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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위, 귀환하다-18화 (18/128)

가자! 지구로. (3)

후룩-

혀에 자극적인 향이 가득했다.

뜨거운 물과 스프가 어우러져 나오는 진하디 진한 풍미.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탱탱하고도 쫄깃한 면발. 입안에서 격렬한 격류가 치는 듯한 감각이었다. 싸구려 컵라면에서 이런 맛을 느끼다니.

또 통조림은 어떠한가.

냉동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알래스카에서 갓 잡아온 참치를 바로 외쳐서 먹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졌다. 참치 한 젓가락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감동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오랜만에 나와 소연은 정신없이 흡입했다. 어느새 우리 옆에 쌓여있는 컵라면 10그릇과 여러 개의 통조림 캔. 사실 더 먹을 수 있었지만 눈치가 보여서 못 먹었다. 나머지는 각자 한 개씩만 먹고 만족했는지 더는 먹지 않았다.

"세상에. 일주일치를 한 끼에 다 먹었어..."

강설아의 감탄인지 절규인지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각성하고 나서 열량 소모가 큰가 봐요... 먹어도 먹어도 배가 안 부르네요."

소연이 입가에 묻은 라면 국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변명을 했다. 볼이 붉어져 있는 게 민망한가 보다.

확실히 각성 이후 먹는 양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생선 몇 마리만 먹으면 배가 찼는데 요즘은 둘이서 멧돼지 한 마리를 처리해야 겨우 배가 차는 느낌이었다. 지구로 복귀하면 돈 꽤나 많이 나갈듯싶었다.

"두 분이 먹는 거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게, 먹방 BJ로 전향해도 될듯싶소."

최강수와 구태경이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식사가 끝났다.

근 반년 만에 먹어보는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다만 자제를 못해서 뒤를 생각하지 않고 먹었다는 게 마음에 좀 걸렸지만.

"고마워"

나는 컵라면을 챙겨온 강설아에게 감사를 표했다.

"오빠 주려고 가져온 거였어. 맛있게 먹어서 다행이네."

"맛있는 정도가 아냐."

"먹은 거 이리 줘. 뒷정리하게."

강설아와 구태경이 다 먹은 용기를 수집했고 선소연이 물을 만들어 깨끗이 씻었다. 정리를 마치고 남자들끼리 모여 담배를 피웠다. 역시 폭식 후에는 니코틴이 들어가 줘야 한다. 반초를 태웠을 때 소연이 나에게 다가왔다.

"오빠."

"응?"

"잠깐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여기서 말고요."

얘가 무슨 말을 하려고.

나와 소연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순식간에 동굴 지역을 벗어났다. 다른 인원들도 청각이 발달했기 때문에 단둘이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멀리 떨어져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었다. 어느 정도 움직이자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결정체 말이에요."

"아, 그 말 하려고 했는데."

"우리가 푸른 새 발톱이랑 가죽을 안 헤집어본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

지구로 복귀할 수 있는 힌트가 있나 살펴볼 겸 발톱으로 투척 무기를 만들려 했었다. 그러나 사체들은 단단했고, 상처하나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결정체를 꺼내야 한다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방법은 하나.

그 푸른 새의 가죽을 뚫을 수 있을 만큼 진화하는 것.

"......"

"또 해야겠죠?"

자해를 말하는 것이겠지.

불에 대한 내성을 기르기 위해 팔을 지졌던 것처럼.

소연의 진화를 돕기 위해 익룡의 발톱에 팔을 그었던 것처럼.

그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야지."

"아무래도 나머지 사람들한텐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태경 씨랑 설아 씨가 분명 걱정할 거예요."

"뭐라고 말하지?"

"사체가 커서 결정체 얻는 데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해야죠. 실제로 회복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그동안 이 주변에 크르르들좀 처리해달라고 부탁하면 되겠군."

일기장에서는 균열의 틈을 통해 놈들이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었다. 결정체를 얻음과 동시에 균열이 클리어 된다면 잔존해 있던 사이클롭스 베어들과 함께 빠져나갈 수도 있다. 현 지구의 수준으로 놈들이 한꺼번에 풀리면 큰 재앙이 될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푸른 새의 상처를 입히는 방법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놈들은 6500만 년 동안 끝없이 싸우며 엄청난 힘을 쌓았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종일 살 수도 없는 노릇. 우선 내가 시도한다.

또 강설아가 상처 입는 것이 보기 싫은 이기적인 마음도 있었다. 크르르에게 당한 것은 불가항력이었지만 굳이 더 큰 힘을 줄 필요가 있을까. 지구로 돌아가서 평범하게 본인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

나와 소연은 동굴 앞으로 다시 이동했다.

셋은 정리를 끝낸 후 모여앉아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정리 좀 하셨소?"

최강수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짐작이 간다는 표정으로 포문을 열었다.

"지구로 복귀해야 하는데, 거리가 좀 됩니다. 사체가 많이 커서 결정체를 찾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래서요?"

