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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위, 귀환하다-45화 (45/128)

심해 속으로. (3)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해?"

"으음... 반 정도 온 것 같아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어느 정도 들어온 후부터 빛이 아예 차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두른 막 안으로는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걱정했던 수압도 느껴지지 않았고 숨도 문제없이 쉬어졌다. 산소는 물에서 추출해 공급한다고 쳐도, 압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녀가 능력으로 견디고 있다는 말이겠지.

"괜찮아? 무거울 텐데."

육안으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촉각과 후각이 그녀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알려줬다. 몸에서 흐르는 축축한 땀과 뜨거운 호흡. 말은 건방지게 하더니, 물속에서 내가 최대한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 써주는 듯했다. 그녀는 균열 호수 속에서 신체능력을 각성했기에 물속에서 자유롭다지만, 난 아니다.

"미안하네. 괜히 나 땜에."

"아니에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원해서 하는 건데요."

"불이라도 좀 켜줄까?"

"괜찮아요. 감각으로 찾을 수 있어요. 일단 좀 쉬고 있으세요. 오빠 힘 아껴놔야 비상시에 쓸 수 있잖아요."

빛이 없지만 내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심해어들이 길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계속 밑으로 내려갔고,

곧이어 발광 생명체마저도 사라졌다. 진정한 심해 끝자락의 도입부로 진입한 것이다.

한 시간쯤 더 흘렀을까.

이젠 방향감각마저 사라졌다.

위로 올라가는 건지,

내려가는 건지도 모르는...

오로지 선소연의 감각만을 믿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치 별빛 하나 없는 블랙홀 주변을 헤엄치고 있는 느낌이 계속되는 찰나에,

물컹-

등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벌써 해저 바닥인가?

아니면 벽인가?

그러기엔 너무 부드럽다.

설마 심해에서는 돌이 물렁물렁하기라도 하단 말인가. 선소연의 등은 내가 만지고 있으니까 내 등이 먼저 닿은 것 같은데.

"오빠 자요? 다 온 것 같아요."

"안 자고 있었어. 근데 피부에 닿는 촉감이 뭔가 낯설다?"

"저도 느껴져요. 분명 이쯤인 것 같은데..."

"그럼 여기 어딘가에 균열이 있다는 건데.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고?"

"네. 그냥 이 주변 전체가 느..."

[ 이... 기운은... ]

"......?"

그녀가 말하는 도중에 중후한 음성이 돌연히 머릿속을 울렸다. 분명 군단장들이 썼던 방식이었다.

순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저... 저도 모르겠어요."

이곳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감지한 나는 주먹에 불기운을 실었다. 주변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화르륵-

"허억..."

"꺄악! 깜짝이야..."

어둡고 조용한 공간에 빛이 피어올랐고,

목소리를 내는 놈의 정체가 드러났다.

공간 전체를 가득 덮고 있는 거대한 문어 모양의 괴물. 흉측하게 생긴 게 꼭 심해 공포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내 등에 닿았던 건 놈의 빨판의 일부였다.

바다 밑에 이런 존재가 살고 있었다니.

적잖은 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 너희는 인간 종족이구나. ]

인간을 어떻게 알고 있지?

게다가 목소리도 불과 하루 전 만났던 5군단장과는 확연히 달랐다. 지독한 고독 속에 있어야 나올 수 있는 음성. 그 속에서 현기가 느껴졌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래. 그때 그 골렘과 비슷했다. 난 긴장했는지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떼어냈다.

"너는... 물의 종족인가?"

[ 그렇다. 너희들의 정보에 따르면 '크라켄'이라 부르면 될 것이다. 흐음... 그나저나 그대들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왕들의 기운... 그렇군. 결국 그렇게 된 것이었어. 모든 것이 왕의 뜻대로... ]

"그게 무슨 말이야.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지?"

[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 그러나 지금은 답해 줄 수 없는 게 대부분이다. 특히 과거에 관련된 것이라면. ]

놈은 커다란 빨판들을 꿈틀꿈틀 거리며 말했다. 징그럽게.

