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17화 (17/128)

가자! 지구로. (2)

설아가 가져온 짐들은 우리가 처음에 떨어졌던 장소에 있다고 했다. 최강수와 구태경이 짐을 찾으러 이동할 준비를 했다. 그때, 소연이 나와 태경이 했던 말을 들었는지 먼저 나섰다. 하긴, 집중만 하면 수 킬로미터밖에 산짐승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그녀에게 겨우 동굴 속에서 떠드는 말이 안 들렸을 리 없다.

"제가 설아 씨랑 짐 찾아올게요. 옷도 빨리 갈아입고 싶고..."

"크흠..."

구태경이 민망한지 헛기침했다.

"그래요. 제가 언니랑 다녀올게요. 아마 사이즈도 맞을 거예요."

강설아는 어느새 선소연이 마음에 꼭 들었는지 언니라 부르며 맞장구쳤다. 그녀들이 나를 쳐다보며 허락을 구했다.

사실 아직까지 적응이 안 됐다.

늦둥이로 자라 귀여워만 했었던 여동생이 위험한 곳에 떨어져서 함께 있다는 것이. 뭐 걱정은 없었다. 이제 완전히 적응해서 크르르 정도는 가뿐히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놈 이상의 외계 종족들은 소연이와 내가 씨를 말렸다. 고유 능력이 '은신'인 군단장급 괴물이 숨어있지 않은 이상에야 위험할 일은 없다. 무엇보다 소연이 함께 가니 안전은 확실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빙긋 웃은 소연이 설아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꽉 잡아요. 좀 어지러울 수도 있어요."

"네? 네..."

설아가 머뭇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자.

스팟-

"사... 사라졌어?"

구태경과 최강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 눈에는 단순히 점프해서 이동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다른 이들에겐 순간이동하듯 보였나 보다.

여자들을 보냈으니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해 봐야겠다. 나는 놀라고 있는 둘에게 손짓을 했다.

내 예상에 결정체의 위치는 분명히 물의 왕이라는 존재. 푸른 새의 내부에 있을 것이다.

일기장에 따르면 그가 이 균열의 주인이었으니. 결정체는 하나, 이곳의 인원은 다섯. 먼저 소유권에 대한 토론을 해야 한다. 당연히 나 혹은 소연이의 것이라 생각하지만 불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 그전에...

"태경아, 혹시 담배 가져온 거 있냐?"

오랜만에 연초가 땡겼다.

***

강설아는 정신이 없었다.

분명히 동굴 앞에 있었는데 선소연의 손을 잡자 시야가 점멸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짐 앞으로 와있었다. 몸이 뜨는 느낌과 떨어지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기괴한 경험이었다. 본인도 각성해서 어느 정도 헌터의 신체에 적응했다고 느꼈지만 선소연의 능력은 무언가 격이 달라 보였다.

"대단해요!"

감탄을 토해낸 강설아는 본인이 챙겨온 짐을 풀기 시작했다.

"와... 많이도 싸오셨네요."

커다란 가방과 캐리어 2개를 보고 선소연은 오랜만에 설렘과 향수를 느꼈다. 반년간의 정글 생활 동안 느끼지 못했던 지구의 물품들. 그동안 겪었던 위기와 역경이 스치듯 떠올랐다. 이제 곧 지구로 가겠구나.

"이거 입어 보세요. 겨울이라 따듯하게 입을 수 있는 거로 만 가져왔어요."

"춥진 않은데..."

"보는 제가 추워 보여서 그래요."

길고 두꺼운 캐주얼 슬림 핏 후드와 입기 편한 긴 바지, 속옷세트를 건네받은 소연이 옷을 갈아입었다. 해져버린 원피스는 숲속에 내다 버렸다.

"훨씬 낫네요."

"그래요?"

"그리고 이리 와보세요. 화장품도 가져왔는데... 음... 필요 없겠다! 언니는 화장 안 해도 빛이 나니까요."

