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락의 도시. (1)
이른 저녁 공항 활주로.
비행기 앞에서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냉동창고에 보관된 시원한 맥주와 남은 식량들을 꺼내와 펼쳤다. 물론 복귀할 때 먹을 식량은 남겨두고.
"금지의 땅 원정 성공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치얼스!"
주유라의 호기로운 선창에 대원들도 신나게 후창했다. 시간이 흐르고 술기운이 올라오자 다들 기분이 좋은지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이번에 받은 결정체로 집이랑 차부터 바꾸려고."
"난 가족들한테 하나씩 주고 남은 건 내가 먹어야지."
내가 준 보너스로 행복 회로를 돌리는 자들도 있었고...
"캬- 날씨 좋다. 선셋도 끝내주네."
"나중에 여친이랑 여행 오고 싶어."
이제서야 쿠바의 진정한 경치를 즐기는 자들도 있었다. 콜럼버스가 첫발을 내디디며 "읏차!" 했다는 나라. 괴물들이 없는 '금지의 땅'의 풍광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난 신나게 즐기는 그들을 뒤로하고 바닷가가 잘 보이는 자리로 이동했다.
카리브해의 쪽빛 파도.
공항 옆 바다에 펼쳐지는 장엄한 노을.
2월임에도 선선하게 부는 따듯한 바람.
피로를 풀기에는 제격이었다.
지고 있는 해를 두 눈에 가득 담으며 맥주를 비워냈다. 마신지 얼마나 됐다고 캔이 텅텅 비었다.
다시 가져와야 하나?
"자요."
별안간 차갑고 촉촉한 무언가가 내 이마를 덮었다. 선소연이 건네는 캔맥주였다. 난 머리에서 그것을 받아 내렸다.
"많이 마셨어?"
"아니요. 씻고 오느라 늦었어요. 이제 마시려구요."
선소연이 내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옷을 갈아입었는지 어깨와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지점을 겨우 가리고 있는 천 쪼가리. 난 그 모습을 힐끗 흘겨보았다.
"그런 건 언제 가져왔어?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야?"
"열대지방에선 원래 이렇게 입는 거 아니에요? 아, 저 해외 나와본 적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데뷔한 언니들 보면 뮤직비디오 촬영갈 때 이렇게들 입던데..."
"그건 영상이니까 그렇게 과격하게 입는 거고."
"영상이 유행을 선도하는 거예요. 괜히 그런 옷을 입히겠어요? 다 이뻐 보이니까 그런 거지."
나는 그녀의 주장에 미소를 지으며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녀의 패션 스타일에 참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쨌든 수고했다."
"뭘요?"
"쉬운 일 아니잖아. 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살육인데."
"아."
선소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렵다고 느낀 적은 없었어요. 굳이 말하자면 곤충 죽이는 느낌이랄까. 균열에서 적응할 만큼 했잖아요."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힘들면 말해야 해."
"그냥 돈이라고 생각하니까 편하더라구요. 짠 하실래요?"
"좋지."
나와 선소연은 캔을 부딪쳤다.
목 넘김이 부드러웠다.
순간 유행을 선도한다는 그녀가 보는 내 패션 감각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맛있네. 그나저나 내 옷은 어때?"
"오빠 옷이요? 으음... 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말해봐."
선소연이 갑자기 새끼 고양이처럼 히죽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장난기 어린 얼굴이었다.
"완전 아저씨 같아요. 펑퍼짐한 긴 바지에 허름한 티셔츠만 걸쳐놓고는... 이런 걸 두고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하는 거예요. 균열에서 벗고 다니실 때가 훨씬 나았던 것 같은데요?"
"뭐라? 나도 영상에서 보고 사 입은 거야."
"네에? 무슨 김건모 선배님 뮤직비디오라도 보신 거예요? 원래 요즘 스타일은 노출을 확! 해줘야 한다구요. 그 좋은 몸을 두고 왜 이렇게 가리시는 거예요. 이번에 복귀하면 제가 옷부터 사드려야..."
