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의 땅. (1)
예약한 레스토랑의 VIP 룸.
분위기 좋은 음악과 격식 있는 장식들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리창 밖으로 비치는 저녁 도시의 전망은 자리를 한층 더 빛나게 했다.
최강수는 예전부터 노래를 부르던 소주 대신 비싼 양주를 시켰다.
"여기 VIP 풀코스 예약했던 거 한꺼번에 세팅해 주시고, 발삼 하나만 주쇼."
발삼은 발렌타인 30년산의 줄임말이다.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점원들이 예의 있게 인사했고 서빙을 시작했다. 어느새 식탁에는 오색찬란한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
최강수가 양주 뚜껑을 따며 입을 열었다.
"한국을 뜬다는 건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롭니다. 소연이랑 같이 갈 곳이 있습니다."
선소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랑요? 전 들은 게 없는데..."
"이제 들으면 되지."
"......"
그녀가 말이 없자 최강수가 양주를 내밀었다.
"일단 둘 다 한 잔씩 받게."
쪼르르-
깊게 풍겨져 나오는 위스키의 향.
나는 최강수가 따라주는 술을 받으며 그를 바라봤다.
"아저씨, 우리 목표 기억하십니까?"
"외계 침공에 대비하는 것. 그러기 위해 일단 국가의 기반을 잡기로 했지. 하나는 벌써 이뤘어."
"아저씨 덕분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정부를 휘어잡고 헌터를 통제할 수 있게 됐어요."
최강수는 내 잔을 가득 채운 후 선소연에게 술병을 뻗었다. 그녀도 냉큼 잔을 들이밀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그러게."
"현재 헌터들은 수준 미달입니다. 각 일인이 사이클롭스 베어 하나 처리하기 힘들 정도면 군단장 한 명만 출현해도 지구는 멸망할 거예요."
"......"
나는 균열에서 나오는 괴물이 불의 종족임을 확신했다. 붉은 결정체, 붉은색 균열, 그리고 불 각성 능력에 저항력을 갖춘 괴물들. 명백히 불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가득 찬 잔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붉은 익룡이나 공룡들에 비하면 사이클롭스 베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자네들이 있지 않나."
"우리가 지구 전체를 돌아다니며 놈들을 상대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군단장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지도 못하구요."
"......"
"전 적어도 각 개인이 붉은 익룡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의 팀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그게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입니다. 자, 우선 한잔하시죠."
우리는 채운 잔을 부딪치고 각자 목으로 넘겼다. 식도를 통해 타고 내려오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쑤욱- 올라오는 취기. 술이 달게 느껴졌다.
"주유라 씨한테 들었습니다. 결정체 다섯 개로 성장률을 높일 수 있다던데요. 혹시 누가 발견해냈는지 아십니까?"
"우리 회원 중 한 명이긴 헌데, D급 결정체만 먹어서 그런지 성장률이 그리 크지는 않더군... 그래도 웬만한 B급 균열을 클리어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올라왔네."
그 정도 성장률이면 할만하다.
이제는 A~B급 결정체를 모아 각성을 시키고 단련을 하면 어느 정도 성장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각 국가에서도 준비할 수 있게끔 해야겠지.
"아직까진 다섯 개 전부 최상급 결정체로 섭취한 사람은 없겠죠?"
"그렇지... 그 비싼 걸 일개 헌터가 어떻게 다 구하겠나."
"이제부터 그걸 확인하려 합니다."
우리가 먹지도 않고 이야기하자, 선소연이 나와 최강수의 개인 접시에 잘게 썰은 스테이크를 올렸다.
"드시면서들 이야기하세요. 다 식겠어요."
"고마워."
"고맙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우리는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비워나가기 시작했다. 술과 음식이 절반쯤 비워졌을 때 최강수가 질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확인할 생각인가. 알다시피 A급 결정체는 부르는 게 값이야."
"연합에서 끝까지 쥐어짜면 몇 개나 구할 수 있겠습니까?"
