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락의 도시. (2)
"우와..."
이른 저녁.
눈앞의 화려한 건물을 바라봤다.
무려 25층짜리 5성 호텔.
고풍스러운 서양식 디자인에 근처 있는 다른 건물들보다 품격 있어 보이는 인테리어는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옥상에는 'CASINO'라고 적혀있는 전광판이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 정말 여기서 머무는 거예요?"
"왜. 돈 쓸 생각에 벌써 들떴어?"
"아니... 이런 곳은 처음이라서요. 괜히 주눅 드네요."
선소연의 좁은 어깨가 더 쪼그라들었다.
이해가 갔다.
나도 31년 동안 이런 곳은 처음이었으니까.
"이런 곳에서 지내려면 얼마나 내야 해요?"
"방마다 다르겠지. 일단은 아저씨가 예약해줬으니까. 들어가서 확인해보자."
마이애미에서 연락을 받은 최강수는 내 설명을 듣고 즉시 호텔 하나를 예약해 줬다.
가장 비싼 곳으로 알아서 해달라 했는데,
이렇게 멋들어진 건물일 줄이야.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가 쓰기로 한 돈은 통장에 남은 13억.
3일 동안 다 쓰기 위해서는 최대한 사치스럽게, 호화롭게 지내야 한다. 항상 근검절약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이 돈을 다 쓸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했다.
호텔 정문에 도착했다.
후줄근하게 입은 서양인들과 중국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간간이 헌터 뱃지를 달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화려한 건물에 비해 사람들 행색은 초라한데요?"
"카지노호텔이잖아. 이곳에서 숙박하는 사람들은 극소수 일 거야. 다 여행객들이거나 도박꾼들이겠지."
건물 내부도 외부 못지않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
장대한 대리석 계단.
지하 전체가 카지노로 이루어져 있었고, 1층과 2층은 각종 명품 매장과 고급 레스토랑들이 입점해 있었다.
"3층 이상부터 객실인가 보네요?"
"우선 체크인부터 하자."
우리는 지하로 향하는 수많은 인파를 벗어나 프런트로 이동했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방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나는 영어로 응대했다.
"우와- 영어도 할 줄 아세요?"
"파병 갈 일이 많다 보니 기본적인 부분만."
선소연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다른 국가 특수부대원들과 합동 훈련을 하다 보면 다들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할 수 있게 된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는 우리의 옷차림은 허름했지만 직원은 친절하게 웃으며 능숙하게 대처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강 현 입니다."
모니터에서 이름을 찾던 점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 로열 스위트 고객님이셨군요. 예약 확인되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직원은 말을 더듬었다. 로열 스위트가 대체 어느 정도길래.
"고객님. 로열 스위트는 선 결제하셔야 합니다. 대신 하루 동안 숙소 내부에서 이용하는 모든 서비스는 무료로 제공됩니다. 혹시 신분증 있으십니까?"
"그럴게요. 신분확인이랑 결제 전부 이걸로 해주세요."
주머니에서 황금빛 뱃지를 꺼내 넘겼다.
그러자 직원의 눈이 한 번 더 커졌다.
저러다 눈알 빠지겠다.
"S... S급 헌터?"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7만 달러 결제해드리겠습니다."
7만 달러.
우리 돈으로 대략 8,000만 원.
고작 호텔에서 하루 묵는데 들어가는 돈 치고는 과했다. 선소연도 놀란 듯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래도 결제해야지.
생각보다 13억.
빨리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제가 완료되자,
직원은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결제 완료되었습니다. 저희 직원들은 항상 두 분께 최상의 서비스로 봉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키를 받고 대기하자 연락을 받은 듯 총 지배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가방은 저에게 주시면..."
"아, 괜찮습니다. 가방은 저희가 들고 가겠습니다."
값비싼 결정체들이 가득 들어있기에 남에게 맡기기 꺼림칙했다. 그는 우리를 전용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이 엘리베이터는 오직 로열 스위트 고객님만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런가요?"
"네. 최고층을 제외한 각 층에는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어 다른 고객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 내부 버튼 판넬에는 'B1, 1, 2, 25.' 숫자 4개가 다였다. 오직 25층 꼭대기를 이용하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조용한 기계음과 함께 승강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적막함 속에서 선소연이 속삭였다.
"이거 완전 돈 낭비 아니에요?"
"나도 정신없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왜 부담스러워?"
"아뇨. 완전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는데요?"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우리 대화의 어감을 눈치챈 지배인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스위트룸으로 알려진 이곳은 저희 호텔의 상징으로서 25층 전체가 펜트하우스로 되어있습니다. 개인 요리사와, 마사지사가 상시 대기하고 있으며, 안내 책자를 보시면 상상이상의 서비스들이 설명되어 있을 겁니다. 물론 전부 무료로 제공되고요. 만족하실 것을 절대 확신합니다."