따악-
선소연의 이마에 약하게 꿀밤을 먹였다.
어디까지나 장난스러운 손짓이었다.
"아야!"
그녀가 맥주를 놓고 두 손으로 머리를 과장되게 부여잡았다.
"아프잖아요! 머리카락은 여자의 생명이라구요."
"아프긴..."
말과 다르게 그녀도 실실 웃고 있었다.
그래. 아플 리가 있나.
괴물한테 맞아도 타격하나 없을 그녀일 텐데.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거기서들 뭐 하세요. 같이 한잔해야죠."
멀리서 주유라가 다가왔다.
"그래요. 청승맞게 혼자 노을이나 보고 있지 말고, 같이 마시러 가요."
선소연도 내 팔 옷깃을 끌어당겼다.
비행기 앞은 다들 취기가 올랐는지 후끈후끈했다. 기장들도 젊은 기운에 물들었는지 덩실덩실 춤추고 있었다.
"우우- 헌터님들 어디 갔다 오신 겁니까!"
"아아, 뜨거운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집니다!"
그들의 짖궂은 말에 우리는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합석했다.
"아, 선 헌터님!"
누군가 선소연을 불렀다.
조의진이라는 D급 헌터였다.
"네?"
"가수 지망생 출신이었다면서요. 노래 한 곡만 기깔나게 뽑아주실 수 있습니까!"
정확히는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긴 했지만.
조의진의 말에 나머지 대원들도 호응하기 시작했다.
"노래! 노래! 노래!"
"야. 조의진. 너... 선 넘었어. 지금."
옆에서 당황한 주유라가 나서려 하자,
"아니요. 괜찮아요 언니."
선소연이 당차게 그녀를 제지하고 나섰다.
"저 이런 거 거절 안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녀의 언급에 분위기는 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장들도 흥미로운 듯 물개 박수를 쳤다.
"우와아!"
"이야- 화끈하기는 강 헌터님 못지않으시다!"
나도 흥미가 일었다.
그녀의 노래는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쉿! 조용히 하시면 노래 불러드릴게요."
"우와... 읍!"
텁.
환호를 지르던 대원들이 입을 닫았다. 그녀의 제안에 야외무대에 적막이 흘렀다.
소리만 없었을 뿐 열기가 식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우리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촤르륵-
선소연은 손을 떨쳐내 마이크 모양의 물줄기를 만들어 냈다. 저것만으로도 대단한 퍼포먼스였다.
그녀는 물로 이루어진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읊조렸다.
"제가 부를 노래는..."
마치 도도하게 흐르는 용암처럼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에너지가 있었다. 자신의 행동 하나, 호흡 하나에 사람들이 집중하도록 만드는 힘.
대단했다.
연습생이면 저런 것도 배우나?
"이곳에 와서 떠올렸던 자작곡이에요. 짧아도 이해해 주세요."
자작곡.
하루 종일 괴물만 잡던 그녀가 곡을 떠올리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판이 깔리길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
무반주 상황.
기타나 피아노도 없이 목소리로만 듣는 그녀의 노래. 기대감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
"균열에 나온 후~
인연의 실을 마음에 감았네~"
선소연은 조금 뜸을 들인 후 노래를 시작했다. 모두가 그녀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실의 첫 번째 인이 풀리자~
가족과 친구의 실을 양 팔에 감았네~"
선명한 저음이 울려 퍼졌다.
음정 하나하나에 감정이 담겨있었다.
"두 번째 인이 풀릴 땐~
인류의 실을 두 다리에 감았네~"
덤덤하게 내뱉는 호흡.
음색이 깔끔하고 담백했다.
"세 번째 인이 풀릴 땐~
스스로의 인연을 목에 감았네~"
"......"
정적, 적막, 고요.
가사가 점점 기괴해져감을 느꼈다.
선소연은 노래를 잠시 멈췄다.
