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11화 (11/128)

풀려가는 실마리. (4)

청각으로 들리는 게 아니었다.

머릿속을 찌르듯 무겁게 울려왔다.

처음 들어보는 언어였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나는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이곳에 갇혀 싸운지 수천만 년이 흘렀다. 너희 같은 생물들은 처음 본다.]

갇혀서 싸웠다는 표현은 외계 종족이라는 뜻.

본능이 말했다. 그간 잡았던 괴물들과는 존재 자체가 다른 놈이라고.

게다가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니. 위기감이 들었다.

일단 침착하고 대화하기로 했다.

"어디서 말하는지 밝혀라."

[웃기는 말이다. 네가 지금 밟고 있다.]

'내가? 무얼?'

이곳은 숲속.

이상하게 바위들이 많고, 나무가 적다.

처음에는 돌산이겠거니 했는데 주변에 괴수들이 보이지 않는다.

밟고 있는 바위가 묘하게 붉다.

쿠르르르-

땅이 흔들렸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적어도 리히터 규모 7.0 이상의 강진이다.

바닥이 갈라지고 바위들이 생기있게 움직였다.

서 있는 곳의 고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돌산이 일어났다. 엄청난 크기의 골렘.

산에 있던 흙, 나무, 바위들이 모두 이 존재의 몸통이었다니.

내 위치는 놈의 어깨 위.

이런 괴물과 싸워야 한다니 도저히 각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대화로 풀어보기로 했다.

나는 내가 밟고 있는 땅 위에 대고 소리쳤다.

"너는 누구냐!"

[나는 불의 종족. 불의 힘을 다룬다. 너의 경험에 따르면 군단장쯤 되는 위치다.]

군단장?

놈들에게도 계급 체계가 있었구나.

군 기준으로는 쓰리스타.

거의 끝판왕 수준이다.

다행인 건 다짜고짜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화를 할 의지가 있어 보였다.

놈은 형형한 눈빛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움직일 때마다 대지가 쩍 갈라지고 폭풍이 휘몰아쳤다.

무시무시한 힘과 압력이 느껴졌다.

나는 움직이는 바위 위에서 위태롭게 서서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가 뭐지."

[원하는 게 있다.]

"무슨..."

[나는 불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전사다. 물의 왕. 날 죽이지 못했지만 불의 능력을 잃었다.]

물의 왕이라면 수호신을 말하는 건가.

그리고 불의 능력을 잃었으니 도와달라고?

[불의 종족은 태생적으로 물에 약하다. 수많은 아군들이 죽었다. 이곳에 갇히기 전 총사령관과

많은 군단장들이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우러 오지 않는다. 나는 지쳤다.]

이곳에 갇히기 전이라면 일기장에 써져있던 6600만 년 전.

지금 지구를 침공한다는 놈들도 불의 종족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지쳤다니?

놈은 이곳에 틈이 생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나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불의 능력을 잃은 나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나를 무(無)로 보내라.]

죽여달라는 건가.

지금껏 미친놈처럼 동족을 학살하고 다닌 나에게?

그리고 제일 큰 문제점은.

"물의 왕도 못 죽인 너를 내가 어떻게 죽여."

[군단장들 이상부터는 고유 능력이 존재한다. 내 능력은 회복이었다. 그 덕분에 살아남았지만 이젠 고유능력도 사라진 상태.

물의 힘을 이용해 핵을 부순다면 나를 죽일 수 있다.]

"물의 힘? 그런 거 없는데."

움직이던 놈이 우뚝 섰다.

아래에는 거대한 호수가 보인다.

괴물들만 아니었다면 그림의 한 폭처럼 아름다운 정경이었을 텐데.

거 그그그-

중심에서 새빨간 바위가 튀어나와 내 앞으로 올라왔다.

[이것이 핵이다.]

"핵이건 뭐건 물의 능력 따윈 없다고."

[이곳에 너만 있는 게 아니다. 너와 똑같은 생물이 있다. 물의 힘을 가졌다.]

나와 똑같은 생물?

소연이.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다 봤다.

구 그 그그그-

골렘이 거대한 손을 호숫가로 뻗었다.

거칠고 억센 바람소리와 함께 엄청난 흡입력이 느껴졌다.

아래에 보이는 큰 호수에서 작은 파면이 일었다.

그곳에서 작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엄청난 스피드로 나를 향해 날라왔다.

개미같았던 그것은 점점 커지며 형체가 드러났다.

너무나도 반가운 존재. 나는 잽싸게 팔을 뻗어 날라오는 그녀를 받아냈다.

갈비뼈를 누르는 볼륨감과 탄력적인 감촉이 느껴졌다.

치열한 생존을 함께했던 사람.

그동안 끔찍하게 찾았던 사람.

선소연이었다.

***

생에 두 번째 추락.

북한산에서는 정신을 잃어 느끼지 못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느껴지는 떨어지는 감각.

마치 자이로드롭을 탄 느낌이었다. 그건 별로 무섭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붉은 익룡과 그 밑 발톱에 꾀어있는 한 남자.

그가 사라져가는 게 더 큰 공포였다.

날아가는 그의 모습에 시선을 떼지 않았다.

두려웠다.

