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 속으로. (2)
태평양 한가운데.
사방이 수평선이라 방향감각도 없었다.
처음에 잡은 방향으로 그대로 쭉 밀고 나가다, 그녀가 지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물에 둥둥 떠있는 상태.
옷이나 가방이 젖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따가 그녀의 손짓 한 번이면 증발할 테니까.
"생각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뭐가요?"
"물 주제에 물건을 집기도 하고 사람을 태우기도 하다니..."
그녀가 만든 초소형 수상비행기는 대단했다. 마치 손오공이 타고 다녔던 근두운 모양의 물구름이 허공에 뭉쳐있었고, 분명 액체임에도 물컹한 고체 위에 앉아있는 것 같이 편안했다.
그뿐이랴.
추진력을 가하면 수면 마찰력이 없다 보니 가속이 붙게 되고, 결국 비행기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게 된다. 이제 자동차도, 비행기도, 배도 필요 없는 것이다.
"알려드릴까요?"
"응, 알려줘."
"허공에 만들고 싶은 포인트에 눈을 딱 집중하고 물을 만드는 거예요. 그다음에 그걸 있는 힘껏 눌러요. 그럼 수압이 증가하거든요? 그럼 얼음이 되더라고요. 어는점이 내려가서 그런가? 어쨌든, 그렇게 발판을 만든담, 주변에 고체가 되지 못한 물을 예쁘게 둘러준 다음에 살짝 눌러주면 이렇게 돼요. 문제는 유지하는 게 많이 힘들어요."
"그러냐...?"
대충 이해는 됐다만,
깊게 생각하기 싫었다.
알아봐야 불의 능력을 다루는 나에겐 쓸모없었다. 그나저나 물로 축제를 벌이는 것도 모자라 벌써 응용을 하고 있다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녀가 쉬는 동안 나도 연습해야지.
최종 목표는 그녀가 분수쇼에서 보여줬던 능력을 펼침과 동시에 공격까지 성공시키는 거다.
나는 이것저것 시도해보기 시작했고,
그녀가 옆에서 조언을 해줬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거라고?"
"눈을 감고, 오빠가 원하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세요. 그다음 그 이미지에 불을 채워 넣는 거예요."
눈을 감았다.
이미지를 떠올리라고?
음... 어떤 놈으로 하지?
제일 인상 깊고 강해 보이는 놈.
그래. 균열에서 만났던 골렘의 형상이다.
처음이니까 크기는 작게 하고,
거기다 불을 채워 넣으랬지?
화르륵-
심장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서서히 만들어지는 불 골렘의 모습. 난 흐르는 기운을 통제하지 않고 풀어줬다.
한 번 보고 싶었다. 모든 기운을 넣어 완성된 각성 능력의 파괴력을.
화르르륵-
"으... 으아아 잠깐만요! 오빠."
"......"
그녀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온 정신력이 놈을 만드는데 집중되고 있었으니까. 붉었던 골렘은 점점 청백색을 띠기 시작했고, 바닷물이 서서히 증발하면서 파도가 요동쳤다. 떠밀려가는 나를 그녀가 뒤에서 꽉 붙잡았다.
"살짝 뜨거운데요? 일단 실드 쳐놨으니까 더 해보세요."
"......"
그녀이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바닷물이 계속 증발할 정도의 열기면 일반인들은 순식간에 녹아버릴 것이다.
모든 기운을 주입한 후에 눈을 떴다.
보기만 해도 뜨거워 보이는 불로 이루어진 웅장한 모습의 골렘이 내 시야에 드러났다.
"와... 죽이는데?"
"계속 집중해보세요."
문제는 유지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정신력을 다 갉아먹는 느낌.
점점 두개골이 빠질 듯이 아파왔다.
난 인상을 쓰며 집중했다.
그래도 공격은 해봐야지.
어떻게 움직여 볼까.
그래. 남자는 주먹이지.
순간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커다란 골렘이 주먹을 위로 올리더니 힘차게 바다를 향해 냅다 내려쳤다.
콰아아앙-
"꺄아악!"
귀를 찢을 듯한 폭발 소리와 함께 바다 한가운데 거대한 홀이 생겼다. 그녀는 우리를 물로 감싸 허공으로 올랐고 커다란 홀로 바닷물이 모여 강하게 부딪쳤다. 태평양 한가운데 핵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난장판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불 골렘이 사라졌고,
난 녹초가 되었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와- 이거 장난이 아닌데?