그러나 그녀가 모든 걸 붙잡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한 호흡 쉬고,
"그 사람은 그렇게 꼭두각시가 되었다네."
내뱉듯이 읊조리는 마지막 가사.
휘이잉-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고음도 없이 저음으로 끝난 짧은 노래.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무엇일까?
이미 들끓었던 열기는 가라앉아있었다.
"이게 끝이야?"
"그래도 목소리는 진짜 좋다."
대원들의 감상이었다. 선소연은 마이크 물줄기를 털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짧아서 죄송해요."
그녀의 인사에 대원들은 열심히 손뼉을 쳤다. 기대했던 것만큼 화려한 노래는 아니었지만 톤이나 음색이 딱 듣기 좋은 가슴을 울리는 노래였다.
난 궁금했다.
그녀가 어떤 감정으로 이 노래를 부른 것인지. 가사는 무얼 의미하는지. 그래서 내 옆으로 다가와 앉은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의미야?"
"그냥 오빠 생각하면서 부른 노래에요."
"나를?"
"네. 균열 나오고 나서부터 제대로 쉬신 적 없잖아요."
"쉰 적 없기는. 맛있는 거 먹고, 이렇게 술도 마시고 하는 게 쉬는 거지."
"그게 아니라요. 그냥. 오빠를 보면 혼자 외롭게 싸우는 느낌이에요. 또 내일 복귀하시면 집단 만드랴, 결정체 실험 결과 확인하랴 바쁘실 거잖아요."
"......"
바쁘게 움직여야지.
놈들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선소연이 말을 이었다.
"가족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살 터전인 인류를 위해 싸우려고 하시는 거겠죠. 전 그런데 그게 걱정돼요. 그러다 오빠만의 행복을 잃을까 봐요."
"......"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단지 전 휴식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어요. 일을 했으면 어느 정도 쉬어줘야 더 능률이 오른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휴식은 지금도 하고 있..."
"아니요. 이런 휴식 말고 제대로 된 휴식이요."
그래서 지금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제대로 된 휴식이 뭔데?"
"원래 일정보다 10일이나 빨리 끝났잖아요."
"그래서?"
"딱 3일만 휴식하고 복귀해요."
"3일?"
"네, 요 근처 미국이잖아요. 저 옛날부터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거든요."
난 피식 웃었다.
"뭐야. 결국 너가 쉬고 싶었단 거잖아."
"그... 그게 아니라요."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맞구만 뭘."
"... 네 그것도 맞아요. 솔직히 우리 이제 세계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됐는데, 써보고 싶잖아요. 오빠 옷도 좀 사 입히고 싶고."
그녀의 말도 맞다.
돈을 써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날 걱정하는 마음도 분명 있었겠지.
이번 원정은 그녀 덕에 시간을 벌었다.
못 들어줄 부탁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디가 그리 가고 싶은데."
"라스베가스요! 돈 쓰기 좋은 도시! 목표는 F급 결정체 하나 다 쓰고 오기!"
우렁찬 목소리에 비해,
그녀의 목표는 소박했다.
***
다음날 아침.
비행기 앞.
결정체와 생활용품들을 배낭에 꾹 눌러 담은 우리는 주유라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이 그렇게 됐습니다. 먼저 출발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라스베가스 까지 거리가 꽤 될 텐데... 비행기 없이 괜찮으시겠어요?"
네바다 주는 미국 서부.
쿠바와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마이애미까지는 뛰어가고 그다음은 비행 편을 이용할 계획입니다."
"바... 바다를 뛰어가신다고요? 아, 참... 상식선에서 생각하길 포기했었지..."
"네?"
"아니에요. 그럼 먼저 복귀해서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편히 쉬다 오셔요."
"부탁하겠습니다."
주유라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비행기에 탑승했다.
난 옆에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선소연을 바라봤다.
기대감 어려있는 검은빛 눈동자.
"우리도 갈까요?"
그래. 한 번 가보자.
도박과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