"어째서냐."

[ 너희들의 정신력이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통 방식은 인간과 다르게 고차원적이다. 내가 알려주려 해도 너희가 본능적으로 거부하겠지. 만약 거부하지 않고 수억 년에 걸친 정보를 억지로 받아들이는 순간,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한 너희는 존재 자체를 잊어버릴 것이다. 아마 정신이 붕괴되고 말겠지. ]

까탈스러운 시스템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놈들이 강제로 정보 주입을 할 수는 없나 보다. 그랬다면, 5군단장이 이미 주입했겠지.

"그럼 과거에 관련된 정보가 아니면 가능하다는 건가? 솔직히 답답한 게 많거든. 너희의 적인 불의 종족을 상대하는데, 조금이라도 성의를 보이는 게 어떠냐."

[ 답답할 수밖에. 본래라면 왕의 기운을 담는 즉시, 너희의 육체는 터져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비정상적인 육체 강화를 통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정신력까지 부족하니 힘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겠지. 그래도 둘 다 두 단계씩 탈피는 완료했군. ]

"탈피?"

[ 우리 종족은 총 다섯 단계의 탈피를 거쳐 성장한다. 보아하니 둘 다 불의 종족 군단장을 잡았구나.  ]

다섯 단계의 탈피라면...

결정체로 각성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과 동일한 개념인가?

처음 결정체 먹은 것까지 해서 총 다섯 단계니까.

듣고 있던 선소연이 궁금증을 표현했다.

"전 군단장을 잡은 적이... 아?"

"그때 그 골렘. 너가 잡았잖아."

[ 골렘이라면. 아... 5군단장을 말하는 거로군. 그가 죽었다니. 좋은 친구였는데 아쉽게 됐구나. ]

5군단장이라고? 내가 아는 5군단장은 어제 본 공룡 대가리였는데.

그리고 좋은 친구였다고? 어떻게 물의 종족과 불의 종족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순간,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왔다.

"아윽!"

"꺄악!"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우리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본능적으로 그 이상의 정보들을 차단하는 것이다. 과거의 관한 내용이구나. 빌어먹을.

크라켄은 우리의 고통에 크게 관심이 없는 듯 말을 이었다.

[ 그렇다면 회복 능력을 가져갔겠군. ]

골렘의 고유 능력이었던 회복.

소연이가 말도 안 되는 치유능력을 가진 게 그 덕분이었구나.

그럼 난 뭐지?

어제 잡은 괴물의 고유 능력은 딱히 없었다. 내가 도발했을 때 화내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

"군단장급이 고유 능력이 없을 수도 있나?"

[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군단장은 불의 종족에만 있는 직책. 다섯 번의 탈피를 마치고 수천 년의 수양을 통해 온전히 본인의 힘으로 받아들인 자들은 본인만의 고유 능력을 발현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 중 최상위급 능력을 가진 다섯 명 만이 종족의 수장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다. 고유 능력이 없는 군단장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선택할 이유도 없을 것이고. ]

놈이 군단장이었다면 틀림없이 나도 고유 능력을 흡수했을텐데.

"하아, 갈피를 못 잡겠군."

"오빠, 제가 느꼈었던 그거요. 혹시..."

"느꼈던 거?"

"능력 쓰실 때마다 제가 감각 공유했던 거요."

"그게 왜?"

"고유 능력과 관련 있지 않을까요?"

[ 으음... 자세히 말해 보아라. ]

크라켄이 관심을 가졌고, 선소연은 본인이 느꼈던 걸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 허어. 확신은 없지만, 잘못하면 최악의 상황일 수도 있겠구나. 그렇지. 대전쟁 때 도망갔던 겁 많은 총사령관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을 것이다. ]

"답답하게 혼잣말하지 말고 제대로 설명을 해봐."