"보유하고 있는 것까지 합치면 그래도 열 개 언저리로 구할 수 있긴 한데, 그걸 한두 명에게 몰아주겠다고 하면 반발이 심할 거야."
맞는 말이다.
연합의 돈은 최강수 개인의 것이 아니다. 즉, 사적으로 가져다 쓸 수 없다. 블랙마켓 거래 수수료와 기업체의 기부금으로 쌓인 돈은 오직 연합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서만 써야 한다.
"제가 갚겠다고 해도 안됩니까. 이자까지 두둑히요."
"S급 헌터의 보증이라면 다들 이해하긴 할 텐데... 그런데 그 많은 결정체를 어디서 구하려 그러나. 아, 자네 설마?"
최강수가 움직이던 젓가락을 멈췄다.
나는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아마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거긴 위험하네! 아무리 자네라 해도! 그곳은 금지의 땅이야!"
"저에겐 기회의 땅이기도 하죠. 군단장급이 아닌 이상 저와 소연이를 해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최강수가 근심 어린 어조로 외쳤고 나는 딱 잘라 말했다. 혼자서 술을 홀짝이던 선소연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금지의 땅이 뭐예요?"
그녀의 질문에 최강수는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금지의 땅' 서인도제도.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에 위치한 크고 작은 호상열도국들을 말한다. 균열의 출현 이후 그 지역에는 유난히 높은 등급의 균열이 많이 생겨났다.
쿠바, 자메이카,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 등등... 많은 열도국들이 괴물들을 통제할 수 없어 국가를 포기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멕시코나 미국으로 피난을 갔고 몇몇은 그곳에 고립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헬기를 보내 구조를 하려 했으나, 날아다니는 괴물들이 급증하자 결국 구조도 포기한 상태였다.
균열은 늘어나고, 헌터들이 처리를 못하니 괴물의 수가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괴물들은 물을 끔찍이 싫어해서 섬 밖으로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괴물들이 점점 들끓기 시작하자 근방에 있는 미국이 핵 사용을 건의했었다고 한다.
"핵 무기가 놈들에게 통할 거란 보장이 있습니까?"
"미국 본토와 너무 가까워요. 넘어오지도 못하는 괴물들이 더 무서울까요? 아니면 바다를 건너오는 방사능이 더 무서울까요?"
"그 땅에 남아서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자는 거냐? 그건 너무 비인도적이야!"
국제적으로도, 미국 내부에서도 많은 반대 여론이 빗발쳤다. 결국 미국은 이도 저도 못하고 결정만 유보하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 있는 괴물들의 결정체를 모두 모을 수 있다면 전 세계를 주름잡을 수 있는 거부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세계의 많은 헌터들이 도전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돌아오지 못했고, 그래서 붙혀진 이름이 '금지의 땅' 이었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만한 노다지가 따로 없지만.
"그렇구나..."
설명이 끝나자 선소연이 입을 벌리고 침을 흘렸다. 눈이 반짝이는 게 가서 얻을 결정체를 생각하고 있는듯했다. 어느새 그녀도 나도 위험 불감증에 걸려버렸다.
"그곳에서 아직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제 각성 능력도 확실히 알아보려고 합니다."
"각성 능력이라..."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이전에 수신제가(修身齊家)라 했다. 금지의 땅을 가는 이유는 결정체의 수집도 있지만, 내 능력을 조금 더 확실히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솔직히 답답했다.
아직도 통제되지 않는 불의 능력.
경천동지할 능력을 가졌던 군단장에게 우리의 힘이 얼마나 통할지도 모르겠고. 확실한 건 준비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자네가 다녀오는 동안 결정체를 누구에게 몰아 주면 되겠나."
"제가 생각해둔 사람이 있습니다."
유현동과 문태준.
최근의 만난 두 명을 우선적으로 키워보기로 했다. 둘 다 결정체를 하나씩 먹었으니 총 8개만 있으면 된다.
"설마 태경이와 설아 양을 생각하고 있는 겐가?"
"아닙니다. 이번에 알게 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따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태경이와 설아는 어찌할 텐가."
