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49화 (49/128)

터를 닦아야 집을 짓지. (3)

조민아는 벙쪘다.

뭐? 서울 근교에 30만 평?

그것도 겨우 400가구 들어가는데?

게다가 활주로라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저 정도 규모면 수십조의 돈이 드는 개발사업이다. 민간 수주팀에서 시행 컨설팅할 수 있는 범위도 벗어났고, 이 정도면 팀장급이 아니라 사장님이 직접 모시러 와야 할 정도다. 아니, 사장님이 뭐야. 분명 그룹 회장님도 오실 거다.

일단, 확인 절차가 필요했다.

"큼큼... 의뢰자분. 혹시, 어디 회사 소속이신가요?"

"아, 아직 단체는 안 만들어서요. 제 개인 돈으로 지을 생각입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역시 장난이라 생각하고 따지려는 찰나, 그가 예상했다는 듯이 웃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제 통장 내역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이... 이건."

대박이었다.

50조가 넘는 금액.

혹시 조작인가 싶어 이것저것 움직여봤지만 확실한 폰뱅킹 계좌 내역이었다. 이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분명 유명할 텐데, 이름도 안 적혀있다.

'이 사람은 진짜다.'

조민아는 박과장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빨리 사장님께 연락하라는 신호였다.

이런 비좁은 카페에서 얘기할 수 있는 수준의 의뢰가 아니었다. 적어도 VIP 룸이나 5성급 호텔에서 깍듯하게 접대해야 하는 사람이다.

역시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사이답게 조민아의 시그널을 바로 이해했다. 박과장이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들 찰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높으신 분들을 부르시는 거라면 말리고 싶군요. 제가 시끄러워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내키지 않으시다면 다른 회사를..."

"아니요!"

조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박과장도 누르던 핸드폰을 잽싸게 탁자 위로 올린 후 손을 들었다.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겠다는 제스처였다. 역시 순발력 있어.

무려 한 달 만에 찾아온 고객.

그것도 왕건이.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이 계약 한 번만 따내면 적어도 3년은 우려먹을 수 있다. 비록 지금은 민간영업팀장이지만, 특수영업 분야에 대해서도 나름 자신 있다. 경험도 있었고.

"제가 맡겠습니다. 고객님!"

"좋습니다. 근데 제가 사정이 있어서 좀 빨리 만들어야 하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비용이 좀 들더라도 패스트 트랙(Fast track) 기법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설계와 시공을 동시에 하는 거예요."

부지 선정 후 터파기와 설계를 동시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자칫 설계 실수를 하면 더 큰 비용이 발생할 수 있지만, 잘만 한다면 적어도 2년은 앞당길 수 있다.

이것 역시 초 대박이다.

시공 속도가 빨라지면 그만큼 투입한 기간 대비 수익도 많아지니까. 게다가 이 남자는 그만큼의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조민아는 앞에 있는 남자가 꿀단지로 보였다.

"아뇨.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시공은 필요 없습니다."

"... 네?"

"건설사에선 부지 구매, 설계, 자재 구매 그리고 차후 안전 관리만 해주시면 됩니다."

"시... 공을 안 하신다구요? 혹시 다른 시공사 알아 두신데가 있는 겁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게 설계입니다. 제가 말했던 것들이 모두 들어가야 해요. 기간은 딱 10일. 괜찮습니까?"

조민아는 아까부터 정신이 없었다.

시공은 안 하고 설계만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또 10일?

10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된다. 설계의 신이 살아돌아온다 해도 불가능하다.

"후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꿀단지를 열어보니 신선한 꿀이 아니라 상한 꿀이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절대 불가능해요. 우선 대단위 토지 구매하려면 인허가도 받아야 하지, 정당한 수용 절차도 밟아야 하지, 등록해야 하지 수많은 복잡한 절차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리고 설계가 무슨 도면 위에 그림만 찍 그려놓는 건 줄 아세요? 지질 검사도 해야 하고, 전기, 토목, 조경, 난방, 도면 허가 등등 얼마나 많은 걸 고려해야 하는데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코리아 건설 혼자 했을 때 얘기겠지요."

