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락의 도시. (3)
나는 당황했다.
생전 처음으로 받아본 고백이었다.
남중. 남고. 육군사관학교. 군대.
노력하지 않으면 여자라는 생물과 말도 섞어보기 힘든 환경이었다.
물론 연애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본업에 충실하느라 기회가 없었을 뿐.
"......"
선소연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겠지.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하루만, 아니 한 시간만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싫어요. 여기서 대답해주세요."
그녀가 가까이 붙어 고개를 들었다.
도가 튼 선수처럼 밀어붙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한 번 더 당황했다.
쿵- 쿵-
내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멍했던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서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홍당무처럼 빨개진 볼.
떨리는 입술.
불안정해 보이는 숨결.
그렇다.
담담한 척했을 뿐.
그녀는 결코 고백에 능숙한 것이 아니었다.
용기를 내어 과감하게 내지른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를 좋아해서인지,
당황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더 고민하고 싶었다.
이 감정에 치우쳐 제대로 고민하지 않은 채 승낙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꼭 지금 대답해야 하는 거야?"
"네. 저 지금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거든요? 불안하기도 하고요. 빨리 안심시켜주세요."
"......"
대답이 없자 그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거... 절인가요?"
한없이 진지한 눈빛.
살짝 맺혀있는 물기.
결국, 솔직하기로 했다.
"사실... 고백받아본 게 이번이 처음이야."
"......"
"솔직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그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내 몸에서 떨어졌다.
"말도 안 돼요. 서른하나, 오빠 외모에 여자가 없었을 리는 없는데... 그럼 그동안 연애는 먼저 고백해서 한 거예요?"
"고백해본 적도 없다."
"그... 그럼 설마."
충격 먹었다는 듯 눈동자가 커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설아 씨 추측이 진짜란 거예요? 분명 고자는 아닌 거 확인했었으니까..."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남... 남자 좋아하시는 거예요?"
난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 거야.
그리고 고자가 아닌 건 언제 확인했단 거지?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말도 안 되는 오해는 빨리 풀어줘야 했다.
"그게 아니라 여태껏 연애 경험이 없었다는 말이지. 건강한 성인 남자야."
사소취대(捨小取大)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한다.
그녀가 납득할만한 이유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서른하나 먹을 동안 모태솔로였다는 어찌 보면 부끄러울 수도 있는 사실을 알린다.
"아아... 그런 거구나, 흠흠... 다행이네요."
선소연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어느새 여유를 찾은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눈가에 맺혔던 물기도 사라져있었다.
"그러니까 오빠는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초짜였다는 거네요."
"... 그렇지."
팩트로 심장을 확 치고 들어왔다.
"와, 그간 납득 안되던 것들이 한 번에 이해됐어요. 저 그동안 자존감 엄청 떨어져 있었던 거 아세요?"
"응?"
"설아 씨 조언대로 오피스텔에 찾아가도 안 넘어오지, 술 취한척해봐도 끄떡없지... 제가 매력이 없는 건가 날마다 고민했다구요."
이미 고백했다는 건지 그녀는 부끄러운 기색 없이 그간 느꼈던 심정을 토로했다.
나도 충격이었다.
그녀가 찾아온 게 강설아의 수작이었다니.
그리고 술 마시고 비틀거리던 게 다 연기였다는 말인가. 하긴, 물의 힘을 다루는 그녀가 고작 알코올에 지배당한다는 게 어불성설이긴 했다. 순종적인 초식동물인 줄로만 알았는데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였다.
"그리고 제 고백에 당황하셔서 그렇게 심장이 뛰시는 거구요? 아이... 귀여워라."
"심장은 무슨... 건방지게."
"제 귀에 정확히 들리는데요? 쿵쿵 뛰는 소리."
"......"
하긴, 내 귀에도 들리는데 그녀 귀에 안 들릴리 없었다. 처음으로 각성 능력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그녀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또 키스하려는 건가?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까 전에야 기습이었다지만,
또 멍하게 당할 순 없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몸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아니, 무의식적으로 피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빌어먹을.