[ 고유 능력 중 파트너와 감각을 공유하는 능력이 있다. 쓰레기 같은 능력이라 보통 군단장으로 쓰지는 않는데 물의 왕을 유난히 두려워했던 총사령관이라면 버리는 패로 썼을 수도 있겠지. 이는 심각한 상황이다. 총사령관이 지구의 상황을 전부 전해 받았을 수도 있어. 만약 놈들이 물의 왕의 부재를 알았다면... 두려울 것이 없을 테고, 총공격을 시도하겠지. 지금 그대들의 힘으론 절대 놈들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대전쟁 이후 놈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분명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갈고닦으며 준비했겠지. ]

"그렇다면 너는 왜 나서지 않는 거지?"

[ 애초에 불의 종족은 파괴, 물의 종족은 창조의 힘을 가지고 태어났다. 난 전투에 특화된 능력이 아니라 놈들의 군단장 하나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

"총사령관 보고 겁쟁이라 하더니 정작 심해에 숨어있는 너도 똑같은 겁쟁이 아닌가?"

실망스러운 답변이었다.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다니.

선소연도 마찬가지인 듯 푸념했다.

"흐음... 기대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쓸모없네요. 제한 때문에 정보도 시원시원하게 안 가르쳐주고."

"그럼 그냥 여기서 죽이는 게 낫겠네. 그럼 적어도 우리 능력은 키워줄 수 있을까 아냐."

"제가 할까요? 아니다. 오빠가 하는 게 낫겠죠?"

그녀의 천진난만한 동의에 크라켄이 살짝 움찔했다.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한 척 말한다.

[ 나도 살 만큼 살아온지라 목숨에 미련은 없다. 하지만 날 죽이는 정도의 능력 상승만으로는 놈들을 막기 힘들 것이다. 그대들은 지금 탈피보다는 정신력을 기르는 게 더 중요하다. ]

변명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 나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 하지 않는가.

지구를 위협하는 건 분명히 불의 종족이다.

애꿎은 물의 종족을 죽일 필요는 없겠지.

우리가 반응이 없자,

크라켄의 음성이 서서히 격해졌다.

[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빠르게 지치지 않는가? 애초에 능력을 자기 것처럼 다루지도 못해 무궁무진하신 왕의 능력을 제대로 끌어내지도 못하는데 탈피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 과거 물의 종족들이 영혼의 격을 올리기 위해 수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던 존재가 나였다. 원한다면 그대들 수준에 맞추어 준비해주지. 이곳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왕의 힘을 온전히 쓸 수 있는 것도 불가능 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

"흐음..."

[ 단. ]

내가 침음을 흘리자 크라켄이 강조했다.

[ 각오해야 할 것이다. 보통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행이 될 터이니. ]

왜 설레발일까.

아직 한다는 말도 안 했는데.

선소연이 내 팔뚝을 두 번 툭 툭 치며 말했다.

"어떡하죠?"

"왜. 거짓말 치는 거 일 수도 있어서?"

"아뇨. 함정 같지는 않은데... '무사히'라는 말이 걸려서요."

[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대들은 언제든지 원하는 시간에 수련할 수 있으며, 그만하고 싶을 때 그만해도 좋다. 절대 목숨에 지장 가는 공간은 아닐 것이다. 정신에 타격이 있을진 몰라도... ]

내가 걱정되는 건,

그 공간의 위험성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언제든지 수련할 수 있다지만, 한국과 이곳을 오가는 데 생각보다 막대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 빨리 한국으로 복귀해 가족들의 안전 대비와 단체 정리를 해야 한다. 놈들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일이니.

"오빠, 이제 슬슬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기운이 반 조금 넘게 남았어요."

이것도 문제다.

심해 속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는데 어떻게 수련을 한 단 말인가.

"이봐. 크라켄. 일단, 나중에 시간 날 때마다 와도 되나? 지금은 좀 바빠서."

[ 다시 오는 건 상관 없다만... 그대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

"무슨 오해?"

[ 수련은 이곳에서 할 필요 없다. ]

응? 그게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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