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가 되다. (1)
[미발견 균열에서 2명 복귀. 6개월 동안 생존해.]
북한산 일대에서 실종 신고되었던 특전사 출신 강 씨(30), 연습생 출신 선 씨(24)가 6개월 만에 복귀했다. B급 헌터 최 씨(42)가 발견한 둘은 현재 의식을 잃은 상태로 일원동 삼성의료원에 입실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미발견 균열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되며 정확한 경위는 조사.... (생략)
ㄴ grace1hur : 에휴, 또 어디 졸부 집안 자녀들이겠지. 각성하려고 별 쇼를 다한다.
ㄴ 하핳호 : 아니던데? 둘 다 집안도 평범하다던데 잘 알아보고 말해라. 상식적으로 그 짓하려고 6개월 동안 실종 신고 했겠냐. 한 1, 2주 하고 말겠지. 그리고 6개월 전이면 딱 균열로 난리 났을 때잖아.
ㄴ error108 : 와 일반인이 균열에서 6개월 동안 생존... ㄷㄷ 존경... 그나저나 윗분 집안 조사는 어떻게?
ㄴ emam7930 : 둘 다 최소 베어 그릴스일 듯.
ㄴ kwho147200 : 다행이네요. 근데 균열 하나에서 둘 다 각성한 건가요? 그런 거라면 좀 의심되는데...
---
지구로 복귀한지 2주.
내 소식을 듣고 쾌차하신 어머니는 동생과 번갈아가면서 날 간호하셨다고 한다. 최강수는 등산 중 우리를 발견했다며 헌터 관리국에 신고했고, 간단한 내용으로 기사화되어 나갔다. 구태경은 헌터 아카데미에 지원했다고 한다. 신체능력이 강화됐지만 각성을 한 것은 아니어서 헌터 등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소연은 옆방 중환자실에 있었다.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시는 그녀의 부모님도 생존 소식을 듣고 찾아왔었고, 지금은 그녀의 어머니가 지키고 있다고 했다.
나와 강설아는 선소연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던 소연이 날 보고 활짝 웃었다.
"일어나셨어요?"
"누구셔?"
"아까 말했던 사람. 나랑 같이 생존했던 분이셔."
"어휴- 안녕하세요. 우리 소연이 잘 챙겨줘서 정말 고마워요."
연신 감사의 말을 전하는 그녀의 어머니. 나도 가볍게 인사드렸다. 밝게 웃으신 아주머니는 우리가 대화하기 편하도록 자리를 내어주셨다.
---
"그래서 죽었던 우리가 갑자기 살아났고 그 결정체를 흡수했다고?"
"그렇다니까. 오빠가 붉은색! 언니가 푸른색! 내가 정확히 봤어."
강설아가 모자로 감춘 얼굴을 끄덕거리며 팔짱을 꼈다.
"지구로 복귀하고도 한참 의식이 없길래 하산해서 바로 119 불렀지. 실종 신고도 바로 취소하고. 엄마 우는 거 달래느라 얼마나 힘들은 줄 알아? 언니네 부모님도 처음엔 난리도 아니었어. 태경 오빠도 주에 두 번 정도는 꼭 병문안 왔고."
부모님을 못 뵌 지도 꽤 오래됐다.
많이 걱정하셨을 텐데.
조만간 연신내에 들르기로 다짐했다.
"최강수, 그분은?"
강설아는 팔짱을 도로 풀더니 아차 하며 말했다.
"아! 강수 아저씨가 오빠 깨면 이 말을 전해달라고 했어. 그 균열에서 있었던 일은 당분간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고. 나랑 태경 오빠도 신체 진화한 건 일단 숨기기로 했어."
우리가 들어갔던 균열이 평범한 균열이 아니라는 것은 예전부터 짐작했다. 문제는 설명하고 싶어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게 없다. 일기장의 내용으로는 턱도 없었다. 직접 푸른 새랑 대화하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빈약했다.
왜 지구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외계 종족들은 어떤 종족인지. 군단장이 말했던 물의 종족들은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말해봤자 무슨 소용일까. 설득력도 없을뿐더러 해결책도 없다. 일단 비밀로 하고, 더 알아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더 궁금한 건 없어?"
약간 상기된 강설아의 음성에 나는 선웃음을 지었다.