나는 곧이어 느껴질 촉감에 대비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안면을 스쳐 지나갔다. 선소연이 노린 곳은 입술이 아니라 귓가였다. 간지러운 숨결과 함께 들려오는 속삭임.
"저 오늘 밤은 그냥 못 넘어가니까, 그전에 제대로 대답해 주셔야 해요. 초짜 오빠."
"......"
그녀의 과감한 귓속말에 할 말을 잃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무려 여섯 살 연하.
선소연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휘둘려버린 것이다.
제기랄.
***
"밤하늘이 예쁘네요."
"그러게."
호텔 옥상 테라스.
우리는 칵테일을 하나씩 들고 원형 썬베드에 누워있었다.
선소연의 고백 이후 숙소로 돌아왔고, 미슐랭 요리사가 직접 해주는 최고급 코스요리와 와인을 즐겼다. 식사 후에는 개인 바텐더가 들어와 여러 종류의 칵테일을 만들어 놓고 사라졌다. 그녀는 만족스러워했지만 내 머릿속은 엉켜있는 실뭉치처럼 복잡했다.
평생 여자 하나 없던 내가 누군가랑 사귄다니...
연애에는 자신이 없었다.
데이트, 기념일 이런 게 뭔지도 몰랐고,
인터넷에서 우연히 봤던 여자의 언어들.
솔직히 무슨 말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 들었다. 이런 내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 리 없지.
또 외계 종족이 침공한다면?
힘을 얻었다지만 놈들이 얼마나 강할지 모른다. 서로에 대한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가능성도 있다.
그녀는 앞으로의 행보에 꼭 필요한 존재다. 혹여나 연애에 실패해 사이가 서먹해지면 곤란해질 수도 있다. 또 단체도 만들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관계가 깊어지게 된다면... 그건 좋은 건가?
"무슨 생각을 그리해요. 아까부터."
"아니야. 별생각 안 했어."
뇌가 꼬여서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 그걸 그녀에게 그대로 말해줄 순 없었다.
"별이 많긴 하죠?"
"......"
가벼운 언어유희.
조용한 분위기를 띄워보고 싶은 그녀의 노력이 보였다.
이 넓은 공간에 둘만 있으니 적막했다.
은은한 조명이 공간을 비췄다.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들의 향연.
"쏟아질 것 같네."
"그쵸. 분명 저 별들 중에 외계 종족이 사는 곳도 있을 거예요. 걔네도 우리를 볼 수 있을까요?"
"글쎄. 별은 항성이니까 생물이 못 살지 않을까? 지구도 안 보일 테고..."
"앗. 그런가요?"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칵테일을 홀짝거렸다.
"별 보니까 옛날 생각나네요."
"어떤 게?"
"데뷔해서 인기 많아지면 사람들이 '스타'라고 부르잖아요. 연습하다 지칠 때마다 저 별들을 보면서 꿈꿨거든요. 나도 저렇게 빛나고 싶다... 하면서요. 흠흠."
"우린 비슷한 게 많구나. 나도 스타가 되는게 목표였거든. 군대에선 장군을 '스타'라고 부르니까."
"와- 그럼 우리 같은 꿈을 꿨던 거네요? 신기하다."
그게 그렇게 되나?
대답을 마친 그녀가 썬 베드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내가 누워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같이 볼까요?"
"그러든지."
그녀는 좁은 자리를 꾸역꾸역 들어와 내 품에 안겼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제 대답을 해달라는 거겠지.
난 인정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백기를 들어버렸다.
저렇게 나오는데 어떤 남자가 버틸 수 있으랴. 그런데 어떻게 말해줘야 하지?
한참의 침묵 후에 그녀가 또 말을 꺼냈다.
"전 지금도 괜찮아요. 꼭 데뷔해서 스타가 되라는 법도 없잖아요."
"그치. S급 헌터 타이틀을 달았으면 이미 스타나 다름없으니까."