"네?"

"국내 1위에서 10위까지 모든 설계사무소를 동원하세요.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을 고용하고, 당분간 회사 모든 인력을 그곳에 집중하세요. 그럼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 밤낮으로 구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진짜 '설계'만 하는 거라면. 근데 왜 우리가 굴러들어온 파이를 다른 회사랑 나눠먹어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10일은..."

"10일 만에 해결하면 피차 이득 아닙니까. 전 빨라서 좋고, 그쪽도 짧은 시간에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고. 보통 설계 비용이 얼맙니까?"

"업계 평균이 공사비의 3% 정도입니다."

"6% 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코리아 건설에는 중개 수수료 1%까지 더해 총 7% 드리도록 하죠."

"......"

조민아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서울 근교라 했으니까, 도시 개발 30만 평이 가능한 지역이 어디 있었더라.

아, 수서동 쪽에 있었지. 그럼 대략 평당 7천만 정도 잡으면 총공사비 21조라 가정했을 때 7% 라면 수수료만 1조 4,700억. 그만큼 버는데 걸리는 시간이 10일이라 치면... 하루 수익이 1,470억?!

이건 한국 건설사에 길이 남을 기록일 거다. 수수료 6%라 하면 지금 같은 불경기에 달라붙을 건설사만 수십 개일 거고.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조민아가 결정을 내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 저질러보자. 이 계약 하나로 날아오르는 거야.

"... 목숨 걸고 진행해 보겠습니다. 세부 내용들 메일로 보내주시면 오늘 바로 시작할게요."

"각오 마음에 드네요.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특히 제가 디자인과 안전에 민감하니 신경 써주세요. 비용은 얼마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돈만 많은 게 아니라 씀씀이도 크다.

조민아는 사내에게 점점 빠져들어갔다.

그가 깜빡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토지수용 보상금은 감정평가 금액의 열 배로 쳐주세요."

이 사람은...

돈으로 인성까지 사버렸다.

경험상 열배 준다고 하면 안 나가고 버틸 사람은 없다. 당장 받아 나가지.

어쩜 사람이 이렇게 멋있을까.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얼굴인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계약하려면 이름을 알아야 되니까.

"그런데, 혹시 성함이..."

"아, 강 현입니다."

"그러시구나. 근데...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조민아의 머릿속에 돌연히 떠오르는 생각. 최근 세계를 호령하는 그 이름. 그 생각이 맞나 확인하고 싶어 박과장을 쳐다보니 딱딱하게 굳어있다.

"서... 설마? SS급 헌터이신?"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진짜야?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된다. 방금까지도 잘 흘러나왔던 말이 목구멍에 뭐라도 틀어막힌 듯 나오지 않는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거물 중의 거물이 눈앞에 있다니.

"맞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조용하게 처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습니다."

여부가 있을까.

세계 최고 헌터가 의뢰한 거주 단지였다.

완공하고 나면 전세계 매스컴에 오르내릴 게 뻔한데. 간단한 민간수주인 줄 알았던 것이 회사의 명예와 사활이 걸린 일로 변모했다.

컨설팅을 마친 둘은 회사로 복귀했고, 그날 회사가 한바탕 뒤집어졌다.

***

"어쨌든 할 수 있단 거지?"

[ 그렇다. 자재도 준비되어 있고, 도면만 확실하다면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

이주 전 나눴던 크라켄과의 대화였다.

그의 창조 능력은 무궁무진했다. 나노 금강석을 만드는 수준만 아니라면, 뭐든 그에겐 간단한 창조라 했다. 30만 평의 주거 단지라 해봐야 본체수준을 고려하면 별거 아닐 테고.

굳이 코리아 건설에 시간 들여가며 시공을 맡길 이유가 없지. 내 곁에 최고의 시공 괴물이 있는데.

결국, 건설사는 시간을 지켰다.

덩치 큰 사업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 10일 만에 해내고 만 것이다. 제시했던 기간 동안 난 주먹으로 직접 터파기를 시도했고, 설계 도면 제작 과정을 메일로 주고받으며 참여했다.

