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가 되다. (2)
우주를 가로지르는 뿌연 띠.
그 속에 먼지처럼 작은 붉은 행성이 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척박한 땅. 갈라진 대지로 붉은 용암이 일렁이고 화산이 줄줄이 터져흐른다. 곳곳에는 시공을 뒤틀은 붉은색 균열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불의 종족 본거지.
그곳엔 수많은 붉은 괴물들이 전열을 갖추고 서 있었다. 그리고 최전방에 그들을 이끄는 다섯 마리의 거대한 괴물들이 보인다. 각각 하나의 군단을 이끄는 종족 정점의 존재들.
군단장들이었다.
그들의 생김새는 각기 달랐다.
그중 목이 긴 공룡의 형태를 취한 괴물이 전방을 바라봤다. 마치 붉은 브라키오 사우르스를 보는 것 같이 커다란 육체를 가진 그는 군단장들 중 막내다.
[ 위대하신 총사령관이시여. 벌써 자원이 고갈되어 갑니다 ]
불의 종족 총사령관.
붉은색 머리에 혼혈처럼 보이는 피부. 군단장들 앞에는 놀랍게도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한 존재가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인간인 것은 아니었다. 등에 쏟아져 있는 괴기한 날개가 그것을 반증했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은 한 종족을 이끄는자답게 위엄이 넘쳐흘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5군단장은 말을 이었다.
[ 이곳 은하수도 모두 점령한지 오래입니다. 이제 슬슬 지구로 총공격을... ]
[ 5군단장이여 ]
나직한 음성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
항상 총사령관은 '지구'라는 단어에 민감했다.
5군단장은 긴 목을 땅에 박으며 공손히 부복했다. 장엄히 행성을 울려 떨리는 목소리에 공간은 일순간 적막에 잠겼다. 모든 존재가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 작금에 이르러 우리는 전 은하계의 점령을 목전에 두었다 볼 수 있다 ]
[ 그렇습니다. 총사령관이시여 ]
[ 한 가지 걸림돌을 제외하고 말이다 ]
이어지는 음성에 5군단장의 낯이 이지러졌다. 또 그 말이다. 지구. 총사령관과 나머지 군단장들이 공포에 떠는 그곳. 위대한 불의 종족이 한낱 조그마한 행성 하나에 몸을 사려야 한다니 5군단장은 항상 그게 불만이었다.
[ 지구... ]
[ 그렇다. 그대는 다른 군단장들과 달리 6,600만 년 전 물의 종족과의 대전쟁을 겪어보지 않았지. 그들의 무서움에 대해서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
잠깐의 정적 뒤-
[ 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치열한 전쟁 끝에 우리는 많은 동족을 잃었지. 그들도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말이다. 놈들의 왕은 굉장했다. 아직도 그 흉포한 힘이 느껴질 정도로. 더군다나 6600만 년이 지난 지금에도 조금씩 힘이 늘어나고 있는 게 느껴지는구나. 나는 그것이 두렵다. ]
담담히 읊조린 총사령관이 계속 말을 이었다.
[ 허나, 다행인 건 우리들의 왕께서도 아직 싸우고 계신다는 것. ]
[ 아아... 왕이시여 ]
총사령관의 입에서 왕이라는 말이 언급되자 모든 괴물들이 숙연해졌다. 파괴적이면서도 용맹했던 그들의 왕. 6600만 년 전 멸종의 위기에서 그들을 위해 희생했던 종족의 선도자.
[ 그러나 10년 전부터 두 왕의 성장이 멈췄다. 우리도 그간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닐 지언저. 슬슬 움직일 때가 됐구나 ]
[ ......!! ]
[ 2군단장. 현 진행 상황이 어떻게 되는가 ]
커다란 불의 검을 든 괴물.
악마를 연상시키듯 온몸이 불로 이루어진 괴물이 날개를 활짝 폈다. 흉포하게 쏟은 검은 뿔 2개가 위압감을 조성한다.
[ 물의 왕을 자극하지 말고 서서히 지구를 장악하라는 총사령관의 말씀에 따라 조그마한 병력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
2군단장의 고유 능력은 시공간 이동이다. 불의 종족이 전 은하계의 포식자로 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며, 10억 광년은 떨어져 있는 지구에 생긴 균열의 원흉이기도 했다. 지금도 널려 있는 균열을 통해 작은 괴물들이 앞다투어 들어가고 있었다.
