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53화 (53/128)

Pick me up. (3) - 무료 끝.

[ 대기인원 : 8/100 ]

[ 도전인원 : 0 ]

호기롭게 붉은색 균열로 뛰어 들어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공간엔 나 포함 8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색이 색이니만큼, 위화감이 들었으니까.

"후우..."

김훈영이 긴장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섯 가지 무기 중 창을 뽑은듯했다. 시퍼런 날을 뽐내는 창을 벽에 세운 그가 남은 인원들을 천천히 돌아다봤다.

"쭉정이들 다 빠지고 남을 사람만 남은 것 같은데 이제 다들 어쩌실 거요?"

"......"

난 벽에 기댄 채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확인했다. 어차피 내가 진짜 테스트 보는 것도 아니고, 여유롭게 구경한 후에 마지막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신기했다.

모두들 떨고 있는 건 분명한데,

도망은 치지 않았다.

목숨을 걸어도 좋을 만큼 헌터가 간절하다는 건가? 또 놀랍게도, 두 명의 여성 또한 아직 나가지 않고 있었다.

5초 정도 흘렀을까, 서로 눈치를 보던 20대 초반의 남성 2명이 앞으로 나섰다. 김훈영과 마찬가지로 긴 창을 들고 있었다.

"난, 어차피 잃을 것도 없어서요. 들어가겠습니다."

"저도 이하 동문입니다. 먼저 들어갈게요."

둘은 천천히 붉은색 균열을 향해 걸었고,

김훈영은 '어... 어?'하면서 물러섰다.

그들이 스르륵, 소리와 함께 사라지자-

"그래! 인생 한 번이지 뭐 있냐. 으아아!"

"씨발. 나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두 남자도 자극을 받았는지 힘차게 뛰어들었다.

삐빅-

그와 동시에 눈앞에 이미지가 변경되었다.

[ 대기인원 : 4/100 ]

[ 도전인원 : 4 ]

[ 제한 시간이 활성화됩니다 ]

[ 남은 시간 00 : 09 : 59 ]

다른 공간에도 머뭇거리는 사람이 많았는지, 10분의 시간제한이 생겼다. 하루 종일 이곳에서 고민하게 내버려 둘 순 없는 노릇이니까.

"씨... 씨벌. 거 보통들 아니구먼. 지은아 넌 어쩔 거냐."

"저도 포기하기 싫어요. 먼저 들어가는 게 무서워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 그럼 넌 같이 가고, 그쪽 말 없는 두 분은 어떡할 거요?"

"......"

그가 나와 소녀에게 물어왔다.

그녀는 대답 없이 붉은색 균열을 쳐다보고 있었고, 난 웃으며 먼저 가시라고 대답해줬다. 이 소녀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고 들어갈 거거든. 아까부터 자꾸 날 힐긋거리기도 했고.

내 대답을 들은 김훈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꼬맹이는?"

"......"

남자의 질문에도 소녀는 목석처럼 묵묵부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훈영의 이마에 힘줄이 쏟았다. 그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앉아있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참나, 사람이 말을 걸었으면 대답을 하는 게 기본 예의 아니겠니? 꼬맹아. 오빠가 충고 하나만 할까?"

"꺼져. 씨발."

처음으로 열린 소녀의 입에서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비속어가 흘러나왔다. 김훈영도 놀란듯했지만 나도 놀랐다. 저 남자가 뭐 잘못한 것도 딱히 없을 텐데, 다짜고짜 꺼지라니?

"뭐... 뭐라고? 내가 방금 잘못 들었나?"

"꺼지라고."

'하아, 참' 하며 한탄을 내뱉은 김훈영이 그대로 소녀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마주했다.

"와 나- 이런 당돌한 계집애는 또 살면서 처음 보네?"

"......"

"다시 한번 말해봐. 뭐라고 했냐?"

"그만 귀찮게 하고 꺼.지.라.고."

소녀는 김훈영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확한 발음으로 내뱉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벌떡 일어나 벽에 세워둔 창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녀의 눈매가 가일층 매서워졌다.

"크큭, 이년 눈빛 봐라? 너 사람 잘못 건든 거야."

"......"

"너 비밀 서약서 서명했지? 여기서 누구 하나 뒤져도 아무도 몰라. 자, 다시 한번 물어볼게. 뭐라고 했니?"

"역시 쓰레기 새끼 맞네. 욕 한번 했다고 사람 죽이려 들고."

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더니... 신속하게 내 뒤로 숨었다. 응? 갑자기 뭐지?

김훈영도 잠깐 당황한 듯 눈을 껌뻑이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뭐야. 형씨랑 아는 사이였어?"

"......"