"저랑 소연이 다녀오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주변에 남아있는 사이클롭스 베어들을 부탁드립니다."

"사이클롭스 베어라..."

"아마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지요. 바뀐 몸도 실험해볼 겸..."

최강수가 팔을 휭휭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태경아."

"응?"

"네가 설아 좀 잘 알려줘. 이것저것 싸우는 방법들."

"오케이. 맡겨줘."

구태경은 각종 무술 유단자다.

특전사 자유대련 당시 나와 항상 순위권을 다투던 내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실력자였다. 강설아의 안전을 지켜주고 잘 교육해주리라 믿었다.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와."

강설아의 배웅을 마지막으로 나와 소연은 사체의 방향으로 점프했다. 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일반 사람이라면 하루에서 이틀 정도 소요되었을 거리를 5분 만에 도착했으니까.

어느새 답이 안 나올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두 마리의 사체가 보였다. 우리는 푸른 새의 발톱 끝부분으로 이동했다. 발톱 하나일 뿐임에도 집채 만했다. 크기가 크다고 날이 뭉툭할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아니었다. 살짝만 스쳐도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예기(銳氣)가 흐르는 게 보기만 해도 위험해 보였다. 실로 위풍당당한 모습.

"으... 저번에도 느꼈던 거지만 자해하는 건 적응이 안 돼요."

"너도 하려고?"

"당연하죠. 설마 혼자 하실 생각이었어요?"

확실히 소연이 더 강력한 신체로 진화하면 앞으로도 크게 도움 될 것이다. 그러나 저번에 팔을 지질 때 선소연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생각났다. 좀 꺼려졌다. 꼬마에게 큰 짐을 지우는 느낌.

"괜찮겠어?"

"이번에도 대신해주세요. 도저히 혼자서는 소름 끼쳐서 못하겠어요."

"일단 나 먼저 해볼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일단 내가 시도해보고 경과를 지켜보자.

나는 저번처럼 왼쪽 팔뚝에다 상처를 내기로 했다. 마땅히 할 부분도 없을뿐더러 다른 부위에 비해 그나마 고통이 적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시퍼렇게 번쩍이는 발톱의 날을 보자 긴장감이 밀려왔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쫄지 말자. 그깟 팔의 상처 정도야 지금까지 해온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스윽-

팔뚝에 섬뜩한 날을 가져다 대는 순간.

"끄아악!"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느껴졌다.

통각 신경이 폭주하는 느낌이었다.

작열통은 새발의 피였다.

깊게 베인 것도 아니고 살짝 가져다 댔을 뿐인데.

더 찌르지 못하고 바로 뺏다.

선소연이 급히 다가와 내 팔을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끄으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새 침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선소연이 급히 물을 만들어 상처 부위를 보호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조금씩 더 벌어지고 있었다. 술에 취한 듯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어떡해..."

"으으... 너가 마저 해줘."

"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더 깊게... 난 못하겠어."

안절부절못하며 고민하던 소연이 굳게 결심했다.

"알겠어요. 오빠 죄송해요."

그녀는 두 손으로 내 손목과 팔뚝을 동시에 잡았다. 강력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악력. 단단하게 잡혀오는게 그녀의 각오가 느껴졌다. 그리고 힘차게 내 왼팔을 발톱에 짓이기듯 눌러 베었다.

"끄아아아!"

"흐윽-"

어느새 보기 괴로운지 소연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왼 팔은 어느새 푸르뎅뎅하게 붓기 시작했고 과다출혈로 쓰러질 만큼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발톱에 독이라도 발려있듯이 온몸의 핏줄이 푸르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푸른 새의 능력도 아닌 단순한 발톱의 힘이 이 정도라니.

"저도 해주세요."

그녀가 덜덜 떨며 왼팔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사람이 버틸 수 없다.

태어나서 겪어본 적 없는 통증.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이런 고통일 줄 알았으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왼쪽 팔의 상처뿐만 아니라 온몸이 아파지기 시작했다.

"제발요."

"......"

"나중에도 외계 종족이랑 싸우게 될 때 오빠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안돼. 죽... 을 수도 있어."

"그럼 혼자 살아서 복귀하라고요? 그건 싫어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요. 고통을 나눌 수 있게 해주세요."

"......"

"싫으면 저 혼자라도 할 거예요."

그녀가 본인의 팔뚝을 발톱에 가져다 대려 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오른손으로 급히 잡았다. 그리고 눈을 쳐다봤다. 흐르는 눈물에 투영된 눈동자에서 꼭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볼 수 있었다. 또 고집을 피운다. 어찌 보면 여동생이랑 성격이 비슷한 것 같다.

"기다려."

사람의 의지로는 절대 혼자 자해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다. 아마 진화된 신체가 아니었다면 벌써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아니 죽었겠지.

어느새 정신이 혼미해져 갔지만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힘을 꽉 주고 그녀의 팔뚝을 발톱에 가져다 댔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한 번에... 단 한 번에... 끝내야 한다.