"......"
그의 말에서 호텔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띵동-
도착 알림과 동시에 지배인이 인사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길..."
"감사합니다."
***
"엄청 넓어요!"
도착한 25층은 그야말로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적어도 수천 명이 이용하는 건물 하나의 층이 통째로 이어져 있었으니 당연히 넓을 수밖에 없다.
로열 스위트가 한 층을 통째로 빌리는 거였을 줄이야. 이런 곳을 아저씨는 도대체 어떻게 예약한 거지?
우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은한 조명.
커다란 풀장.
각종 아름다운 미술품들.
아쿠아리움에 온듯한 수족관.
고급 위스키와 와인들이 나열되어있는 개인 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벽과 기둥들에, 라스베이거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테라스까지.
"이게 다 뭐예요..."
"뭐긴, 우리가 지낼 숙소지."
선소연은 입을 딱 벌린 채 다물지를 못했다. 그녀의 눈이 핑글핑글 도는 게 느껴졌다. 나도 태연한 척했지만 자연스레 몸이 굳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
그러나 그 가격은 우리가 가진 자산의 티끌만큼도 안된다. 이제서야 부자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숙소 곳곳을 전부 확인하는 데만 10분이 넘게 걸렸다. 구경이 끝난 후 선소연은 침실에 있는 대형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푹신해요."
"확실히 돈이 좋긴 좋네."
"이제 익숙해져야죠. 아직 12억 정도 남았잖아요."
나도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 옆 탁자에는 지배인이 말했던 안내 책자가 있었다. 그녀가 누운 상태로 냉큼 집어 펼쳤다.
"어떤 서비스가 있을까요? 상상 이상이라던데. 돈 쓴 만큼은 다 해보고 가야죠!"
"그래보자. 시간은 많으니까."
"뭐가 시간이 많아요! 24시간 안에 8000만 원어치를 뽑아내야 하는데. 어...? 근데 이게 다 뭐지."
그녀가 화들짝 놀라 책자를 덮었다.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뭔데?"
"뭐... 뭔가 야리꾸리한 냄새가 나는데요?"
"줘 봐."
호기심에 책자를 받아 펼쳤다.
그곳에는 서양 미남, 미녀들이 나체인 상태로 매력적인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 인물 옆에는 각종 변태적인 플레이 가능 여부가 체크리스트 상태로 적혀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상상이상이었다.
"후우... 라스베가스가 왜 환락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네."
"와- 첫 해외여행부터 신세계를 알아버린 느낌이네요. 저 지금 엄청 놀랐어요."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는 곳이야. 밤 시중부터 그 이상의 것들까지."
"......"
"다 해볼 거라며, 어차피 무료인데 세트로 불러볼까?"
"장난치지 마세요! 제 첫 경험을 이런 사람들이랑 보내고 싶진 않네요. 오... 빠라면 모를까."
갑작스러운 당돌한 말에 당황해서 그녀를 쳐다봤다.
두 번째로 보는 장난스런 표정이었다.
피식 웃었다.
"그런 예의 없는 고백은 처음 받아보네."
"걱정 마세요. 저도 농담이었으니까."
서비스를 받기엔 글러먹었다.
이제, 여기서 뭐 하지?
돈을 쓰려면...
"카지노라도 가볼까?"
"으음..."
그녀가 고민하는 듯했다.
"왜. 안 땡겨? 그래도 라스베가스에 왔는데 카지노는 경험해봐야지."
"사실 예전에는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별로 흥미가 안 생겨요. 거기 있는 돈 따봐야 균열하나 처리하는 게 더 이득이잖아요."
"그럼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네! 사실 이미 알아봐놨어요. 음... 한 시간 정도 남았네요."
"어딘데?"
"벨라지오 분수쇼요! 시간 맞춰 가야 한다니까,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
"돈 쓰는 게 이렇게 쉬울 줄은 몰랐군."
"그래도 이렇게 입으니까 좀 사람 같네요."
벨라지오 호텔에 가기 전,
우리는 옷부터 사 입었다.
나는 제냐 투피스 포멀 슈트.
그녀는 샤넬 레이스 원피스에 리본 재킷.
합쳐서 약 5,000만 원.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가격 생각하지 않고 고르다 보니 나온 결과였다.
옷만 샀기에 망정이지, 각 매장 진열장에는 눈 돌아가는 가격 태그가 붙어진 액세서리들이 즐비했다. 이로써 돈을 다 못쓸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쇼핑은 나중에 제대로 하기로 하고,
우선은 시간 맞춰 벨라지오에 왔다.
"호수가 작네."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15,000평짜리 호수를 두고. 이 정도면 엄청 큰 거죠."
"그런가?"
"네. 그리고 예쁘기도 하구요. 자 이리 와요. 5분 후에 시작한대요."
세계 3대 분수쇼.
