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단의 침공. (3)
"130억 달라는 입금 완료되었으며, 결정체는 지금 F-35를 통해 워싱턴에서 날라오고 있습니다."
"과연 대국은 대국이야."
불과 한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돈은 충분히 지불할 수 있다고 쳐도, 결정체는 다소 무리한 조건이었음을 안다. 그럼에도 짧은 시간 내에 그 수량을 마련할 수 있다니, 확실히 저력이 있는 나라였다.
선소연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단호한 표정이었지만 그녀도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힘이 있음에도 죽어가는 헌터들을 바라만 봐야 한다는 게.
"급하긴 급한 모양이에요. 다소 억지스러운 조건이었는데..."
"이쯤 했으면 충분해."
난 미국의 사과를 받아주기로 했다.
물론 또다시 저급한 장난을 치거나 욕심을 부린다면, 두 번의 용서는 없을 것이다. 뭐, 군단장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럴 생각이 싹 사라지겠지만.
주지사는 굳은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진다면 그에게도 큰 타격이 되겠지.
"로스엔젤리스가 어느 방향이지?"
"아직, 도착 안 했는데...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건, 해결하고 받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가시면..."
"아, 됐다. 처리하고 올테니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굳이 물어볼 필요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가보자."
"알겠어요."
***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 캘리포니아 주 일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5군단장의 포효와 헌터들의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한창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듯했다.
"전황이 썩 좋지 않아 보여요."
"조금 더 빨리 가자."
마침내 허공에 떠있는 커다란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공룡이 무지막지한 브레스와 꼬리를 휘두르고 있었고, 개미같이 작아 보이는 헌터들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크와아앙-
이제 대략 10km쯤 남았을까.
헌터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건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대장! 제임스의 상태가 심각합니다!"
"버텨. 우리가 막지 못하면 지구는 멸망한다! 로버트 돌벽을 세워!"
익숙한 목소리.
나름 마음에 들었던 사내.
피터 잭슨의 팀이었다.
땅을 박차는 데 힘을 더 가했고, 점점 그 공룡이 커지기 시작했다. 앞에는 헌터들이 옹기종기 30명 정도 모여있었고, 그 공간을 향해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Holy shit!"
누군가의 절망적인 목소리.
5군단장이 불을 뿜으려는 징조였다.
미약하게 세워진 돌벽은 놈의 공격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제가 막을 게요."
"부탁해."
카아아아-
놈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줄기와 함께, 우리는 그들의 앞에 도착할 수 있었고,
"전부 이쪽으로 모여!"
촤르륵-
내 외침과 동시에 선소연이 급하게 푸른색 실드를 펼쳤다.
콰 가 가 가-
강력한 불의 힘을 막아내는 든든한 물의 방패. 놈은 제대로 작정했는지 끊임없이 불줄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난 몸을 웅크리고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적시에 도착했군."
내 소리를 들은 그들이 살며시 눈을 떴다. 온몸이 불에 타버릴 줄 알았다가 낯선 목소리가 들리니 의아했던 것이다.
"미스터 강! 오셨군요."
피터 잭슨이 먼저 날 알아보았고 곧이어 환호성이 터졌다.
"뭐... 뭐야 금지의 땅을 처리했다던 그 SS급 헌터 아닙니까?"
"봐. 놈의 브레스를 막고 있잖아. 살았다! 살았다고!"
난 흥분하는 그들을 자제시키고 피터 잭슨에게 물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지?"
"헌터들이 많이 죽어나갔습니다. 저희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놈에게 공격이 통하지 않습니다. 정말 무지막지한 놈입니다."
그가 이마에 흥건히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여기 말고 다른 헌터들은 누가 통제하고 있나."
"제가 통제하고 있습니다. 무전을 통해 상황을 공유하고 있구요."
어떻게 놈을 상대로 오랜 기간 버텼나 궁금했었다. 이들 나름대로의 통신 수단이 있다는 것은 꽤 전략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말.
"지금부터 놈은 내가 맡는다."
"그럼 저희는..."
