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54화 (54/128)

14. Pick me up(4)

“맞죠. 맞죠?”

“…….”

소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심호흡을 했다. 정체가 밝혀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제대로 허당이었다.

나는 자신이 맞았음을 빨리 확인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해해주면 나야 고마우니까.

“경호원이라…… 그렇다고 해두지.”

“여윽시! 내 직감은 정확하다니까.”

소녀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난 건틀릿을 문지르며 슬슬 떠날 준비를 했다.

유현동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이 숲에 ‘혼자’ 떨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마지막에 날 껴안는 바람에 변수가 생겼다. 남들은 혼자 생존하고 있을 텐데, 우리만 같이 있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

“그럼, 무운을 빌게.”

작별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기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어 팔목을 잡는다.

“어디로 가시려구요?”

“네가 안 보이는 곳으로.”

난 그녀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숲속에 혼자 남는 게 무서운 걸까, 잠깐 접촉한 그녀의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김훈영을 상대할 때 터프한 모습을 보여줬다 해도, 그녀 역시 어린 여자애일 뿐이었다.

“왜요? 제가 뭐 실수라도 했나요?”

“아니.”

“그럼 뭣 때문에…….”

“……버그니까. 우리 둘 다 결국은 테스트받는 입장이야. 남들과 공정한 입장에서 시작해야지.”

그녀가 무엇을 보고 헌터라는 위험한 직업을 선택했는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KH는 아무에게나 결정체를 퍼주는 자선사업 단체가 아니니까.

내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그녀가 힘차게 소리쳤다.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봤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날 무엇으로 설득하려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소녀가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아저씨, 이 공간이 얼마나 넓을지 상상이 가요? 약 2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떨어졌는데 우리 주변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이 넓은 공간에서 지도나 나침반도 없이 30명이 모이는 일이에요. 버그든 뭐든 우리가 같이 있다는 건 엄청난 베네핏이라구요. 그리고 아무리 아저씨가 경호원이라 하더라도 일반인이잖아요. 이 공간에 어떤 괴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 명보다는 두 명이 안전하지 않겠어요?”

“흐음…….”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내가 테스트받는 입장이었다면 분명 그녀의 말대로 했을 테니까.

내가 그녀에게 주장했던 건 관리자로서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난 시험 참여자의 입장이다.

형평성과 당위성.

두 가지 중 무얼 선택해야 할까.

내가 고민하자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

“하나 더 말해줄까요?”

“뭐.”

“아저씨는 무조건 합격할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말했잖아요. 저 직감 좋다고. 어렸을 적부터 그랬어요. 눈만 보면 그 사람이 저한테 이득이 될지 해가 될지 곧장 알아챘죠. 아저씨를 보는 순간 딱 느껴졌어요. 이 사람은 합격이다. 또 알아두면 엄청나게 도움이 될 사람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한 능력이다.

그녀의 직감이 정확하긴 했다.

총 지원자 중 나보다 합격에 가까운 사람은 없을 거니까.

아니, 그뿐이랴. 말 한마디면 그녀를 바로 합격시킬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다.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사실상 난 예전부터 직감이란 걸 중요시했다. 작전 중에도 보통 훈련이나, 대비보다는 직감이 통할 때가 많거든. 물론 그렇다고 그게 그녀와 함께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그건 너 입장일 뿐, 내가 짐짝을 데리고 다녀야 할 이유는 없지.”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와 함께할 이유를 어떻게든 쥐어 짜내려 하는 것 같았다.

잠깐의 침묵 후,

그녀가 날 다시 올려다봤다.

“후우, 좋아요. 아저씨 경호원이랬죠?”

“그랬었지.”

“그럼 제가 아저씨를 고용할게요.”

“고용?”

“네. 절 경호해주세요. 대가는 충분히 지불할 수 있어요. 아저씨도 합격이 목표라면 손해 보는 건 아닐 거예요. 제 직감은 진짜 믿을만하거든요.”

고용이라…….

쓴웃음이 나왔다.

미국 대통령도 쓰지 못하는 SS급 헌터를 고용하겠다니.

“내 몸값이 얼만 줄 알고?”

“걱정 마세요. 저 돈 많아요!”

소녀가 당차게 외쳤다.

그래도 패기는 마음에 들었다.

“흐음…… 좋아.”

돈을 떠나서 일단, 그녀를 따라다니며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 직감으로 어디까지 헤쳐나갈 수 있을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결국 이 공간에 떨어진 게 고의도 아니고, 그녀는 지금 상황에서 도출할 수 있는 최상의 제안을 하는 것일 뿐이니.

“함께하지. 단, 내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널 돕는 일은 없을 거야. 함께한다는 게 테스트 합격을 돕는다는 게 아님을 알아둬라.”

“전 같이 있는 거. 그거면 충분해요.”

소녀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거다.

“전 홍이나라고 해요. 잘해봐요. 아저씨.”

“그러지.”

난 그녀의 손바닥에 건틀릿을 내밀었다.

