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32화 (32/128)

금지의 땅. (2)

저녁 9시.

최강수와의 자리를 마치고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취한 선소연을 눕혀두고 금지의 땅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결심을 했으면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지.

놈들이 언제 침공할지 모른다.

아저씨는 많은 도움을 줬다.

협회의 이름으로 전세기를 대여해 준다 했고, 결정체 수집을 도와줄 인원을 보내주기로 했다.

여권이나 비자 문제는 한 번에 해결됐다. 국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분증 두 개를 받았기 때문이다.

S급 헌터를 상징하는 황금색 뱃지.

세계 헌터 기구(WHO)에서 새로운 헌터 등급을 만들면서 그 기념으로 뱃지 두 개를 제작해서 보내왔다고 했다.

하나는 내 꺼.

또 하나는 선소연꺼.

'사이클롭스 베어를 혼자 잡을 수 있는가'

기구가 발표한 S급 헌터의 평가 기준이었고,

최강수는 우리 둘을 어필했다.

사실은 선소연이 나보다 더 강하다고.

한국 헌터 관리국에서 보증하겠다고.

그 말을 전해 들은 버나드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것만 있으면 어디서든 신분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세계에 단 두 개밖에 없는 뱃지니까.

개인적으로 뱃지의 편의성이 마음에 들었다.

공항 보안검사 면제.

WHO 가입 국가라면 어디서든 자유롭게 입출국이 가능했다.

비자카드 결제 기능.

즉, 계좌와 연동해서 신용카드처럼 쓸 수 있었다. 따로 환전할 필요도 없었다.

난 사용설명서를 읽으며 공동명의 계좌를 그녀와 내 뱃지에 등록했다. 폰 뱅킹을 확인하니 결정체 대금 20억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버튼을 눌러 곧바로 7억을 유현동에게 전송했다. 돈 관계는 확실해야 하니까.

띠리리리-

그러자 바로 진동이 울렸다.

유현동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형님! 잘 지내셨어요? 그런데 이 돈은 뭐예요? 세상에... 7억이나!

"저번 미발견 결정체 대금이다. 조금 더 넣었어."

-아니, 이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제가 이걸 어떻게 받아요. 형님 아니었으면 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걸요?

"괜찮아. 푼돈이야."

-7억이 푼... 돈 이라구요?... 아! 형님 그렇지 않아도 소식 들었습니다. 대단한 사람일 줄은 알고 있었는데 와... S급 헌터라니요. 동영상 보고 저 얼마나 감동 먹었는지 아십니까? 무려 100억 달라 짜리 결정체를!..."

그는 여전히 수다스러웠다.

유현동은 내 소식부터 해서 본인의 근황까지 연달아 쏟아내기 시작했다. 들어주면 끝도 없을 것 같아 적당한 타이밍에 끊었다.

"그만! 형 바쁘니까, 다음에 이야기하자."

-앗.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돈은 감사히 받을게요.

"그래.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거다."

-네? 무슨 소식이요?

"그런 게 있어."

뭐긴, 7억으로는 턱도 없는 최상급 결정체의 실험 대상이 된다는 까무러칠만한 소식이다. 그와의 통화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배낭 두 개에 장기간 지내야 할 물품들을 넣었다. 해롱해롱 거리며 누워있는 선소연의 것도 대충 싸두었다. 내일 일어나면 본인이 직접 확인하겠지.

열심히 싸다 보니 어느새 집 안에 커다란 달팽이 껍데기 두 개가 보였다. 만족스러웠다.

"음냐... 결정체에... 다 우리꺼얌..."

침을 쩝쩝거리며 잠꼬대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상에 누구보다 강한 그녀가 저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누워있다니. 누가 잡아가도 모를 것이다.

그녀를 보면 헌터들의 약점이 술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하긴, 신체가 각성한다고 혈중 알코올 농도까지 조절하는 건 아닐 테니.

나는 흐르는 침을 닦아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래 잘 자라, 이제부터 고생 좀 할 테니..."

***

이틀 후-

김포국제공항.

수많은 비행기들의 향연.