라스베가스에 왔으면 꼭 봐야 한다고 그녀가 주장했다. 이제 곧 시작되려는지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녀는 잘 보이는 자리로 가야 한다며 나를 이끌었다.
"솔직히 균열에 있던 그 호수에 비하면 볼품없지 않나?"
"아핫."
호수 구석 울타리에 자리를 잡은 선소연이 슬그머니 옆으로 붙어 섰다. 그녀의 팔뚝과 내 팔뚝이 맞닿았다.
"그때랑은 분위기가 완전 다르잖아요."
"아... 그때는 낮이었고, 지금은 밤이어서?"
"하여간 옛날부터 느꼈지만 정말 감수성 없다니까요. 눈치도 없으시고."
"호수를 바라보고 느끼는 솔직한 감정을 말했는데 감수성이 없다니. 그러면 억지로 감탄을 해야 하는 건가?"
내가 받아치자 그녀가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해봐."
"혹시 과거에 여자한테 크게 데인 적 있으세요?"
갑자기 튀어나온 뚱딴지같은 발언.
여기서 그런 질문을 왜 하는 걸까.
난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야?"
"설아 씨가 그러던데요? 자기 오빠 고자 아니면 게이인 줄 알았다고. 가족들한테 연애하는 모습 한 번도 안 보여줬다면서요?"
선소연이 키득거렸다.
"하긴, 제가 보는 오빠도 그런걸요."
"너무 자세히 알려 하지 마라. 다친다."
내 엄포에 그녀가 코웃음쳤다.
"흐응- 그러셔요? 그럼 균열에서 맨날 알몸으로 붙어 있었고, 오빠 오피스텔에서도 같이 껴안고 자고, 맨날 같이 다니고, 오늘 여행 와서까지 방도 같이 쓰는 우리는 무슨 사이에요?"
"......"
그러게 우린 무슨 사이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내가 말이 없자 갑작스럽게 마이크에서 안내음이 들려왔다.
[ 아, 아, 분수쇼를 찾아와 주신 신사 숙녀 여러분들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오늘 열리는 쇼는 갑작스러운 기계 결함으로 인하여 진행하지 않습니다. ]
방송은 총 네 번 반복되었다.
갑작스러운 행사 취소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고장이면 미리 알려주던가. 괜히 시간 낭비했네."
"아씨, 내일이면 복귀해야 하는데 못 보고 가게 생겼네."
"다시 카지노나 가자."
불평을 토해내며 뭉쳐있던 인원들이 점점 흩어져 갔다. 옆에 있던 꼬마 아이는 크게 기대했던 모양인지 우렁차게 울어 젖혔다.
나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며 선소연에게 말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운이 안 따라주네. 내일 다시 올까?"
"아니요. 말 돌리지 마세요."
선소연이 뾰쪽하게 말했다.
얘가 아까부터 왜 이렇게 날카로운 걸까.
"참 답답해요."
"뭐가?"
"오빠는 맨날 쫄지 말라고 하면서 실상은 무모하기만 한 겁쟁이잖아요."
뉘앙스가 묘하게 공격적이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선소연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호수를 가리켰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으로 눈길이 갔다.
"그래서 이번엔 제가 용기를 내보려고요."
그녀가 빠르게 손을 떨쳐냈고 호수 중앙에서 커다란 물기둥이 생기기 시작했다.
실망해서 떠나려던 관객들이 어, 어...? 하며 다시 호수에 집중했다.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고 멍하니 호수를 쳐다봤다.
이윽고,
그 물기둥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촤르르르륵-
"우... 우와."
"저, 저게 뭐야."
"이건 분수가 아니라 그냥 마법이잖아..."
물로 이루어져 관광객 사이를 누비는 새와 나비들. 폭죽처럼 터지다가도 다시 모여 허공을 수놓는 커다란 용.
기존 분수쇼보다 수준 높고 화려한 물줄기의 향연에 관광객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당황했던 진행팀도 정신을 차렸는지 껐던 조명을 키고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눈치가 대단했다.
나도 어느새 구경꾼이 되어 그 아름다운 광경에 감탄했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분수쇼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잘했어. 소연...?"
칭찬하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다가오는 선소연의 얼굴.
그녀의 포근한 숨결이 느껴졌다.
쪽-
입술에 느껴지는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
"......"
아주 잠깐의 입맞춤.
선소연이 내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갑작스런 당돌한 기습에 정신이 멍해졌다.
흘러나오는 음악.
밝은 오색 빛깔 조명.
호수 위를 수놓는 아름다운 물방울꽃.
그러나 시야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선소연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차분한 기색과 달리 그녀의 볼은 익은 홍씨처럼 붉었다.
"이번엔 예의를 갖출게요."
"....."
"저 오빠한테 호감 있어요. 아니... 사실 예전부터 좋아했어요. 많이."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이제 제대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