"크흠..."
"각성은 하지 않았지만 사이클롭스 베어 정도는 손쉽게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췄네. 사실상 그들도 알려지면 S급 헌터야. 물론 자네들은 격 외의 존재긴 하지만. 동생이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한다만, 지금은 한 명의 도움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야."
"좋습니다. 그 둘을 위한 결정체는 제가 다녀와서 드리겠습니다. 우선 제가 말해준 사람들부터 아저씨가 케어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구태경과 강설아는 이미 균열에서 신체 각성을 크르르 이상으로 끌어올린 상태. 그들에게 먹여봐야 객관적인 성장지표를 알 수가 없다. 나중에 먹여도 충분하다. 내가 지금 원하는 정보는 '일반인 또는 평범한 헌터가 과연 얼마큼 성장하는가' 이다.
최강수는 한참 뜸 들이다 수긍했다.
"흠... 그렇게 하겠네."
가만히 대화를 듣던 선소연이 갑작스레 궁금증을 토해냈다.
"그러엄요, 거기서 모은 상급 결정체요오. 다아 각성용으로 쓰시는 거예요오?"
"C급 이하의 결정체는 팔아서 자금을 마련할 생각이야. B급 이상 결정체는 전부 각성용으로 사용할 거고."
"헤에- 그게 다 비싼 돈일텐데에...아까워요. 으음 마시쪄."
말이 끝남과 동시에 또 잔을 홀짝인다.
목소리의 높낮이가 어색하고 말꼬리가 늘어지는 게 많이 취한듯했다.
테이블에 올려진 양주는 벌써 두 병.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그걸 혼자 다 마신 건가?
"소연아, 이제 그만 마시자. 벌써 혀가 꼬부라졌어."
"네에...알겠써요."
잔을 뺏으니 순순히 수긍한다.
그러더니 고개를 내 어깨 쪽으로 픽- 쓰러뜨리며 기댔다. 난 한숨을 내쉬고 최강수를 바라봤다.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공동명의 통장을 만들었더군, 저번 결정체 대금 20억 그곳으로 입금 시켰네."
"감사합니다."
공동명의 계좌를 개설했다.
앞으로도 결정체를 모을 땐 그녀와 함께할 것이다. 그녀에게 도움받는 입장에서 대금을 독식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따로 관리하자니 불편할 것 같아 함께 쓰는 계좌를 만든 것이다. 당연히 그녀에게도 번 돈의 절반을 사용할 권리를 줄 것이다.
가만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선소연이 '공동명의' 란 말을 들었는지 벌떡 일어났다.
"커플 통장이요오?! 나 그거 진짜 해보고 싶었는데에!"
"자, 헛소리하지 말고 기대서 자.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난 반대쪽 팔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 다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러니 다시 눈을 감고 새근새근 잠든다.
"알콩달콩 하니 깨가 쏟아지는구먼. 결혼은 언제 할 건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긴... 누가 봐도 둘도 없는 단짝이구먼."
"정말입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닙니다."
내 단호한 말에 최강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그게 정말인가! 육 개월 동안 같이 있었으면서 어떻게! 소연이가 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
내가 대답이 없자 최강수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나직이 속삭였다.
"... 자네 혹시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러는 아저씨도 수상하던데요?"
"나 말인가?"
"네, 주유라 씨랑 무슨 관계입니까? 아저씨에 대해 말하는 게 심상치 않던데."
"...크 크흠... 그런 거 아닐세. 나이차가 얼만데..."
갑자기 얼굴을 붉히는 거 보니 분명히 뭔가 있었다. 서로 농담하며 남은 음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그런데 자네는 결정체 먹을 생각이 없는 건가?"
"네. 아직까지는요."
"왜? 그래도 먹으면 좀 성장하지 않겠는가. 답답하다던 각성 능력도 진전이 있을테고."
"제겐 F급 결정체나 A급 결정체나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더라고요..."
"... 그거 굉장히 재수 없는 발언이구만."
최강수가 못 말린다는 듯 털털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