그 속에 누가 봐도 협회에서 빌린듯한 커다란 전세기가 위풍당당하니 서있었다. 우리는 그걸 멍하니 바라봤다.

"우리... 비행기 저깄네요."

"하아..."

그 많은 비행기 중에 어떻게 저것이라 단정 짓냐고?

'대한민국의 자랑 S급 헌터 강 현, 선소연' 이라는 문구와 우리의 얼굴이 비행기 외부에 예쁘게 칠해져 있었으니까.

[ 최강수 : 전세기를 빌려뒀네. 마음에 들 거야. ]

저번에 보냈던 문자의 뜻이 이거였다니.

아이고, 아저씨...

머리가 지끈거렸다.

주변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국제선을 사용하는 여행객들이 비행기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우리는 썼던 마스크를 더 깊게 눌러쓰고 벽에 붙었다. 들키면 부끄러워서 죽어버릴지도 몰랐다.

저 사진들은 SNS에 올라가서 평생토록 우릴 괴롭히겠지. 강설아가 깔깔거리는 소리가 벌써 들려왔다.

불의 종족이 문제가 아니라

아저씨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

선소연이 붉어진 얼굴로 속삭였다.

"우리... 꼭 저 비행기 타야 하는 거예요? 난 죽어도 못 타요."

"그냥... 저거 부수고, 우리 둘만 뛰어갈까?"

"그럴까요?"

우리가 숨어서 농담을 하고 있자,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돌아보자 도저히 공항패션이라 할 수 없는 편안한 복장을 입은 주유라와 뒤를 따르는 다섯 명의 남자가 보였다. 주유라가 양손을 모으며 머리를 숙였다.

"출국 수속 마치고 왔습니다. 또 뵙네요. 얘들아 인사드려."

"안녕하십니까!"

뒤에 있는 남자들이 긴장감 있는 목소리로 절도 있게 인사했다. 이거 뭐 헌터 집단이 조직도 아니고... 난 손을 휘저으며 그녀와 그들을 만류했다.

"쉿... 조용히 좀 해주세요."

"엇. 무슨 일 있나요?"

"도대체 저 비행기는 뭡니까!"

"정말 예쁘지 않아요? 역시 우리 회장님은 너무 감각적이셔. 어쩜 저런 디자인을..."

"......"

난 콩깍지가 낀 그녀를 저주했다.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비행기 내부로 탑승했다. 비행기 외부는 최악이었지만 내부는 봐줄만했다.

주문한 대로 한 달 치 식량과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휴식을 위한 침상도 있었다.

'금지의 땅'에는 숙식을 해결할 장소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체류 기간 동안 이 비행기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했다.

내부 중앙에는 멋들어진 회의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커다란 원탁을 중심으로 둘러져 있는 소파 열 개. 회장님들이 이동 중 회의하는 공간인가 보다.

"다들 앉아서 편하게 쉬고 있으세요."

내 말에 모두들 소파에 앉아 내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특히, 남자들은 긴장한 듯 각 잡고 앉아있었다.

주유라에게 듣기로 저들은 D급 헌터들.

임무는 오직 결정체 수거다.

최강수가 믿을만한 자들로 선별했다고 한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들이 힘차게 외치자 앉아있던 주유라가 시선을 뒤로 돌렸다.

"어, 기장님들 오셨나 봐요."

비행기 내부로 탑승하는 두 명의 인사.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대한항공의 기장들이었다. 그들은 공손하게 90도로 인사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기장 양종현입니다. 목적지까지 책임지고 모시겠습니다."

"부기장 김진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마주 인사했다.

'금지의 땅' 그 위험한 곳에 가는데도 기장을 구하는 것은 쉬웠다.

F급 결정체 다섯 개.

S급 헌터의 최소한의 안전 보장.

결정체 다섯 개면 목숨이라도 걸어 볼 만한 보수인데, 안전까지 보장하니 수많은 지원자들이 몰렸다. 우리는 프로필을 확인한 후 경험이 많은 기장 두 명을 신중하게 골랐었다. 혹시나 있을 위기 상황에 바로바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하니까.

***

쑤아아앙-

전세기가 힘차게 이륙했다.

