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락의 도시. (4)
툭-
스피커폰으로 전환된 스마트폰을 침대 위에 던져 올린 후 선소연에게 눈짓했다. 그녀의 청각이라면 통화 내용 정도는 가볍게 들을 수 있겠지만, 대화에 참여하라는 의미였다. 그녀는 그 의미를 정확히 캐치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저 소연이에요."
- 음... 둘이 같이 있었나? 아침부터?
"아... 저희..."
그녀가 말해도 되냐는 표정으로 곁눈질했다.
아니, 터프할 땐 언제고...
뭘 또 그런 걸 허락을 받아.
"네. 이제 사귀는 사이입니다."
시원한 대답에 그녀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이불 속으로 파묻으며 검지를 까딱거렸다.
- 허어, 좋은 소식은 따로 있었구먼.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소식부터 말씀해 주시죠."
난 희소식을 먼저 선택했다.
배려심 강한 아저씨가 아침부터 전화할 정도면, 심각한 내용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좋은 소식부터 들어보고 싶었다.
- 으음... 어제 새벽 내내 WHO에서 주관하는 화상회의를 진행했다네. 세계 각국 헌터 기관의 수장들이 모였지.
"피곤하셨겠네요."
- 시차가 맞지 않으니 별수 없지 않겠나. 문제는 의제가 자네들에 대한 이야기였단 거야.
"우리들이요?"
선소연도 호기심이 들었는지 이불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네들은 오늘부터 SS급 헌터로 격상되었네.
"또, 새로운 등급이 생겼습니까?"
"으음... 그건 좀 생뚱맞네요."
의아했다.
S급 헌터가 된 지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갑자기 왜 S를 하나 더 붙여준단 말인가. 그것도 SS라니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등급이다.
듣고 있던 선소연도 좋은 소식에 대한 기대감이 꺾였는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떨쳤다.
뽀글- 뽀글-
미지근한 물줄기가 우리를 덮었다.
본인의 몸과 내 몸을 씻기는 것이다.
그녀의 능력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난 눈을 감고 몸을 구석구석 문지르는 물의 감촉을 느꼈다.
철퍽- 철퍽-
- 큼... 무슨 일 있나?
"아, 아닙니다. 계속 말씀해주세요."
갑자기 들리는 물소리가 신경 쓰였나 보다.
어쨌든 등급이 상승되었다는 건 모종의 이유가 있을 터,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 말하자면 좀 긴데... 자네가 쿠바로 떠나고 난 다음 WHO에 결정체의 효능에 대해 알렸었어. 먹으면 성장하는 거.
"그건 알고 있습니다."
- 웃긴 게 뭔 줄 아나? 중국, 인도, 미국도 이미 알고 있었단 거야. 그것도 이미 실험까지 마친 상태로.
"인구가 많은 나라들이니 알 수도 있었겠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놈들과 싸워야 하는 인류의 전력이 더 강해졌다는 소리니까.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최강수가 코웃음쳤다. 아저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 흥, 우리가 말 안 했으면 끝까지 정보를 묶어두고 안 풀었을 작자들이야. 아직도 헌터 부족으로 고통을 겪는 국가가 한둘이 아닌데 자기들 국력 키우기에만 급급하고 있는 거지.
"뭐, 우리도 여태껏 말 안 하고 있었으니 남말 할 처지는 아니죠. 국가 간 경쟁이 중요한 게 아니란 거 아저씨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실험 결과는 어떻답니까?"
-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각국에서 사이클롭스 베어 잡는 영상들을 WHO에 줄줄이 보내더군. 한 달 동안 인증받은 S급 헌터만 100명이 넘어가네. 아쉽게도 우리 쪽엔 놈들이 뜨지 않아서 인증을 못하고 있어. 그... 가장 최근에 인증한 사람이 유가령이라고 중국 내에서 서열 21위라는 여자애인데 C급 결정체 한 개에 A급 결정체 세 개를 먹었다 하더라고.
"100명이라고요? 그 정도 수량의 결정체가 있었답니까?"
분명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블랙마켓 내 '사이클롭스 베어' 결정체의 유통 수량은 3개뿐이었다.
그런데 100명 이상이 인증했다면, 한 달 내에 그놈들이 100마리나 등장했다는 사실.
또 S급 헌터가 되기 위한 최소 조건이 A급 결정체 3개라 가정한다면... 어마어마한 수량의 최상급 결정체가 있었다는 소리인데.