스윽-

"꺄아 아악!"

나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나에게 안겨왔다.

받아줄 힘이 없었다.

그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함께 쓰러졌다.

정신이 없었다.

"너... 무 너무 아파요."

"... 나도 알아..."

이제는 신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신체의 활기가 없어지고 있었다.

몸이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서서히 생명이 소멸해가고 죽음이 다가온다.

나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푸른 새가 이 공간에 놈들을 가뒀을까?

상처만 입어도 신체가 진화하는 공간.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회복 능력도 무시하는 본인의 힘에 대한 믿음. 불의 왕을 제외하고는 전부 각성할 시간도 없이 죽어나갔던 것이다.

또 왜 푸른 새는 일기장을 쓴 은주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상처를 내지 않았을까?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의식을 잃어가면서 인정했다.

'너무 얕봤구나.'

***

일주일이 흘렀다.

구태경의 지도하에 기본적인 크라브마가 기술을 배우고 있는 최강수와 강설아. 한바탕 연습을 끝내고 휴식을 취했다. 이미 근방의 사이클롭스 베어들은 다 처리했다. 구태경이 갑자기 궁금한 듯 최강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신기하네요."

"뭐가?"

"헌터 각성이란 게 이렇게 쉽나요? 우리는 결정체인가 뭔가 본적도 없고 먹은 적도 없는데..."

"신비한 공간이지. 근데 이건 각성이라 부르기도 뭐 해. 보통 결정체를 먹으면 신체 강화보다는 초능력이 생기거든."

"신체 강화는 다른 균열들도 마찬가지로 생기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보통 들어가는 순간 괴물을 상대할 정도의 신체 향상이 이뤄지니까."

그러나 이 공간은 특별했다.

푸른 새가 남겨놓은 마법. 한계가 없는 공간.

소연이 찾은 일기장을 셋도 함께 봤었다.

서로 상처입힐수록 성장할 수 있는 균열이라니.

최강수는 이런 균열을 들은 적도 본적도 없었다.

구태경이 되물었다.

"그럼 우리도 현이나 소연 씨한테 상처 입으면 되겠네요?"

최강수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도 느끼지 않았는가.

목숨을 건 욕심은 화가 된다.

"사이클롭스 베어한테 당하고 나서 적응할 때 어땠어. 죽을뻔했지. 온몸이 어지럽고 몸에는 힘이 없고, 아마 소연 씨의 회복 능력이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강한 힘이 생긴다면 육체가 버틸 수 있을까? 천천히 성장하는 거면 몰라도 그분들은 격이 달라."

"......"

"분명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거야."

구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듯 하긴 했지만 쉽게 동의할 수도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 땅을 바라보며 듣고 있던 강설아가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오늘도 안 오네요.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이제 잡을 크르르도 없는데."

그녀는 조마조마했다.

어제부터 느껴졌던 불안한 직감.

갑자기 그녀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일어섰다.

"안되겠어요."

"응?"

"오빠랑 언니를 찾으러 가야겠어요."

구태경은 좀만 더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강설아를 말릴 수 없었다. 최강수의 만류에도 고집불통이었다. 강설아를 보호해주기로 했는데 혼자만 보낼 수는 없는 노릇. 결국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혹시나 엇갈릴 경우를 대비해서 동굴 정면에 찾기 쉽도록 간단한 쪽지를 남겼다.

구태경의 주도하에 천천히 이동을 실시했다.

비록 현과 소연이 위험요소를 다 처리했다고 하지만 낯선 공간에서 경계심 없이 갈 수는 없는 법. 하루가 지나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멀리서도 보이는 커다란 괴물의 사체 덕분에 길을 찾는 것은 쉬웠다. 다만 수색하기 엄두가 안 날 정도로 커다란 것이 문제였다.

"아직 푸른 새 내부에서 헤매고 있는 거 아니에요?"

강설아가 푸른 새의 사체를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막상 앞에서 보니 대단하네... 딴딴하기도 하구요."

"서로 500m 간격을 두고 찾아보자고. 태경이가 좌측으로 돌고, 설아가 우측으로 돌아. 나는 안 쪽으로 들어가 볼게."

최강수의 지시 아래 수색을 개시했다.

셋은 사체를 뚫고 들어간 흔적이나 구멍을 발견하면 소리를 질러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이들은 현과 소연이 커다란 새의 내부에 있다고 생각했다. 본인들의 힘으로 가죽을 뚫을 수 없으니 구멍을 통해 찾으려는 생각이었다.

"태경! 설아!"

신호가 오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멀리서 메아리치는 최강수의 고함 소리.

태경과 설아는 순식간에 달려왔다.

"뭐, 찾으셨어요?"

"이... 이리 와봐..."

강설아는 최강수의 떨리는 말투에서 심장이 철렁함을 느꼈다. 서둘러 그의 앞을 지나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꺄악!"

그곳에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현과 소연의 주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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