난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좀 비켜주소. 저 꼬맹이랑 볼일이 있거든."

확실히 소녀가 먼저 잘못했다.

그러나 그 이유로 소녀를 죽이려 하는 것 또한 과하다. 물론, 그게 진짜 죽이려고 하는 건지 겁만 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딱히 막고 있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 비켜주려 했다. 그러자 소녀가 내 옷깃을 꽈악 붙잡더니 소리쳤다.

"아저씨! 막아주세요!"

"... 내가?"

"네. 보상은 충분히 해드릴게요."

"......"

할 말이 없었다.

뭔가 대비책을 가지고 저지른 줄 알았더니, 겨우 선택한다는 게 내 뒤로 숨는 거라니.

김훈영도 내 앞에서 거리를 두고 다가오지는 않았다. 난 차분히 그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그것은 분명 겁먹은 자의 눈빛이었다. 연약해 보이는 소녀에게는 한없이 강하나, 내 앞에서는 이유 없이 겁먹고 있는 모습.

그러나 난 말없이 그녀의 손을 떨쳐내고 옆으로 비켜섰다. 난 이곳에 사람을 뽑으러 온 거지 갈등에 휘말리러 온 것은 아니니까.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한 해결은 본인이 해야지.

"크크... 좋은 판단이구만. 형씨."

"아... 아저씨!"

나를 원망스레 쳐다본 소녀는 별 수 없다는 듯 벨트에서 대검을 뽑아 들었다. 김훈영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겨우 그걸로 막아 보시겠다고?"

"쓰레기 새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여기 들어올 때부터 나랑 저 언니 몸만 계속 훑고 있었잖아. 이 뱀같이 음흉한 새끼야."

"하- 내 31년 인생에 이런 황당한 꼴은 첨 당해보네.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난 황당했다.

지금 테스트 보러 와서 웬 감정싸움이란 말인가. 그들의 한심한 대치 상황을 쳐다보던 중 기계음이 울렸다.

[ 1분 남았습니다. 시간 내 들어오지 않으시면 자동으로 탈락됩니다 ]

[ 남은 시간 00 : 00 : 59 ]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대치 상황을 보던 정지은이 다가와 김훈영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이제 가야 할 것 같아요. 더 늦으면 안돼요."

김훈영이 소녀와 정지은 그리고 나를 번갈아 보면서 고민하다 말했다.

"씨... 발. 너 꼬맹이. 나중에 만나면 가만 안 둔다."

"그러시든지. 변태 새끼."

그는 모욕감에 몸을 부르르 떨며 정지은과 함께 균열 속으로 들어갔다.

"......"

공간엔 둘만 남았고 서로 눈이 마주쳤다.

[ 남은 시간 00 : 00 : 24 ]

남은 시간은 약 20초가량.

그녀는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날 계속 쳐다만 보고 있었다. 뭐, 어쩌라는 건데.

"아저씨."

"... 왜."

"안 들어가실 거예요?"

"일단은. 그러는 넌?"

"김훈영인가 하는 새끼가 무섭게 벼르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가요."

"......"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남자의 성질을 건든단 말인가. 어떤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강설아랑 비슷한 성격이란 거.

어쨌든 소녀가 들어가든 말든 내 알바는 아니었다. 난 슬슬 준비했다. 잘못하다간 균열 밖으로 쫓겨나게 생겼으니.

[ 남은 시간 00 : 00 : 02 ]

여전히 미동인 소녀를 내버려 두고 붉은색 균열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뒤에서 그녀가 달려와 내 등을 꽉 껴안았다.

[ 남은 시간 00 : 00 : 00 ]

[ 1차 테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

[ 총 합격자 : 23,842 명 ]

[ 2차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

***

번쩍-

공간이 이지러지더니 익숙한 숲이 등장했다. 과거 선소연과 불시착했던 그 균열과 동일한 생김새였다. 주변을 둘러다 보니 내 등을 꽉 껴안고 있는 그 소녀밖에 없었다.

난 한숨을 쉬었다.

안 들어 올 것처럼 하더니 분명 내가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애였다.

"이제. 그만 떨어지지?"

"아앗- 죄송해요. 아저씨!"

그녀가 급히 떨어졌고, 내가 뭐라 물으려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자자, 지원자분들! 모두 숲에 안전하게 도착하셨나요? 저는 앞으로 있을 2차 테스트를 설명해드릴 KH 팀장 유현동이라고 합니다! 먼저, 1차 합격을 진심, 진심,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놀라셨죠? 네. 사실 붉은색 균열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테스트였어요. 여러분들이 그 균열에 몸을 던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기를 증명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저 감동했어요! 큼큼 ]

귀를 때리는 수다스러운 울림.