상공에 무사히 안착하자 나는 회의실에 앉아있는 인원들을 주목시켰다. 비행기 안의 인원은 총 열 명이었다.

"아시다시피 목적지는 쿠바입니다."

정확히는 '산티아고 데 쿠바공항'

이미 국가는 멸망했고, 아무도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

공항은 운영을 하지 않지만,

활주로만 이용하면 된다.

주유라가 손을 들었다.

"말씀하세요."

"왜 하필 쿠바인가요? 거기가 제일 넓은 땅인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성 조사 결과에 따르면 쿠바에 식별된 괴물만 5,000마리가 넘는다고 했어요."

쿠바의 크기는 우리나라와 엇비슷하다.

그녀의 말은 다른 자그마한 호상열도국들을 내버려 두고 왜 쿠바냐는 거겠지.

"대륙과 제일 가깝기 때문입니다. 날개 달린 괴물들이 조금씩 바다를 넘으려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뭐, 몇 마리 넘어오는 거야 상관없지만 균열이 계속 늘고있는 추세입니다. 나중에 대륙에 피해가 갈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인류를 구하기 위함인가요?"

"저에겐 다른 국가나, 쿠바나 거기서 거깁니다. 이왕 하는 거 국제적으로 도움 될 수 있는 선택을 한 것뿐이죠."

"......"

그녀가 손을 내리고 머뭇거리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 솔직히 회장님이 보내서 오긴 왔는데... 걱정돼요. 믿어지지도 않구요."

"어떤 게요?"

"그쪽 둘이서 그 많은 괴물들을 정리한다는 게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무조건 소연이한테만 붙어있으시면 됩니다."

"......"

주유라가 말이 없자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긴장하고 있는 남자 헌터들에게도.

눈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낮게.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화법이다.

"여러분들은 결정체 수집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거기 있는 괴물들 중 구 누구도 여러분들의 옷깃조차 건들지 못할 겁니다."

"... 일단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알겠다고 하는 것 같지만.

뭐, 막상 가보면 알게 되겠지.

"체류 기간은 약 한 달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괴물들을 잡으면 좋겠지만 땅이 너무 넓다. 잡는 게 문제가 아니라 결정체 수집이 문제다. 한 달 동안 최대한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은 후, 복귀할 계획이다.

"앞으로 엄청 뛰어다니고, 고생하실 겁니다. 그러니 하나만 기억해주십시오."

C급 이하의 결정체는 연합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순수익의 95%는 우리가 먹고, 5%는 연합 내에서 알아서 분배한다. 그중에 이들에게 떨어지는 것도 있겠지.

"많이 모으는 만큼, 여러분들의 몫도 커진다는걸."

***

앞으로의 자잘한 계획들과 질문들을 받은 후 우리는 각자 휴식을 취했다.

8시간 정도 흘렀을까?

기장의 안내음이 들려왔다.

[ 곧 쿠바 지역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헌터님. ]

착륙 준비를 위해 고도를 낮췄는지 창밖에는 구름 대신 바다가 보였다. 아, 이곳이 대서양의 버뮤다 삼각지대인가? 비행기와 배가 사라진다는 공포의 바다.

나는 슬슬 준비를 했다.

곧 육지가 나오면 그곳부터 '금지의 땅'

기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것이 비행기와 기장들이다. 소중한 결정체들을 한국까지 무사히 옮겨다 줄 수단이자, 노숙을 방지하는 최고의 숙소니까.

"소연아 일어나. 준비하자."

"네에."

한참 자고 있는 그녀를 깨운 후 준비운동을 했다. 균열에서 나온 이후 첫 대량 사냥이다.

주유라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남자 헌터들을 회의실로 모았다. 혹시라도 있을 착륙 사고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흐아, 긴장되네요. 오줌 마려..."

주유라는 양손으로 본인의 팔을 부여잡고 쓸어댔다. 어느새 모여있는 남자 헌터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굳어있었다. 하여간, 걱정하지 말래도...

순간-

한참 내려가던 고도가 다시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각종 소지품들이 뒤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급해 보이는 기장의 방송음이 울렸다.

[허... 헌터님 빨리... 빨리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쿠웅-

기체가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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