"그게 아니라요. 오빠한테만 빛나 보이면 된다구요. 으엑, 이건 좀 오글거렸다."
"잘 아는구나."
내 대답에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오늘 밤 다 지나가게 생겼네요. 언제까지 애타게 하실 거예요?"
"......"
그래.
이제 대답해줄 때가 됐다.
"... 연애가 능숙하지 못할지도 몰라."
"알고 있네요. 저라고 뭐 능숙하겠어요?"
"지금보다 관계가 더 악화될 수도 있겠지."
"글쎄요. 그런 게 두려우면 아무것도 시작 못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오른손으로 내 뺨을 돌려 시선을 맞췄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건방진 미소를 보내며 속삭였다.
"이제 그만 쫄아요. 겁쟁이 씨."
"......"
저렇게 도발하는데 이젠 모르겠다.
난 그녀의 얼굴을 잡고 그대로 돌진했다. 아까와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 아닌 제대로 된 키스.
선소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지켜보며 부드러운 감촉을 즐겼다. 한참 후에 입술을 떼자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와... 초짜 맞아요? 거짓말이죠?"
그녀의 볼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작게 웃었다.
순 선수같이 굴어놓고는 하는 행동이 너무도 귀엽지 않은가. 그대로 다리를 들어 올려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내 가슴에 눌려있는 그녀의 윗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왜. 이제 시작인데. 쫄았어?"
"진...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먼저 유혹한 건 너잖아."
다시 한번 키스.
이 정도면 당황했겠지?
그간 나를 제멋대로 휘둘렀던 것에 대한 가벼운 복수였다.
입술을 떼자 그녀가 날 올려다봤다.
당황한 표정이 아니라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다리를 허벅지에 꼬아왔다.
"... 그거 알아요? 우리 아무리 운동해도 안 지치는 거."
"......"
이런.
이번에도 완벽한 패배였다.
***
"한 시간 지났어요. 일어나요."
비몽사몽.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곤한 눈꺼풀을 들었다.
날이 밝아져있었다.
각성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피곤함을 느꼈다. 그녀도 나도 비밀스러운 세계에 첫눈을 뜬 사춘기 남녀 마냥 서로를 탐했었다.
처음엔 좋았다.
궁합도 찰떡같았다.
첫 경험이라더니 아파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배려해준답시고 천천히 했지만,
갈수록 강도는 격해졌다.
시간이 흐르자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잠깐의 쉬는 시간도 주지 않고 엉겨왔다. 결국 한 시간만 쉬겠다는 약조를 받아내고 잠을 청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네. 이제 10차전을 개시할 시간입니다. 그동안 참았던 거 이자까지 받아낼 거예요. 아직 이틀이나 남았잖아요."
"......"
선소연이 누워있는 내 위로 올라탔다.
그녀의 맹랑한 몸짓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남자는 여자와 다르게 연속으로 하게 되면 무리가 따른다. 그것을 그녀는 알까...
이대로는 큰일이다.
휴식을 하러 와서 말라죽을 수는 없었다.
"잠깐."
"왜요?"
그녀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라 말해야 하지?
힘들다고 말하기엔 자존심이 상한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서 돈을 쓰자고 하기엔 어떠한 변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눈빛이 자동으로 주눅 들게 했다.
"할 말 없으시면 계속할게요?"
"......"
결국, 그녀의 공세에 함락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포기하고 몸에 힘을 뺀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리-
구세주와 같은 울림.
내 스마트폰이었다.
그녀가 멈칫했다.
"전화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이따가 받으시면 안 돼요?"
"중요한 전화일 수도 있잖아."
선소연은 한숨을 쉰 후 내 스마트폰을 가지러 갔다. 폰을 확인하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나에게 내밀었다.
"최강수 아저씨네요. 자요. 하여간 이 아저씨는 타이밍을 몰라..."
선소연이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난 쓸쓸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아저씨."
- 아침부터 미안하네, 바쁜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 그···.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뭐부터 들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