"응. 말해줘서 고마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설아의 말에 따르면 나와 소연이 상처 입은 후 뒤늦게 그녀의 능력이 발휘된듯했다. 그녀가 의식을 잃기 전 날 껴안았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고 했다. 물의 힘. 치유 능력은 각성 전부터 선소연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천운이 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두 번째 그녀에게 목숨을 빚졌다. 말없이 미소 지으며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임에도 눈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잠깐 바람 좀 쐴래?"
"좋아요."
강설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단둘이 밖으로 나왔다.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주위에 보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패딩을 걸쳤지만 전혀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체감온도 -40도 정도 되는 정글 숲에서 맨몸으로 버틴 것만 반년이다. 그에 비하면 서울의 온도는 따듯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편안했다.
제법 큰 병원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조경이 깔끔했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벤치에 쉬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러면 대화하기 편해지지. 나와 그녀는 커다란 조각상 밑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담배가 당겼지만 주머니에 없었다. 이참에 끊을까?
그녀가 날 바라봤다.
항상 숲속에서만 보다가 제대로 갖춰 입고 지구에 있으니 뭔가 어색했다. 패딩에 가려진 가녀린 몸매. 순간 그녀의 몸 상태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녀의 상태도 나와 같을지. 선소연의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몸에 열은 없는 것 같고... 기분은 좀 어때?"
"괜찮아요. 처음엔 약간 뻐근했는데 지금은 엄청 팔팔해요."
나와 같은 상태다.
지금은 팔팔하다 못해 힘이 넘쳐흐르니까. 문제는 각성 능력이다. 병동에서 무의식중에 발현했던 불의 힘이 신경 쓰였다. 허공에 불을 만들려 해보았지만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푸른 새의 결정체 말이야. 어떤 능력으로 각성했는지 알겠어?"
나는 불의 왕, 그녀는 물의 왕의 결정체를 흡수했다고 했다. 내가 각성한 게 불이라면 그녀가 각성한 건 물이겠지.
"잘 모르겠어요. 저도 아직 깬지 얼마 안 돼서... 근데 아마 물의 능력이 지 않을까요?"
순간 소연의 손에서 물줄기가 피어올라 화려한 꽃을 만들어내더니 사라졌다.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그냥 하겠다고 마음먹으니까 됐어요."
혼란스럽다.
왜 그녀는 자유롭게 되는데 난 안될까. 각성 능력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빨리 실험해 보고 싶었다. 선소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신체 능력이 옛날이랑 달라요. 훨씬 통제하기 쉬워졌달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문득 소연이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큰 축복이라 느꼈다. 함께 성장해왔고, 함께 능력을 공유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이. 그녀가 아니라면 아무도 이 힘을 이해해줄 수도 없고 알려줄 수도 없을 테니까.
"그것 말고, 또 뭔가 바뀐 건 없는 거지?"
"네. 근데... 오빠."
"응?"
"갑자기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괜찮아. 편하게 말해봐."
"배가 너무 고파요."
아!
선소연의 말을 듣자 나도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지금껏 혼란스러운 정보를 정리하느라 못 느꼈었는데 2주 동안 수액만 맞았지 뭘 먹은 게 없었다. 무엇보다 컵라면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음식을 맛본 적이 없었다. 입맛이 당겼다. 외식을 하고 싶다. 근데 퇴원 수속 안 밟고 나가도 되려나? 뭐, 잠깐 나갔다 들어오면 아무도 모르겠지.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어?"
"죽...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위가 수축했을 텐데."
"우리가 일반인인가 뭐... 외식하러 가자. 맛있는 게 먹고 싶어."
"그럼, 뷔페? 그동안 못 먹어본 거 한꺼번에 몰아먹을 수 있잖아요."
"뷔페는 너무 민폐이지 않을까. 우리가 거의 20인분은 먹어치울 텐데... 여기 병원에 가까운 뷔페도 없고."
"그럼 삼겹살은 어때요?"
"좋지."
****
지글지글-
대청역 먹자골목에 위치한 한 삼겹살집에 도착했다. 고기 굽는 소리가 청각을 폭행했고 고소한 냄새가 군침을 흐르게 했다. 빨리 먹고 싶었다.
"여기 주문받아주세요."
"아이고- 잘 왔어. 선남선녀 커플이네. 아가씨 피부 좀 봐 어쩜 저리 고울까."
"하하, 감사합니다."