[ 5군단장은 출동을 준비하라 ]
[ 맡겨만 주십시오. 놈들을 불살라 버릴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
5군단장이 자신감 넘치는 음성으로 말하자 총사령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지구를 점령하라는 것이 아니다. 아직 왕들의 힘이 건재하다. 현 상황이 어떤지 파악만 하고 복귀하라. 가는데 얼마 정도 소요될 것 같은가 ]
2군단장이 빠르게 계산했다.
[ 군단장 정도의 육체를 온전히 이동시키는 데는 1개월 정도면 충분합니다 ]
[ 적당하군. 그렇게 진행하라 ]
***
먹자골목 고깃집 앞.
벌써 날이 어둑해져갔다.
계산을 하고 나온 강설아가 미간을 좁히며 우리를 쳐다봤다.
"아이 씨. 내가 못 살아. 둘이서 얼마나 먹었길래 1,320,000원이 나와."
"미안, 자제할 수가 없었어."
나는 멋쩍게 웃었다.
"...... 미안해요."
선소연도 민망한지 혀를 빼꼼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돈 없이 먹을 생각을 해! 연락이라도 주던가."
"균열에서 나오자마자 병원이었잖아. 우리 둘 다 지갑이 없었어."
"하여간 나중에 갚아야 해. 언니도요! 딱 반씩! 이자까지 받을 거예요."
"그래그래, 알겠어. 어련히 챙겨줄까. 그나저나 관리국에서 나온 사람은 어디 있어?"
"저기. 기다리고 계셔."
강설아가 검지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흰 와이셔츠에 검은 수트를 깔끔하게 빼입고 있는 남자가 서있었다. 각져있는 넥타이와 단정한 머리. 직업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는지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헌터관리국 등록과 정현조 대리입니다."
"네, 어떤 일로? "
"균열 생존자이신 두 분 다 각성자라고 들었습니다. 우선 무사히 생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음... 다름이 아니라 헌터관리법에 의해 두 분 다 등록을 하셔야 하는데 언제가 편하십니까?"
"헌터관리법이요?"
"네. 3개월 전에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입니다."
"꼭 등록해야 하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등록하지 않으면 정부에서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받지 못할뿐더러 불이익도 있습니다."
"불이익?"
나와 소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해서 각성한 것도 아닌데 불이익이라니?
"헌터들이 각성 능력을 밝히지 않을 경우 많은 국민들이 원인 모를 범죄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에 따라 등록이 안된 각성자는 경찰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게 됩니다. 웬만하면 등록하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안 그러면 서로 불편해지거든요."
확실히 정부가 헌터를 꽉 잡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대사였다.
나는 좀 의아했다.
애초에 헌터와 정부 사이에서 정부가 갑이 될 수 없는 구조다. 헌터들이 담합해서 파업이라도 한다면 튀어나오는 괴물들과 우후죽순으로 발생하는 균열들을 처리하지 못한다. 자칫 귀화라도 할 경우 국가적으로 큰 손해이기도 하다. 아직 만들어진지 얼마 안 돼서 그렇지 조만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현조가 부연했다.
"혜택은 확실합니다. 균열하나 처리할 때마다 각자 1억 원씩 상여금이 지급되고요. 불의의 사고로 사망 시 유가족들에게 50억 원의 사망급을 지급합니다. 균열과 관련한 모든 수익금은 종합소득세에 가산이 안되구요."
전혀 혜택으로 보이지 않는다.
최강수에게 듣기로 암시장을 이용하면 결정체 값만 억 소리가 수백 번 나올 정도인데 고작 1억 원이라니. 물론 헌터 증강과 국가 보안을 위해 쓴다지만 실상은 부자들의 뒷돈 놀이라고 하지 않는가. 헌터들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다.
"균열 게시판을 통해 각종 정보도 제공하고요. 각성 능력을 연습할 수 있는 공간도 제공됩니다. 또 막 각성하신 분들은 본인의 능력을 잘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저희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능력을요? 어떻게..."
이것은 구미가 당긴다.
아직 불의 능력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움을 받아보고 싶다.
"등록하실 때 능력을 알아보는 실험을 합니다. 백이면 백 찾는데 성공하죠."
실험이라.
맘에 들지 않지만 일단 따라주기로 했다.
아직 헌터 수가 적어 우려의 말이 많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개선될 것이다. 불이익을 당하기도 귀찮고.
