요.”

그녀가 내 팔목을 잡고 9부 능선으로 내려가 몸을 숙였다. 힘들 텐데도 실로 기민한 몸놀림이었다.

“좋은 자세야.”

“별말씀을요.”

앞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안전을 기하는 건 당연하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녀는 뛰는 호흡을 가라앉히고 숨을 죽이려 노력했다.

난 고개를 살짝 들어 확인했다.

남자 다섯과 여성 한 명.

놀랍게도 1차 테스트에 봤던 김훈영과 정지은도 있었다. 그들은 하필 딱, 우리가 숨은 쪽 능선 위에 자리를 잡고 멈췄다.

홍이나도 그를 확인했는지 몸이 굳었다.

나야 상관없다지만, 그녀는 김훈영과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상태. 그가 팀을 선점했다면 힘들어지는 건 그녀다.

위에 있는 정지은이 김훈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갑자기 따로 보자고 한 거예요? 오빠?”

“지은아, 위에 인원이 벌써 30명이 넘었어.”

“그래서요?”

김훈영과 네 명의 남자가 그녀를 천천히 둘러쌌다. 그 분위기와 행동에 불순한 기류가 흘렀다.

정지은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요 갑자기 무섭게.”

“너도 알다시피 저 위 고지는 우리가 먹었어. 근데 솔직히 넌 전투능력도 없는데 친분 때문에 팀에 들어온 거잖아. 우리가 지켜주는 것도 있고.”

“하,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저 올라갈래요. 비켜주세요.”

정지은이 불안함을 감지하고 벗어나려 하자 남자들이 움직이며 길목을 틀어막았다.

그와 함께 터져 나오는 비열한 웃음소리들. 그들의 더러운 의도가 뻔히 보였다.

“왜들 이래요.”

“너도 우릴 위해 무언가 해줘야지 공평한 거 아니겠어? 우리는 그냥 의사를 묻는 거야. 어때. 너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 우린 목숨 걸고 널 지켜준다. 대신 넌 육체적으로 봉사를 한다. 깔끔한 거래야. 맞지?”

김훈영의 설득에 그녀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흐…… 흐흑…….”

“솔직히 말해봐. 너도 알면서 가만히 따라왔던 거잖아?”

그가 정지은에게 다가가 옷깃을 부여잡고 쫘악- 찢었다. 동시에 드러나는 브래지어와 속살.

“꺄악!”

“말해보라니까? 넌 그럼 아무것도 없이 그냥 보호만 받으려 그랬어? 정말로?”

김훈영이 그녀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정지은이 숨겨뒀던 단검을 휘둘렀다.

“저리 가! 이 나쁜 새끼들아!”

“으악!”

뺨에 그어진 상처와 볼에 흐르는 피.

김훈영의 눈에 분노가 가득 담겼다.

“이 X발년이. 봐주니까.”

“꺄아악!”

그가 배를 걷어찼고, 그녀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무기를 휘두르며 버텨봤지만, 성인 다섯 명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할 말이 없었다.

결국, 홍이나의 직감이 맞았다.

저런 놈들은 테스트를 받을 자격조차 없었다. 내가 일어서자, 홍이나가 급히 손목을 잡으며 속삭였다.

“아저씨! 안 돼요.”

“왜?”

“저들은 다섯이에요. 아무리 아저씨라 해도…….”

“1차 테스트에서 내 뒤에 숨었던 것 치고는 갑자기 너무 현실적인데?”

“그땐…… 한 명이었잖아요. 어쨌든 지금은 위험하니까 좀 숙여요!”

불과 2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부스럭거리며 떠드는데, 그들 귀에 우리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남자 한 명이 우릴 발견했다.

“거기 누구냐!”

그들은 정지은을 상대하는 것을 멈췄고 나도 능선 위로 다시 올랐다.

나와 홍이나를 보고 놀라는 김훈영의 모습.

“어어- 잘 만났다. 너 그때 그 쌍년이구나.”

“변태 새끼. 결국 일 저질렀네.”

홍이나는 체념한 듯 바로 비속어를 날렸다.

“크큭, 말하는 본새하고는…… 남자 뒤에 숨기나 하던 년이. 난 저런 년들이 제일 싫다니까. 실력도 없으면서 반반한 얼굴만 믿고 남자 뒤에 기생충처럼 들러붙어 있는 년들.”

김훈영이 찡긋거렸다.

난 주변을 둘러봤다.

정지은은 찢어진 옷깃을 부여잡은 채 울고 있었고, 남자들은 무기를 든 채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창 든 놈 넷에, 검과 방패 든 놈 하나.

“너는.”

“아, 형씨. 오랜만이오. 우리 같은 지원자끼리 각 세우지 말고 조용히 지나가는 게 어떻수?”

“……처음 모습이랑은 사뭇 다르군. 그땐 분명 겁쟁이의 눈이었는데.”

내 도발에 김훈영이 씩 웃었다.

그 모습이 한껏 여유로웠다.

“내 말투가 좀 건방져졌나? 이해하시오. 우린 다섯인데 그쪽은 혼자잖어. 그냥 보내주는 것도 고맙게 생각하쇼. 아, 저 건방진 년은 놓고 가시고.”

“…….”

그의 이죽거림을 무시하고 홍이나를 쳐다봤다. 잠깐 얽히는 시선.

“아, 아저씨.”

“왜.”

“그냥 가세요. 결국 제가 초래한 일이니까 제가 해결할게요.”

“어떻게?”

“그건, 비밀이니까 얼른 산 밑으로 내려가세요.”

그녀의 말을 들은 김훈영이 완전 안심을 했는지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홍이나의 약한 모습에 자신감을 찾은 것이다.

“크크크, 무슨 싸구려 청춘 로맨스 드라마라도 찍는 거냐? 아, 생각이 바뀌었다. 굳이 증인을 남길 필요가 없지. 어이, 그쪽. 저 싸가지 없는 년 겁탈해봐. 우리랑 같이 공범이 되거나, 아니면 뒤지시거나. 어떡할래?”

그의 말을 들은 홍이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도 더 이상 이런 저질스러운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다.

저놈들은 이미 테스트 관리자로서 불합격이다.

동시에, 내가 비각성자라 했어도 이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맞았을 거다.

“쯧- 너흰 안 되겠다.”

“허어, 꿀을 마다하고 결국 벌주를 마시겠다?”

앞으로 나서자 그들도 무기를 들어 올렸다.

미숙한 파지법에 허술한 자세.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늘 좀 맞자.”

“푸흡- 니가 뭐 하정우라도 되냐?”

남자들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저런 놈들이 KH에 지원한다는 것 자체가 수치다.

난 감정이 시키는 대로 그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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