"괜찮아?"
"으으... 견딜만해요. 여기까지 오느라 힘을 다 써버려서... 아앗!"
그녀가 집중을 못 하고 감싸던 물을 풀어버렸다. 동시에 떨어지는 선소연을 꽉 잡고 넘실거리는 쓰나미 속으로 몸을 맡겼다.
쏴아아- 풍덩-
몸에 엄청난 수압이 밀려들어왔다.
그녀도 나도 겨우 이 정도에 통증을 느낄 그런 육체는 아니었지만 몸이 360도로 계속 돌며 쓸려나갔다. 아프진 않았지만 빙글빙글 도는 턱에 정신이 없었다.
내 품 안에 있던 그녀가 겨우 손을 뻗었다. 그러자 태풍이라도 불었던 것 같은 난폭한 바다가 서서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그렇지만,
그녀도 참 대단한 능력이다.
대자연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라니.
"으아... 전 이제 완전히 방전됐어요."
선소연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결정체랑 식량은 무사하고?"
"어엇! 잠시만요!"
화들짝 놀라 가방을 뒤지는 그녀.
결정체용 가방은 워낙 튼튼해서 그런지 멀쩡했지만 간식을 싸온 가방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흐잉... 어떡해."
"괜찮아. 여기 널린 게 식량인데. 일단 좀 쉬자."
"네에? 오빠 땜에 다 죽었을 것 같은데요..."
***
하루가 지났다.
어두컴컴했던 밤이 지나가고 해가 뜰 동안 우리는 둥둥 떠다니며 휴식을 취했다.
"배고프다..."
"그쵸? 제가 괜히 맨날 배고프다 그러는 게 아니에요. 능력 써보니까 알겠죠? 이거 꽤나 중노동이라니까요."
"글쎄. 그냥 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픈 거 아닐까?"
"아니라니까요! 에휴- 힘 빠져서 말도 못하겠다. 간식은 목숨 걸고 지켰어야 하는 건데..."
"기운은 다시 충전됐고?"
"휴우- 네. 배고픈 거 빼고는 다 괜찮아요."
심장에 자리 잡은 기운은 조금만 쉬면 다시 원상태로 복구한다. 어찌 보면 장점이기도 한데, 대신 단점이 너무 컸다. 모든 힘을 퍼붓고 나면 온몸이 녹초가 된 듯 힘이 빠진다. 정신력이 따라주질 않는 것이다. 물론 압도적인 파괴력이긴 한데, 앞으로 상대할 자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무언가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어? 오빠! 오빠! 저게 뭐예요?"
뭐가?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무언가가 꽤나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헤엄쳐오고 있었다.
펄떡-
순간, 우리 위를 힘차게 점프하는 커다란 참다랑어. 그녀가 신나서 소리쳤다.
"참치떼에요!"
맛있는 식량이 제 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난 그중 한 마리를 잽싸게 낚아챘다.
그동안 그녀는 다시 수상비행기를 만들어 날 태웠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해는 동쪽에서 뜨니까 반대쪽으로 이동하면 된다.
"참치는 역시 회 떠먹는 게 최고죠."
"기다려봐. 자 여기."
참치 한 마리를 잡아 뱃살을 한 움큼 떼어내 그녀에게 건넸다. 낼름 받아먹는 그녀.
"으엑!"
"왜?"
"제가 알던 참치 맛이 아니에요."
"냉동 참치가 아니라 생참치잖아. 훨씬 더 부드럽고 감칠맛 나지 않아? 먹다 보면 맛있을 거야."
갓 잡은 생선이라 그런지 신선하니 맛이 괜찮았다. 그녀는 비린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쩝. 옛날 생각나네요."
"무슨?"
"균열에서 쏘가리 회 뜯어먹었을 때요. 그게 진짜 맛있었는데."
그것도 맛있었지.
그래도 난 이게 더 맛있다.
그녀와 나는 이동하는 물 위에 앉아 떠들며 참다랑어 한 마리를 전부 해치웠다. 다 먹고 물로 입을 헹구던 그녀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그거 말하려고 했었는데."
"뭐?"