"너희는 내가 싸우는 동안 생존자들을 수색하고, 아직 피하지 못한 시민들을 지키는 일에 주력한다."
"알겠습니다!"
선소연의 실드에서 가능성이라도 본 것일까. 힘차게 대답하는 그들의 눈빛에 희망이 보였다.
***
한참의 브레스가 끝난 후 헌터들은 뒤로 신속히 흩어졌다. 푸른 막을 두른 채 서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5군단장의 시선이 느껴졌다.
"솔직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저건 너무 큰데?"
"일단은 크기가 크기인지라... 그리고 실드 유지도 힘들어요."
선소연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과연 군단장은 군단장인 것인가.
그래도 그때 골렘과 같은 압도적인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선 내 신체능력이 얼마나 통하는지 알아본다. 그래도 왕의 발톱으로 각성한 신체다. 놈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리에 힘을 주고 놈의 머리를 향해 뛰어오르려는 순간, 뇌에 군단장의 의사가 흘러들어왔다.
[ 이 기운은 분명 왕의 기운... ]
그때 균열에서의 골렘이랑 동일한 방식이었다.
[ 어찌하여 너희들이 그 힘을 가지고 있는가 ]
힘이라 하면 불과 물의 왕의 결정체를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놈들은 아직 왕들이 죽은 것을 모르는구나. 군단장은 뭐가 그리 기쁜지 웃음을 토해냈다.
[ 크흐흐... 알겠다. 알겠어. 과연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이미 왕들이 죽은 것이야. 총사령관께서 괜한 걱정을 하고 계셨어. 고작 벌레들이 기운을 흡수한 것에 불과한데. ]
놈은 공격을 하지 않고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더 얻어낼 정보가 있을까 나도 다리에 힘을 풀고 놈에게 말했다.
"총사령관과 나머지 군단장들은 안 오고 왜 너 혼자 온 거지?"
[ 으음...? 하등한 종족 주제에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아무리 군단장들 중 막내라지만 너희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하다. ]
군단장들 중 막내.
5군단장이라 했으니,
군단장은 총 5명 있을 확률이 높다.
"너희는 왜 지구를 침공하는 거지? 물의 종족과는 무슨 관계냐."
[ 그건 나도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 확실한 건 너희들은 곧 위대한 불의 종족 산하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
"글쎄, 내 생각이랑은 다르군."
[ 크하하, 좋다. 살짝 쳐도 쓰러질 것 같이 생겨서 참 호기로운 벌레들이구나. 오랜만에 나도 조금은 유희를 즐길 수 있겠어. ]
그의 의사에서 전투의지를 느꼈다.
강력하게 느껴지는 살기에 느슨하게 쥐고 있던 주먹을 꽉 움켰다. 이제 시작인가?
"소연아..."
"네. 준비됐어요."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손을 뻗어 물의 기운을 조종하고 있었다. 허공에 떠있는 작은 모양의 물표창. 직접 공격을 할 생각인가 보다.
[ 오... ]
5군단장의 못생긴 눈이 휘어졌다. 그간 봐왔던 헌터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는지 꽤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 대단하군... 미약하게나마 그 힘을 운용하다니... 본래라면 육체가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터인데. ]
씨익-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 그러나, 가소로운 수준이다. 일개 인간이 수억 년의 힘이 응축된 위대한 존재의 정수를 흡수할 수 있다고 보느냐. ]
"넌 입으로 싸우냐!"
난 첫걸음을 내디뎌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휘이잉-
세찬 바람과 함께 선소연도 놈의 뒤로 이동해 표창을 날렸다. 순간 나도 놓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콰아앙-
표창이 놈의 몸에 닿음과 동시에 나도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내리쳤다.
까앙-
역시나 단단한 표피, 주먹에 충격이 전해져 왔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놈이 미동도 하지 않고 웃고 있다는 것.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쓔우웅-
거대한 몸집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날라오는 놈의 꼬리. 순간적으로 눈을 집중해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피해냈다.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분명 자신 있었는데,
이 정도의 스피드와 방어력이라니.
[ 제법이구나 ]
재빨리 땅에 착지해 중심을 잡았다.