세상에... 테스트 공지를 유현동에게 맡기다니. 도대체 팀장들은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목을 한번 가다듬은 유현동의 목소리가 다시금 흘러나왔다.

[ 여러분들은 모두 지금 혼.자. 숲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을 거예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주변 조금만 돌아다녀 보면 동료를 찾을 수 있을 거거든요. 아! 다음 테스트는 생존 및 팀 결성입니다! 지원자분들의 의사소통 능력을 확인하기 위함이에요. 괴물 대가리를 부수는데 의사소통이 왜 필요하냐구요? 이제부터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드리겠... 으아악! 잠... 잠깐만요 누님! 파즈 즉- ]

전기 소리와 함께 유현동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러고는 깔끔한 글자화된 이미지가 시야에 생겼다.

[ 2차 테스트 : 생존 및 팀 결성 ]

[ 제한 시간까지 30명의 팀원을 확보하라. 인원 불 충족 시 자동 탈락 ]

[ 팀 리더 선언 시 리더 가능. 리더와 주먹을 맞닿으면 팀원 등록 가능 ]

[ 팀 변경 선언 시 리더 변경 및 팀원 방출 가능 ]

[ 남은 시간 24 : 00 : 00 ]

한눈에 이해 가는 설명이었다.

"그래... 진작 이렇게 했어야지."

"아... 아저씨 방금. 유현동 맞죠. 맙소사! 유현동도 KH 소속이었다니."

"그걸 몰랐어?"

"그럼 아저씬 알았어요? KH 하면 강현이랑 선소연이 만든지 얼마 안 된 집단으로만 알려져 있단 말이에요. 거기에 유현동까지 있을 줄이야."

"그렇군..."

하긴, 만든 지 일주일도 안 된 집단.

제대로 된 정보가 일반인들에게까지 새어나갔을 리 없다. 문태준이나 최강수도 같은 소속이라 말해주면 더 깜짝 놀랄 것 같은데.

그나저나, 이 소녀는 왜 나한테 들러붙어 있는 걸까. 유현동의 말로는 분명 각자 숲에 떨어뜨려 놨다고 했을 텐데.

"버그인가?"

"네?"

"너가 마지막에 끼어드는 바람에 이곳으로 같이 떨어진 것 같은데..."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차라리 잘 됐어요! 어차피 팀 결성하는 건데.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은 거 아니에요?"

말수가 적고 거친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나한텐 거리낌 없이 대한다. 도대체 뭘까. 난 떨어져 앉아있는 소녀에게 물었다.

"왜지?"

"네? 뭐가요."

"다른 사람들에겐 차갑게 대해놓고, 왜 나한테 들러붙냔 말이다."

"아."

내 직설적인 물음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제가 사람을 좀 잘 봐요. 아까 김훈영인가 걔도 딱 보면 알거든요. 분명 범죄자의 눈빛이었어요. 원래 대책 없이 막 덤벼드는 성격은 아닌데, 제가 화나면 물불 안 가리는 스타일이라..."

"... 그래서?"

"주변 사람들 다 봤는데, 아저씨는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내가 다르다?"

"네. 분명 영상이 흘러나왔을 때 사람들 전부 동요하고 있었어요. 아저씨 빼고는 전부."

호오, 다들 영상에 집중할 때 사람들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이건 새로운 타입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러셨거든요. 뭘 하려던 간에 사람을 잘 봐야 한다. 전 그 쭉정이들보다 아저씨랑 같이 있으면 더 이득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 더 있어요."

"뭔데."

"거기 있는 여덟 명 모두 무기를 긴 창이나, 던질 수 있는 대검을 선택했죠. 이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처음 보는 괴물이랑 누가 근접전에서 상대하고 싶겠어요. 근데 아저씨는 선택지가 뜨자마자 일 초의 고민도 없이 건틀릿을 선택했어요. 그거 보고 딱 직감했죠."

"뭘 직감해?"

"뭐긴요. 아저씨의 정체를요."

응?

겨우 건틀릿를 고르고 동요를 안 했다는 것만으로 내 정체를 파악했다는 말인가?

물론 추측할 수 있기는 했다.

여기가 KH의 테스트 공간이기도 하고, 언뜻 보면 비슷한 얼굴에 5군단장이나 싸이클롭스 베어를 잡을 때 내 주먹 쓰는 영상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갔으니까.

골치가 아파졌다.

벌써부터 일이 틀어지려 하다니...

열심히 메이크업해준 강설아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

소녀는 내 말이 없어지자 확신한다는 듯 말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어요."

"뭐."

"아저씨. 강 현 동경하는 경호원이죠? 그것도 실력 꽤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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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대위 귀환하다 0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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