- 다들 몰래 사냥해온 거겠지. 언론이랑 정보 통제해가면서, 그러니 여태껏 시중에 풀린 게 그거밖에 없었던 거야. 국가 차원에서 구매해대니 가격도 말이 안 됐던 거고. 또 최근에 유난히 A급 균열 등장 빈도가 높아졌어. 조만간 뭔 일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야.
하긴 당장 쿠바만 해도 A급 결정체 38개를 구했는데... 지구 전체로 따지면 엄청난 수량의 결정체가 나왔을 것이다.
최강수의 음성이 불안한 듯 떨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 아, 현동이랑 태준이도 한계치까지 최상급 결정체를 먹여뒀네.
"성과는 괜찮은가요?"
- 둘 다 각성 능력만큼은 엄청나. 아직 실전 경험은 없고, 내가 지도해주고 있는데 이젠 감당하기 힘들 정도야. 나중에 자네가 와서 판단해보게나.
실전 경험이 없다니...
복귀하면 경험부터 시켜야겠다.
아직 서인도 제도에 처리하지 않은 몬스터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등급이 오른 이유가 단순히 S급 헌터가 많아져서입니까?"
- 아, 그게... 금지의 땅 원정을 둘이서 성공했다는 사실이 퍼졌어. 알게 모르게 위성으로 다 추적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측에서 언론은 통제 했지만, 아마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아, 그럼 쿠바를 처리한 공로로 등급상승시켜준 겁니까?"
-그렇지.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업적이지 않나. 버나드가 강력 추천하더라고... 그 사람 예전부터 그랬지만 자네의 엄청난 팬이더군.
흐음, 딱히 좋은 소식은 아니다. 지금 내게 SS급이란 수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그렇군요. 그리고 다른 국가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결정체 많이 구하지 않았습니까, 아 결정체는 잘 도착했습니까?"
-아... 사실... 그게 골치 아프게 됐어.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선소연도 놀란 듯 움찔했다. 웃긴 건 씻기고 있던 물도 같이 움찔한다는 것.
"아저씨! 설마 비행기 추락이라도 한 거예요?"
"나쁜 소식이 결정체 관련된 거였습니까?"
우리가 흥분하자 최강수가 진정시켰다.
- 아니, 결정체는 잘 도착했으니 걱정 말게. 그게 문제가 아니라 미국이랑 멕시코 측에서 항의를 해왔어.
"어떤 항의요?"
- 그쪽들 입장에선 쿠바인들을 수용해줬단 이유로 결정체의 권리를 주장하는 거지. 사실상 S급 헌터들을 키워내고 있었으니 금지의 땅도 정복 가능할 거라 예상하고 준비했을 거야. 근데 자네가 가서 싹 쓸어먹어버리니 배가 아픈 거고.
"말이 안 되는데요? 제가 떠나기 전만 해도 핵 쏘려고 했던 나라 아닙니까."
"참나,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격이네요."
선소연의 물줄기가 점점 가라앉았다. 이제 거의 다 씻겨가는 듯 물이 서서히 사라진다.
- 막상 눈앞에 있던 먹기 좋은 떡에 콩고물까지 싹 다 사라져 버리니 욕심부리는 거야. 나도 강력하게 항의했는데, 결국 결론이 안 났어. 버나드도 국가 간 입장이라 그런지 뭐라 편들어주지는 않더라고. 어쨌든 조심하게.
"뭘 조심합니까?"
"그러게요. 저들이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 아마 그쪽에서 사람을 보낼 거야. 협상을 시도하겠지.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금지의 땅을 둘이서 처리한 자네들한테 협박같은 건 안 할 걸세. 기껏해야 귀화 요청이나 하겠지.
"걱정 마십시오. 귀화 생각은 없습니다."
- 알고 있네. 다만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멍청한 짓거리를 하지 않길 바랄 뿐이야.
이곳은 미국 네바다주.
호텔 신분 검사를 뱃지로 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서 머물고 있는지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직 결정 나지 않은 사항이라면,
직접 찾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스르륵-
어느새 몸을 다 씻긴 물기가
최소한의 수분만 남기고 증발했다.
굳이 샤워를 안 해도 개운하니 좋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저희도 어느 정도 휴식했으니 곧 복귀하겠습니다."
- 알겠네. 조만간 보자고. 그리고 자네들...크흠...
"네. 또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 나도 각성자일세. 자네들이 뭐 하고 있는지 다 들린단 말이야. 한창 젊은 혈기를 주체 못 하는 건 이해한다만 어찌 전화하면서까지! 적당히들 좀 하게, 적당히. 흥.
응? 그게 무슨 말이지 갑자기?
뚝-
최강수가 우리를 꾸짖더니 전화를 끊었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저씨가 갑자기 왜 저러시지?"