가구당 400평짜리 초호화 5층 빌라만 80개 정도를 배치했고, 중앙에는 집단이 사용할 세련된 건물을 넣었다. 각 건물들 지하통로는 전부 연결되게 해놓았고, 핵이 떨어져도 살 수 있는 벙커들 또한 배치했다.

호수가 딸려있는 국립 공원 수준의 조경을 첨가했고, 건물들은 모두 최첨단식 디자인으로 했다. 활주로도 넣었다. 앞으로 해외에서 벌어들일 결정체들을 매번 공항에서 직접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전체적인 도면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가격도 괜찮았다.

설계비 1조 5천억, 부지값 15조,

자재비 2조, 예비비 1조 5천억 정도.

대략 19조 얼마 정도 나왔는데 딱 20조 줘버렸다. 확실히 시공비와 공사 인건비가 없으니 규모에 비해 싸게 먹혔다.

넓은 공터와, 가지런히 나열된 자재들을 바라보고 있자 멀리서 조민아와 박중호가 다가왔다. 그동안 고생이 심했는지 둘 다 다크서클이 깊게 져있었다.

"저... 헌터님이 말씀하신 데로 준비는 다 했는데, 그냥 이대로 둬도 괜찮은 겁니까?"

"나름 현장 많이 다녀봤지만, 이렇게 썰렁한 건 처음 봐요. 타워크레인도 없고..."

두 사람이 앞다투어 말했다.

그래.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네,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고생하셨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건물 지어줄 친구는 따로 있거든요."

"그... 시공사가 아시는 분 회사인가 봐요? 그래도 하시려면 빨리해야 할 거예요. 이렇게 하면 패스트 트랙을 하는 의미가..."

"패스트 트랙이 아닙니다."

"네?"

"지상 최강의 문어쇼를 보여줄 생각입니다."

".....?"

그들이 갑자기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먼저 퇴근하셔도 좋지만, 한 번 구경해 보세요. 어디 보자... 시공 시작하기까지 한 시간 남았네요."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난 빙긋 웃으며 그들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오늘부터 전 직원 한 달씩 특별 휴가라 시간도 널널해요."

지난번 회의에서 말했던 이주 후가 바로 오늘이었다. 단체 메시지를 통해 회의 장소를 이곳으로 변경했고, 단원들이 전부 모이면 깜짝 선물을 공개할 생각이었다.

기대감에 심장이 쿵쿵대는 걸 느끼고 있을 때, 뒤에서 선소연이 다가왔다. 분명 강남역으로 출근했었을 텐데 메시지를 보자마자 달려왔나 보다.

"오빠. 왜 이런 허허벌판으로 부르신 거예요?"

"왔어?"

"네. 어차피 회의 여기서 한다길래 빨리 와버렸어요. 팀장들도 저기 오고 있어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 현동이와 태준 씨, 태경이와 설아까지 걸어오고 있었다. 그간 많이 친해졌는지 두런두런 얘기하면서...

이제 아저씨랑 주유라 씨만 오면 되겠군. 물론 그들이 오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들 잘 지냈나."

"안녕하세요."

최강수를 시작으로 우리 여덟 명은 서로 가벼운 인사를 했다. 드디어 다 모였구나.

난 모여있는 단원들을 한 번씩 둘러보았다. 역시나 왜 이곳으로 불렀냐는 의문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오셨습니다. 오늘 회의는 이곳에서 할 예정입니다. 우리 단체의 본거지를 만들 곳이죠."

내 말을 듣자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여긴 공터잖아요."

"딱 봐도 건설 현장인데..."

"형님! 여기다가 본거지를 지을 예정이십니까!"

"그래도, 아직 건물도 없는데 오늘은 관리국에서 하지..."

터져 나오는 팀장들의 불만들과 의문들.

최강수 역시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자, 여러분들!"

난 손뼉을 한 번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떠들던 팀장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여러분이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제가 깜짝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말을 마친 후 목걸이에 기운을 천천히 흘려 넣었다. 마침내 쇼를 보여 줄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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