서글서글하니 웃으며 다가온 아주머니가 기본 세팅을 했다. 뭔가 착각을 하고 계셨지만 소연이 기분 상할까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도 별말 없이 젓가락을 들고 빙긋 웃는다. 상당히 기분 좋아 보이는 게 삼겹살이 기대되나 보다.
"그래서 총각, 몇 인분 가져다줄까?"
"음... 몇 인분 시킬까? 한 20인..."
"아니요! 4인분만 가져다주세요."
선소연이 내 말을 끊고 냅다 외쳤다. 많이 먹는 게 부끄러운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그래. 일단 배부터 채워보자. 모자라면 더 시키지 뭐.
치이이익-
어느새 두툼한 삼겹살이 불판 위에 올려졌다. 잡내를 없애기 위함인지 굵은소금이 뿌려져있고 익기 좋게 칼집이 나있다. 육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고기를 녹차와 함께 숙성시키는 것은 '보성녹돈'만의 특징이다.
푸짐한 밑반찬은 또 어떤가.
파절이와 묵은지가 먹음직스럽게 포개져 있었고, 뜨겁게 김이 올라오는 공깃밥과 차돌박이로 육수를 낸 된장찌개의 비주얼은 단연 일품이었다. 이 얼마 만에 보는 제대로 된 식사인가.
"다 익었다. 먹자."
"네!"
나와 소연은 말도 없이 흡입하기 시작했다. 쫄깃하고도 담백한 돼지고기의 맛. 두꺼워서 그런지 수분을 그대로 머금고 있어 풍부하게 느껴지는 육즙. 감동이 벅차올랐다. 너무 행복했다.
부끄러워하던 선소연도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고기 4인분이 동나는 데는 채 5분이 흐르지 않았다. 아까의 쑥스러움은 잊었다는 듯 그녀가 당당하게 외쳤다.
"여기 20인분 더 주세요."
"으잉? 아가씨, 그렇게 많이? 다 먹을 수 있겠어?"
"빨... 빨리 주세요. 너무 맛있어요."
안달 나있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고기에 냉면부터 도시락까지 메뉴판 한 줄을 전부 추가로 시켰다. 오랜만에 폭주한 미각. 우리가 열심히 먹어치우자 아주머니도, 신나는지 줄줄이 가져다주었다.
"저 사람들 봐... 말도 안 돼. 내가 세어 봤는데 벌써 60인분째야."
"속도도 장난 아니야... 푸드파이터 출신인가?"
"푸드파이터라도 저게 가능해? 고기만 먹는 것도 아니잖아."
어느새 테이블에는 빈 그릇으로 가득했다. 주변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군대는 말들이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정확히 때려 박힌다. 소연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배 좀 채웠어?"
"네. 아직 배부르진 않은데, 이제 천천히 먹을까요?"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속삭였다.
"그러자. 여기 20인분만 더 주세요!"
내 외침과 함께 주변에서 감탄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소연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유롭게 고기를 구우며 그녀에게 말했다.
"앞으로 뭐 할 거야?"
"오빠는 군인 계속하실 거예요?"
"아니. 우리가 이 힘을 얻게 된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잖아. 아직 밝히지 못한 비밀도 있고. 우선 천천히 헌터 일을 배울 거야."
"저도 도울게요."
"연습생 생활은?"
"지금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우선은 오빠를 돕고 싶어요. 약속했잖아요. 그때."
약속한 것은 기억 안 난다. 발톱에 찔려 죽어갈 때 그녀가 돕고 싶다고 했던 것만 기억날 뿐.
띠링-
문득 들려오는 알람 소리.
"잠시만. 문자 좀."
[ 강설아 : 오빠 어디야? ]
맙소사... 강설아를 까먹고 있었다. 혼자 기다렸을 텐데... 한성질머리하는 동생의 핀잔을 감당할 생각에 몸이 떨려왔다.
[ 나 : 삼겹살집 ]
[ 강설아 : 이 배신자! 난 누구랑 먹으라고! ]
[ 나 : 같이 먹을래? 아직 많이 남아있어 ]
[ 강설아 : 됐어! 그나저나 지금 헌터 관리국에서 사람 나왔는데? 오빠랑 언니 찾아 ]
[ 나 : 지금 바로 가야 돼? ]
[ 강설아 : 기다리겠대 ]
[ 나 : 금방 갈게 ]
선소연이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봤다.
"설아가 찾네. 일어날까?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근데..."
"응?"
"오빠 돈은 있어요?"
망할... 지갑을 놓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