"언제 어디로 가면 되죠?"
잘 선택하셨다는 눈길을 보낸 정현조가 주머니를 뒤적거려 명함 두 장을 꺼냈다.
"여기 명함입니다. 퇴원 수속 밟으시고 편하실 때 연락 주시면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러죠."
"그럼, 편히 쉬시고 나중에 뵙겠습니다."
***
어느덧 시간은 유수히 흘렀다.
소연은 연습생 숙소를 빼고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 집으로 갔다. 그동안 난 부재했던 일들을 마쳤다.
- 72,003,125원
그동안 모아둔 돈과 군인공제회 적금, 퇴직금을 정산하니 나온 잔고였다. 약 7천만 원가량의 돈이다. 30살 대위치고는 굉장히 많이 모은 편이었다. 동생이 자취하는 마포구 쪽에 월세 80짜리 오피스텔을 하나 계약했다.
제적당했다지만 부대에 사정 설명을 하니 명예전역 처리해줬다. 국가 입장에서 북한보다는 괴물이 더 시급하다 보니 각성자임을 알고 붙잡지는 않았다. 강설아와 연신내에 들러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임도 가졌다.
지금은 서울역 벤치에 앉아있다. 일주일이 지나고 헌터 등록을 위해 선소연과 만나기로 한 장소다.
[ 정현조 대리 : 오늘 오시나요?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
[ 나 : 괜찮습니다. 전철로 가는 게 더 편해서. ]
[ 정현조 대리 : 아 그렇습니까? 그럼 삼성역으로 오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오시기 30분 전에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정현조가 한사코 데리러 온다 했으나 전철로 가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기차를 기다리며 헌터에 관련된 사항들을 스마트폰으로 뒤적이던 도중.
띠리리리-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에 [최강수]라고 적혀있다.
그는 내가 의식을 차렸다고 하자 자주 전화해서 안부를 물었다. 처음엔 한사코 존댓말 쓰던 것을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놓았다. 태경이와 설아에겐 말을 놓고 우리한테 존대하는 게 어색한 것을 본인도 느꼈었나 보다.
"네.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
- 허허, 잘 지냈는가. 오늘 헌터 등록한다면서."
"네. 곧 소연이 오면 가려고요."
- 내 마중 가야 하는 건데 요즘 균열이 평소보다 많이 생겨서 인력이 부족해. 새로 하는 일도 있고."
"아니에요. 등록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새로 하는 일이라니요?"
- 다름 아니라 내 이번에 조합을 하나 만들었어.
"조합이요?"
- 한국 헌터 연합이라고 하네. 정부나 기업이나 다들 본인들 잇속만 챙기는데 헌터끼리라도 뭉쳐야 하지 않겠나. 우리도 슬슬 근거지를 옮겨야지."
"음..."
- 원래 C급 헌터 이상부터 가입 가능하도록 해놨는데 두 사람은 특별히...
"도와달라는 건가요?"
- 그렇지. 관리국에 등록은 하되, 우리도 우리의 권익을 찾아야 하지 않겠나. 특히 자네 같은 인재들은 더더욱.
"권익이라..."
- 각성자의 도의나 책임 따위는 없는 세상이야. F급 헌터로 등록만 해놓고 균열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놈들. 그냥 일신의 안전과 영달만을 추구하는 놈들로 가득 찼지. 결정체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어. 자네는 제대로 된 각성자들을 키워보고 싶은 생각 없나?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 정부에 반항한다 해서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어차피 이렇게 돼 먹은 세상이야.
" 후- 우선 아저씨는 아저씨만의 단체를 만드세요. 생각해보고 제가 가는 길과 다르지 않는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 음... 고맙네. 내 조만간 찾아가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자고. 소주 한잔하면서."
최강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오랜 기간 군에 있어서 그런지 단순한 이익단체는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가다간 군단장급 이상의 놈들이 왔을 때의 상황이 눈에 선했다.
내 목표는 균열의 정체를 파악하고 푸른 새의 의지를 받들어 외계 종족으로부터의 생존하는 것. 소중한 사람들의 터인 지구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제대로 된 각성자 집단.
본인의 힘에 취하지 않고, 외계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사명을 가진 집단. 한 번 만들어보고 싶기는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순간 느껴지는 향긋한 냄새.
어느새 내 앞에는 일주일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