***

그녀의 말대로,

이 숲의 크기는 차원을 달리했다.

내 발달된 청각에 걸리는 사람의 수가 백여 명 언저리밖에 안 된다는 건, 그만큼 큰 공간이라는 거다.

지원자의 수준을 고려했는지 주변에 괴물은 느껴지지 않았고, 각종 산짐승들만 풀어 놓은 것 같았다.

홍이나는 단검을 부여잡고 고지를 향해 무작정 걷기만 했다.

가끔 주변에서 인기척이 들릴 때도 있었으나 철저히 무시하고 올라가는 데만 집중했다.

빠르게 올라가야 한다는 듯 급해 보였다. 나 역시 제3자의 입장에서 그녀를 따라 여유롭게 올라갔다.

“헉…… 헉…….”

끝이 없는 오르막길에 홍이나의 숨이 거칠어졌다.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고 다리도 후들거리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이 발을 내디뎠다.

[남은 시간 18 : 50 : 48]

벌써 출발한 지 5시간이나 흘렀다.

지금껏 만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시험을 주관한 팀장들의 생각이 뭘까 고민하며 묵묵히 올라가는 순간, 전방에서 수십 명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청각을 집중하지 않은 것을 고려했을 때 3㎞ 정도 밖이었다.

떠드는 소리를 들어보니, 이미 고지를 선점한 팀인 것 같았다.

그 말인즉슨, 앞으로 고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 속도로 이동하면 약 2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아저씨…… 더 이상 못 걷겠어요. 좀만 쉬다 가요.”

홍이나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오솔길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신체 각성을 하지 못한 몸.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걸 알지 못한다.

그녀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양말을 벗어냈다.

발바닥은 쭈글쭈글해져 있었고, 열이 가득 찼는지 벌게져 있었다.

“흐으아…… 발에 물집 다 잡혔어.”

“양말은 햇볕에 말리고, 열을 식혀. 지금 그 상태로 올라가면 더 심각해질 거다.”

“으으…… 고마워요. 근데, 아저씨는…… 헐……?”

그녀가 날 바라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세상에, 어떻게 땀을 한 방울도 안 흘리세요?”

“누구 덕분에 천천히 올라가서 말이지. 그냥 산책하는 기분이다.”

“아무리…… 그래도. 다섯 시간 산행인데…….”

홍이나가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리고 손으로 마사지를 하며 말을 이었다.

산행이 힘들었는지 표정이 울적해 보였다.

“어쨌든 미안해요. 제가 느려서 괜히 휴식도 없이 올라가다가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그래도 걱정 마세요. 제 직감이 곧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거든요. 제가 책임지고 아저씨는 꼭 합격시킬 거예요.”

누가 누굴 합격시킨다는 건지.

그나저나 그녀는 신기하게도 곧 고지에 도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곳에 사람이 모이고 있다는 것도.

그것도 그냥 직감일까?

보통 산 가운데 떨어지면, 밑으로 내려가는 게 정상이다. 체력적으로 덜 힘들 테고, 그곳에 사람도 더 많이 모일 거니까.

근데 그녀는 왜 산 위를 고집하는 걸까?

난 휴식하는 김에 물어봤다.

“산 위로 올라가는 것도 그냥 직감이야?”

“아, 그건 아니에요.”

“그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밑으로 내려갈 테니까요.”

“그럼 우리도 내려갔어야 하는 거 아닌가? 팀을 결성할 확률이 높아지잖아.”

그녀는 오른발 마사지가 끝났는지 왼쪽 발바닥을 오른 허벅지에 올리며 내 말에 반박했다.

“그건 그렇지만, 그만큼 경쟁도 심해지겠죠.”

“경쟁이 심해진다?”

“네. 제 생각엔 아저씨도 저도, 그리고 여기 도전한 사람들 전부 다 또라이들이에요. 헌터가 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간절한 또라이들이요.”

“또라이라…….”

“그만큼 간절하다면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타인의 목숨도 쉽게 생각할 가능성이 있죠. 아까 김훈영 봐요. 지 말에 대답 안 한다고 창 들고 위협했잖아요. 아, 걘 또라이가 아니라 변태지.”

“그래서, 밑으로 내려가면 위험한 사람들이 더 많으니 위로 올라가는 거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제한을 24시간이나 줬다는 건, 팀원 30명을 보충한다고 끝나는 테스트가 아니란 거예요. 진짜 테스트는 30명을 끝까지 유지하는 거겠죠. 아마 1시간쯤 남겼을 때 분명 경쟁자들을 제거하려는 팀들이 생길 거예요.”

“사람을 죽여서?”

“네. 30명 중 한 명만 죽여도 그 팀은 전원 탈락이니까요.”

“위에 30명 이상이 모일 거라는 확신은 어디서 나오는 건데?”