"에이- 설아 씨가 훨씬 예쁜 것 같은데, 현이 오빠 여동생이라고 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 순간, 강설아가 멈칫- 했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선소연을 응시했다. 마치 고양이가 올려다보는 듯 동그란 눈이 반짝반짝하는 게 참 부담스럽다.

"왜... 왜요."

"우리 오빠랑 무슨 사이에요?"

강설아는 궁금했다.

오빠와 선소연의 균열 극복기를 들었을 때는 마치 로맨스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처럼 빠져들었다. 남녀가 낯선 곳에 떨어져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며 사랑에 빠진다. 이 얼마나 로맨틱한 소재인가.

23년 인생에서 오빠의 여자친구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여자는 언제 만날 거냐.

결혼 생각은 있는 거냐.

가족끼리 모이면 항상 나오는 주제였다.

물론 엄마와 강설아의 주도였지만.

속으로 오빠가 게이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천사같이 예쁜 사람이 있었다니.

속으로 점 찍어놨던 희수 언니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아... 직 아무런 사이 아니에요."

김이 샜다.

오빠가 그러면 그렇지.

이런 여자와 함께 반년이나 함께 지냈는데도 발전이 없다니 가당키나 한 이야기인가. 잠깐... 그런데 아직이라고? 그럼 소연 언니는 오빠한테 마음이 있는 거구나.

"이리 와보세요."

강설아는 짐을 뒤적뒤적 거리며 화장품 세트를 찾았다. 먼저 손거울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계속 뒤적였다. 깊은 곳에 놔뒀나 보다.

선소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거울을 집어 들어 본인의 얼굴을 비췄다. 반년 만에 보는 본인의 얼굴. 깜짝 놀랐다. 피부가 옛날이랑 확실히 달라졌다. 입술 아래 있던 점도 사라졌고, 콤플렉스였던 왼쪽 볼에 기미도 완전히 사라졌다. 피부 세포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얗다.

"진심 너무 예쁘세요. 무슨 연예인 같아."

"아..."

어느새 작은 사각 파우치를 꺼내든 강설아가 선소연의 앞으로 다가왔다. 직접 화장해주려는 건가.

"괜찮은데..."

"남자들은 똑같아요. 그냥 예쁘면 돼요. 지금도 예쁘시지만 포인트를 좀 살리면 더 매력적일 거예요."

내심 기대하는 듯 빼지 않고 얼굴을 들이미는 선소연. 강설아는 성심껏 소연의 메이크업을 도왔다. 베이스부터 눈, 눈썹, 입술, 볼 터치까지 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손놀림이 화려하고 전문적이다.

"되게 잘하시네요?"

"어! 움직이지 마세요. 제가 이래 봬도 패션 뷰티학과 출신이랍니다."

"......"

"됐다!"

어느새 리터치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설아가 감탄을 했다. 진한 눈썹과 커다래진 눈, 청순미 넘치는 도톰하고 붉은 입술. 여자가 봐도 가슴이 쿵쾅거리는 미모였다.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든 기분이었다.

"이제 갈까요?"

***

"먼저 결정체에 대한 이야기인데..."

"높은 확률로 푸른 새의 내부에 있을 것이오. 난 욕심없소. 당연히 그짝 것이지. 목숨을 구해준 것만으로 감지덕지하고 있수다."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최강수가 치고 나왔다. 꺼내기 힘든 말이란 걸 인지했는지 먼저 말을 꺼내 못을 박아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소연이가 오면 마저 하도록 하죠."

"그나저나 큰일이오. 지구에 이런 위기가 있다는 것을 밖에선 아무도 몰라. 전부다 자기 잇속 챙기기만 바쁘지. 정부가 만든 헌터 아카데미도 사실 텅 빈 껍데기일 뿐이오. 이번에 뽑혀서 각성한 자들 전부 누군지 아쇼?"

"누군데요?"

"다 이름만 들어도 알법한 고위직 자제분들이시지. 이미 우리나라는 금력과 공권력에 휘둘리고 있소. 사실 각성이란 것도 어느 정도 전투 센스가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건데, 샌님들이 본인 안전을 위한답시고 결정체 공급을 다 감당하고 있으니... 위기감들이 없어요. 위기감이... 이대로 흘러가다간 그 외계 종족이란 놈들이 왔을 때 다 끝장날 거요."