"그러게요.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
***
호텔 앞.
쇼핑은 포기하고 리노 국제공항으로 가기 위해 뜨려 하는 순간 검은 리무진 하나가 도착했다. 차 문이 열리고 깔끔한 정장을 입은 주름 가득한 노신사와 건장한 체격의 남성 10명이 내렸다.
최강수의 예측은 정확했다. 미국 측 인사가 찾아오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옆에 있는 선소연이 물었다.
"만나실 거예요?"
"그러려고."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를 순식간에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괜히 미국 측에서 공항 편을 막아놓으면 복귀 시간이 더 길어질 수 있기도 했고,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노신사는 한눈에 날 알아보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미스터 강. 반갑습니다. 네바다 주지사 브라이언 산도발입니다."
"강현입니다."
고민하다 악수를 받아 주었다.
아직까지 적대적이지는 않으니까.
그나저나 시장도 아니고 주지사 급이 행차하셨다니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금지의 땅 노획물에 관해 미국 측의 입장을 전달하려 합니다."
"전달이라... 뭐, 들어는 보겠습니다."
"우리는 쿠바 몰락 이후 난민 500만 명을 수용했습니다. 막대한 돈이 소모되었지요.
지원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봤지만 아직도 많은 인구가 길바닥에 나앉아 있습니다."
"그래서요?"
"미스터 강이 도의적 책임이 있다면, 거기서 얻은 결정체의 권리를 미국 측에게 넘겨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쿠바 정리에 대한 보수는 넉넉하게 지급해드릴 계획입니다."
적대적이지만 않았지,
하는 말은 순 깡패와 다름없었다.
애초에 '보수'라는 말은 의뢰를 했을 때나 지급하는 것 아닌가. 내 힘으로 얻은 결정체들을 겨우 그런 이유로 날로 먹겠다니.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땅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미국 입장에서는 인구가 늘어나면 좋은 거 아닙니까? 노동력도 풍부해지고, 소비도 늘어날 텐데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최근 국세 비중을 헌터 산업에 두는 바람에 쿠바인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최소한의 지원이 있어야 그들도 일을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그런 것까지 제가 일일이 신경 써줘야 하는 겁니까?"
"그건 유감입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상부의 뜻이 그렇습니다."
"......"
슬슬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앞에선 도의를 운운하더니 결국은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겠다는 태도다.
만약 미국 측에서 쿠바인들을 다시 본거지로 독립시켜주고, 쿠바 사람들을 위해 지원을 해달라 요청했으면 어느 정도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미국으로 받아 들여놓고, 책임은 나보고 지라는 건 말이 안 된다.
내가 대답이 없자 주지사가 말을 이었다.
"정 그러시다면 다른 방안도 있습니다. 두 분이서 미국으로 귀화하십시오. 물론 최대한의 대우와 결정체의 권리를 일부 인정해드리겠습니다."
"......"
역시 세상은 진부했다.
어찌 한치의 예상도 틀리지 않는 걸까.
이들은 애초에 쿠바 사람이 어떻든 상관이 없었단 거다. 보수나, 귀화 조건 같은 건 안 봐도 비디오겠지. 애초에 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바로 본론으로 가기로 했다.
과연, 거절 시 협박을 할 것인가
순순히 보내줄 것인가.
애초에 남성 10명을 데려왔다는 것 자체에 답이 있었지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다.
"둘 다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정말 안타깝지만... 대금이 지불될 때까지 자국으로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쯧. 결국 협박인가.
이건 둘 중 하나다.
상부가 멍청하다던가.
아니면 힘에 자신이 있다던가.
... 둘 다인가?
나는 싱긋 웃으며 주지사에게 말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리고, 자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이런, 젊은 사람이라 그런지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십니다. 조금 더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해봅시다. 우리는 그대와 척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척지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저급한 협박을 하는군요. 더 이상 듣고 싶은 말은 없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소연의 손을 잡고 뒤를 돌았다.
그러자 10명의 건장한 양복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가슴에 달린 황금빛 뱃지를 보니 전부 S급 헌터들이다. 주지사가 미소를 그리며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와 겁박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때까지, 자국으로 보내드릴 수 없다고."
"재미있게 됐네요."
"자신감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자들은 최소 최상급 결정체를 4개씩 먹인 미국 최정예 헌터들입니다. 아무리 그대들이라 해도 상대하기 힘들 겁니다. 괜히 소란 피우고 싶지 않군요."
선소연이 심각한 분위기를 읽고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뭐라는 거예요?"
"우릴 미국에 강제로 가두겠다는군."
"... 헐, 겨우 쟤네들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