“확신은 없어요. 그래도 23,000명 정도가 모인 공간인데, 그중 설마 30명이 안 모일까요? 만약 안 모였다 해도 주변 지형을 파악한 후에 사람이 많을 것 같은 지점으로 빨리 내려가면 돼요. 올라가는 것보다는 내려가는 게 훨씬 빠르니까.”

“결국, 직감이라는 말이네?”

난 그녀를 도발했다.

내가 그녀라도 산꼭대기로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명확한 이유를 듣고 싶었다. 과연 직감으로만 선택한 건지 아니면 나름대로 짱구를 굴린 건지. 내 나름대로의 테스트다.

그녀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설명을 시작했다.

“후우…… 보세요. 지금 우리가 오르는 봉우리가 이곳 시야에서 봤을 때 가장 높은 고지잖아요? 왜 다른 곳 냅두고 가장 높은 고지로 오르겠어요.”

“왤까?”

홍이나는 바닥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마치 선생님이라도 된 듯 가르치는 말투를 사용했다.

작은 손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내 질문에 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건 이곳이 알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에요. 앞으로 어떤 미션이 떨어질지도 모르고, 어떤 위험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밑으로 내려가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죠. 먼저 지형부터 파악하고 움직여도 늦지 않아요.”

“그렇지.”

난 이 공간에 괴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녀는 모른다. 모든 작전의 기본은 지형지물 파악이라는 것에는 나도 동의했다.

“또, 아래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해도, 그들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 넓은 공간에서 사람이 많다고 한 곳에 모두 모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에 비해 산꼭대기는 유일하게 한 개의 포인트가 될 수 있는 스팟이죠.”

맞는 말이다.

만약 나에게 각성능력이 없었다면, 그녀의 판단대로 아래로 내려가기보다는 고지로 올랐을 거다.

선소연과 균열에서 생존했던 것처럼. 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녀의 생각을 듣는 게 재미있었다.

“대신 산꼭대기로 오를수록 식수나 식량을 구하기엔 더 어려워지겠지.”

“맞아요. 근데 이 테스트가 생존이라 하지만, 제 생각엔 그 먹고 자는 생존이 아니에요. 24시간 굶는다고 사람 안 죽잖아요. 중요한 건 빠르게 팀을 만들어 유지하는 거죠.”

정답이었다.

생각보다 영리했다.

어린 여자애라 배고프고 아픈 것에 민감할 줄 알았는데 제법이네. 자기 생각도 조리 있게 말할 줄도 알고.

말을 마친 그녀는 마사지가 끝났는지 일어선 뒤, 젖은 양말을 어깨에 걸치고 맨발로 신발을 신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30명이 차기 전에 빨리 고지에 올라가야 해요. 그래야 갈등 없이 팀에 소속될 가능성이 커지죠. 바로 출발할까요?”

겨우 5분은 쉬었을까, 그녀가 꿋꿋하게 일어섰다.

안쓰러울 정도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힘겹게 지탱하면서.

“발 괜찮겠어?”

“따갑긴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참을 수 있어요.”

“씩씩하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그녀와 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체력이 대단했다.

아무런 각성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도 물 한 방울 없이 5시간 동안 등반을 한 후 겨우 5분 휴식이라니. 꽤 꾸준히 운동한듯싶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말문을 텄다.

“너는 왜 헌터가 되고 싶은 거냐.”

“으음…… 질문이 잘못됐어요.”

“……응?”

“전 헌터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헌터가 되고 싶은 게 아닌데도 굳이 테스트에 참여해서 이 고생을 한다?

“그럼?”

“KH의 단원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곳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누구를?”

“강 현 님이요.”

나를?

순간 멈칫했다.

난 그녀를 알지도 못하는데,

겨우 날 만나려고 목숨까지 건다?

이유가 궁금했다.

“강 현은 왜?”

“흐음…… 이건 말하기 좀 그렇긴 한데…… 아저씨니까 말씀드릴게요.”

홍이나는 곧장 헉헉 대면서도 말은 잘했다.

“사실 태현그룹 홍영준 회장님이 우리 할아버지예요.”

“…….”

태현그룹.

국내 재계 순위 1위, 자동차, 전자산업을 필두로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의 대표기업집단이다.

KOSPI의 주축을 담당하는 기업으로 시가 총액 합계만 국가 예산을 훌쩍 넘는다고 들었다.

홍영준 회장은 대한민국 보유자산 순위 3위로 국내 재계를 휘어잡고 있는 재벌계의 진골 중의 진골이다. 물론 1, 2위는 나와 선소연이지만.

“그래서 돈이 많다고 자신했던 거로군.”

“네, 맞아요. 근데 별로 안 놀라시네요?”

“그냥. 요즘 들어 놀랄 일이 많아서.”

“흠흠- 아저씨. 운 좋은 줄 아세요. 제 경호원으로 들어오는 거 엄청 빡세거든요. 보수도 세고요.”

그녀가 헐떡거리면서도 장난식으로 말했다.

“그래서, 네가 재벌 3세인 거랑 강현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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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홍이나 -->

육군 대위 귀환하다 05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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