"그래도 꾸준히 각성하는 자들이 늘고 있으니 어느 정도 버텨주지 않을까요?"

"글쎄올시다, 그놈들이 정작 위기가 닥쳤을 때 발 벗고 나와 싸워줄 거라 생각합니까? 본인 안전 챙기기 급급할 거외다. 쯧쯧"

최강수가 열변을 토했다.

맞는 말이다.

정부가 꽉 잡고 통제하고 있으면 이득도 있겠지만 실이 크다. 물도 고이면 썩는 것처럼 각종 부패와 비리가 들끓겠지. 그렇다고 통제 없이 내버려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시민들의 안전 문제도 있으며, 각종 기업들이 난입해서 이권을 챙기려 할 테니. 어차피 완벽한 방법은 없다. 내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그짝이 나가서 힘을 드러내고 사실을 알려야 하오. 사이클롭스 베어를 맨손으로 잡는 사람 앞에서 걔네들이 뭔 말을 할까."

"글쎄요. 갑자기 발견되지도 않은 균열에서 튀어나온 사람이 곧 외계 종족이 침공한다고 말하면 믿을까요? 혹여 우리나라가 믿어준다 해도 전 세계에 알려야 하는 건데."

물론 세상이 요지경이 된 것이 반년밖에 안됐다 했으니 완전히 고착화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사람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알려야지요. 눈뜨고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요. 기존의 질서를 바꿀 생각은 없어요."

물론 나라를 지키고 외계 종족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다. 그렇다고 기존의 체계를 부수고 새로 만든다? 힘이 있다고 그것을 남용하는 것은 독재나 다를 바 없다. 또 갑자기 강력한 사람이 나와 모든 것을 틀어잡으면 시기하는 집단이 생기기 마련.

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 생각에 가장 좋은 것은 본인들이 위기를 깨닫고 여론에 의해 질서가 잡히는 것이다. 나는 흥분한 최강수 헌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천천히 사람을 모을 겁니다."

"사람이요?"

"제가 힘이 있다고 뭘 알겠습니까. 정치를 해본 것도 아니고, 남들을 매료시키는 연설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는 사람 죽이는 거만 수천 번 훈련해온 군인일 뿐입니다."

"군인은 잘렸다든디..."

"모난 돌은 정 맞기 마련입니다. 서서히 그 질서에 녹아든 후에 차근차근 헌터 일을 배울 겁니다. 어차피 현 지구 수준으로 놈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소연이랑 둘이서 날뛴다고 전 세계를 지킬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공간의 제약이 있으니..."

"우선은 각자 소임을 다해 헌터 일을 열심히 하는 걸로 합시다. 하다 보면 길이 보이겠죠."

세계를 구한다? 지구를 지킨다? 아직 생각해본 적 없다. 군 생활하면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신조는 있었지만 나 역시 이기적인 사람일 뿐.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데에도 벅차다.

"오빠들 무슨 이야기들 하세요? 저희 왔어요!"

어느새 친해진 듯 소연의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는 강설아가 보였다. 그리고 옆에 있는 선소연의 모습.

평소와 다르게 다소곳이 서있다.

나는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정신이 멍해졌다. 저... 저것은...

나는 천천히 일어나 소연에게 다가갔다.

옆에는 여동생이 무슨 일인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 이것은"

"아니... 설아 씨가 화장해준다고..."

"컵라면이라니!"

소연이 한가득 들고 있는 컵라면과 통조림! 반년 동안 텁텁한 생선과 간이 배지 않은 고기만 먹다 보니 얼마나 질렸던가. 자극적인 MSG의 맛이 너무 그리웠다.

강설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에라 이 화상아!"

설아가 왜인지 힘껏 발로 차는 것 같았지만 아무런 충격이 없었다. 혼자 다리가 아픈지 끙끙대며 날뛰는 그녀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