놈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거대한 앞발을 들어 내가 있던 자리를 내려찍는다.
눈에 집중을 하고 뒤로 피하자마자-
쾅-
갑자기 어마어마한 강풍이 온몸에 불어닥쳤다.
선소연의 눈도 화등잔만 해졌다.
겨우 땅을 밟은 것만으로 대지가 갈라지고 믿을 수 없는 바람이 불어닥쳤다. 아무리 신체능력이 뛰어나다지만 몸무게 80kg이 버틸 수 있는 풍압이 아니었다.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날아가는 찰나의 순간 놈이 대가리로 내 몸을 찍어버렸다.
"크허억"
복부가 통째로 뜯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놈의 이빨도 내 피부를 뚫을 수는 없었는지 상처는 없었지만 충격파가 내부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올라가는 놈의 머리.
천천히 벌어지는 아가리에서 에너지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들숨과 함께 빨려 들어가는 대기와 이글거리는 불구슬. 브레스 타임이었다.
내가 다시 몸에 힘을 주고 피하려는 순간, 옆에서 선소연이 급하게 다가와 실드를 쳤다.
카아아아-
다행히 통구이가 되는 일은 없었다.
팔을 부들부들 떨며 버티고 있는 선소연이 좋지 않은 안색으로 물었다.
"어떡하죠? 점점 버티기 힘들어요!"
"만만치 않네."
군단장의 힘이 이 정도라니.
무식하게 덩치만 큰 공룡일 줄 알았는데 막상 앞에서 보니 투신이 강림한 것처럼 압도적이었다. 난 그녀가 막고 있는 실드 속에서 머리를 굴렸다.
그때 그 골렘은 어떻게 잡았지?
선소연이 주먹을 내질러 잡았었는데...
아! 순간 번뜩 뇌리를 스치는 생각.
"그래. 핵! 핵을 찾아야 해."
"어디서요!"
"그 골렘도 내부에 핵이 있었어. 저놈도 분명 피부 안쪽에 있을 거야."
"하지만 단단해서 뚫리지 않잖아요!"
"놈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하나 있지."
놈의 피부를 뚫을 수 없다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찾아 들어간다. 똥구멍은 너무 더러우니까, 식도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그건 너무 위험해요!"
"내 몸에 실드만 계속 유지해 주면 될 거야. 다음 브레스 타임을 노린다."
"아... 알겠어요. 해볼게요."
그녀와 말하는 동안 나름 길었던 브레스 타임이 끝났다. 우리가 잘 버티고 있는게 놀라운지 군단장이 또 말을 걸어왔다.
[ 그 능력은 참 신비하단 말이야... 남자는 왕의 힘을 1%도 운용 못하고 있는데, 여자는 제법이구나. ]
"팩트 폭행하지 마라.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 흐흐, 그래봐야 벌레들일 뿐. 조금 더 버텨보거라. ]
"여유 부리긴... 그러는 너는, 다른 군단장들과 달리 고유 능력도 없는 것 같고, 브레스로는 고작 벌레들도 못 태우는군."
흠칫-
[ 이... 놈들 ]
부들부들 떨며 분노하는 게 느껴졌다. 고유 능력이 없다는 것 때문인가? 아니면, 브레스가 약하다는 것 때문일까. 뭐였든 놈의 역린을 건든 게 분명했다.
[ 제대로 보여주마. ]
놈이 다시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순간, 블랙홀이라도 열린 듯 모든 것들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대형 건물만 한 크기의 입속으로 자동차 건 가로수 건 뜯겨져나간 전봇대 건 가리지 않고 들어갔다.
그래, 지금이었다.
난 몸에 힘을 빼고 함께 빨려 들어갔다.
놈의 입안에서 불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조심하세요!"
선소연의 목소리와 함게 몸에 둘러지는 푸른색 막. 평소보다 두꺼운 게 온 힘을 나에게 집중한 것 같았다. 좋아. 이 정도면 됐어.
좀 더 빠르게.
그리고...
꿀꺽-
그대로 놈의 목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