"오빠가 5군단장 처리했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음... 뭐랄까. 오빠가 능력을 쓸 때마다 그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져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놈 몸속에서 주먹에 불 씌웠었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냥 밖에 있었는데도 안이 훤히 보였어요. 뭔가 감각을 공유하는 느낌? 그리고 아까 불골렘 만드셨을 때도 똑같이 그런 느낌 받았었어요."
갑자기 그게 또 무슨 말인가.
감각을 공유하다니?
그녀와 나 사이에 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능력이 각성됐나?
보아하니 군단장의 핵을 부쉈을 때부터인 것 같은데, 내가 부쉈는데 그녀가 각성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분명히 느꼈다. 핵에 있는 기운이 내 심장으로만 들어오는 것을.
또 우리에게 알 수 없는 현상이 벌어졌다.
속이 답답해졌다.
누군가가 시원하게 설명해서 막힌 속을 뚫어줬으면 좋겠다는 느낌. 한참을 침묵하며 고뇌하고 있는 중에 그녀가 내 팔목을 잡으며 외쳤다.
"어어? 잠깐만요!"
"또 왜?"
"뭔가 느껴져요!"
그녀가 눈을 감으며 손가락으로 좌측 45도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에요! 저기서 뭔가 친숙한 기운이 느껴져요. 엄청 따듯하면서도 슬픈 그런 느낌이요..."
친숙한 느낌이라...
그건 내가 균열을 발견했을 때랑 비슷한 느낌일 텐데... 그녀와 돌멩이로 균열을 찾을 때 미약했었지만 분명 고향에 온 것 같은 향수를 느꼈었으니까.
그렇다면?
"어떡할까요?"
가 봐야 하나?
만약 정말로 균열이라면?
그렇다면 물의 종족 균열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저번처럼 안전하지 않고 우리를 장기간 옭아맬 수 있는 균열이라면 위험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아니라 지구가.
혹여나 균열 속에 있는 동안 놈들이 재침공을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또 최강수는 우리가 곧 복귀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을 텐데, 바다 위라 아저씨에게 연락할 방도도 없다.
반대로 기연일 수도 있다.
물의 종족이면 지금 침공하는 놈들과 싸웠던 종족이다. 우리에게 큰 득을 가져다줄 수 있다. 물의 왕이 남겨놓은 또 다른 실마리 일 수도 있고.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전 무조건 가보고 싶어요. 제 심장이 그러라고 소리치는 것 같아요."
"......"
그럴 줄 알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다.
사실 나도 마음속으로 이미 결정을 내렸다.
궁금한 건 죽어도 못 참는 성격이거든.
"방향 틀어. 가보자."
"네!"
***
그 이후로도 한참을 달렸다.
곧이어 드러나는 자글자글한 섬들.
여기가 어디쯤이지? 세계 지리에 관심이 없어 추측할 수조차 없었다.
"여기에요."
"어디? 어느 섬?"
"아니요. 섬이 아니라 이 밑이요. 저 지금 소름 돋아요."
"왜?"
"빨리 가보고 싶어서요."
"흠... 그러니까, 지금 그게 바다 밑에 있다는 거지?"
우리가 서있는 곳 일대만 바다색이 다르다. 그러니까 무척이나 짙은 청색이다. 보기만 해도 엄청 깊어 보이는...
"네. 그것도 엄청 깊이 있는 것 같은데요?"
"......"
빌어먹을.
심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건가.
주변에 널린 섬들과 깊은 바다를 종합해보면, 이곳은 해구다. 제일 가능성 있는 곳은 태평양에서 아니, 전 바다에서 가장 수심이 깊다는 마리아나 해구.
"심해겠지?"
"그럴 거예요."
"흠, 걱정인데..."
"뭐가요?"
"심해는 미지의 영역이야. 심지어 우주보다 더 밝히기 힘든..."
우주는 무한하고, 심해는 유한하지만 탐사 난이도는 심해가 훨씬 더 크다.
그래도, 그녀의 능력과 우리의 육체라면 해볼 만할 수도 있다.
"오빠, 설마 쫄았어요?"
그녀가 날 바라보며 상큼하게 웃는다.
하, 그래. 건방지게 도발한다 이거지.
내가 언제 이런 거에 재면서 달려들었다고.
"그래. 까짓 거 가보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물속에선 제가 확실히 지켜드릴 테니. 설마 제가 자신도 없이 가자고 하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가 둥근 막으로 날 감싸며 껴안았다.
"준비됐어요?"
"......"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대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