이번에는 진짜 가망이 없어 보였다.

마음속에 불안함이 커져갔다.

익룡에게 뜯겨먹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속이 답답해져 왔다.

그러나 분명 믿으라 했다.

오빠는 분명히 살아남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생존.

꼭 살아서 만나러 갈 거야.

풍덩-

온몸에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

물속으로 떨어졌다. 이곳에 호수가 있었나?

큰일이다. 24년 동안 춤과 노래만 배웠지 수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첨벙- 첨벙-

어푸- 어푸-

미친 듯이 팔을 휘저었다. 코와 입으로 물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괴로웠다.

발버둥 칠수록 몸이 가라앉았다.

오히려 진화된 신체가 몸이 뜨는 것을 방해했다.

물을 한번 때릴 때마다 호수가 흔들리고 파도가 생겼으니까.

익사라니.

그를 만나러 가겠다고 다짐한지 몇 초나 흘렀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물귀신이 끌어당기듯 호수 밑으로 끊임없이 내려갔고 숨이 막혀왔다.

호수는 깊었다.

폐에 물이 차는 게 느껴졌다.

수압이 느껴지고 내려갈수록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는 거야.

몸이 무거워지면서 의식이 흐려졌다.

이렇게 죽긴 싫어.

그날 나는 생전 처음으로 욕을 했다. 씨발.

***

눈을 번쩍 떴다. 어둡고 축축하다.

어떻게 된 거지?

숨을 크게 빨아들이자 몸 안으로 물이 쑥 들어온다.

뽀글뽀글-

온몸이 간질간질 거리며 기포가 쏟아져 나온다.

물을 마셨는데 숨이 쉬어지다니. 모공에 아가미라도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이곳은 내가 떨어진 호수 속.

생전 처음 들어온 물 속이 이상하게 편안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기괴한 암벽들과 수중생물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생각보다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블루홀에 빠진 것처럼 위에는 개미보다 작은 하얀 빛이 보였다.

저곳이 출구. 너무 멀다. 빛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시야가 답답했다.

빛살이 보이는 곳으로 힘차게 점프해 봤지만 중간도 못 가고 가라앉았다.

빨리 지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물속에서 적응하는 데는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점프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숨 쉬면서 필요한 만큼의 물을 섭취하는지 갈증은 없었다.

잠도 거의 자지 않은 것 같았다.

오로지 점프만 수천, 수만 번 반복했다.

배고플 때는 새우나 오징어 등을 생으로 뜯어 먹었다.

육체적으로 힘들진 않았다.

걱정이 됐다.

과연 그가 살아있을까?

살아 있다고 해도, 이곳에 빠진 나를 찾아낼 수 있을까?

지구로 복귀할 방법을 찾아서 혼자 나가진 않았을까?

헉, 그건 너무 무섭다. 빨리 나가야 한다.

정신력의 한계가 찾아왔다.

물속은 편했지만 두려움은 커졌다.

평생 이곳에 갇혀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암벽을 타고 올라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미끄러지면 다시 원상태였다.

마치 옛날 유행하던 항아리 게임을 하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부력이 있어서 가만히 있어도 위로 뜬다던데 왜 나는 안될까.

구 그 그 그-

어느날 땅을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내 몸을 무언가가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비정상적인 압력이 날 옭아매는 거북한 느낌.

그래도 좋다. 나갈 수만 있다면!

빛이 가까워졌다.

희망이 생겼다.

첨벙-

수면을 해쳐 나왔다.

몇 달 만에 보는지 모를 눈부시게 새하얀 빛과 상쾌한 공기에 감동이 몰아쳤다.

너무 아름다운 지상의 광경에 눈물이 나왔다.

몸이 계속 하늘로 날아올랐다.

커다란 골렘.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돌무더기들이 보였다.

'이게 뭐람.'

순간 그 돌 위쪽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존재.

'어... 어어! 잠깐 부딪치겠다.'

내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그에게 날아가고 있었다.

별수 없네.

힘껏 그의 몸을 껴안았다.

***

나는 오랜만에 소연이와 회포를 풀었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들어주고 말해줬다.

물론 무시무시하게 생긴 골렘 어깨 위에서.

그간 삭막했던 얼굴 근육이 풀어졌다.

기다리던 골렘이 지겨웠는지 빨간 핵을 들이밀며 재촉했다.

[물의 힘을 가진 자가 이 핵을 부순다. 나는 소멸한다.]

"아까부터 저게 무슨 말이에요?"

"너가 물속에 있으면서 물의 힘을 각성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

[난 불의 종족. 물에 약하다. 부숴라.]

감정의 고조 없이 반복된 음파만 보내는 골렘.

말 그대로 지쳐 보였다.

비록 지구를 침공한 외계 종족이었지만,

소연을 찾아준 괴물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놈과 싸워서 더 강해지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도박.

위기를 자처할 수는 없었다.

원하는 대로 죽여주기로 했다.

"고마웠어요. 골렘 아저씨."

인사성도 밝다.

급조로 스트레이트 자세를 배운 소연은 감사함을 전하며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핵에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쿠웅-

빨갰던 핵은 평범한 돌의 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거미줄처럼 쫙 쫙 금이 가더니 부스스 흘러내렸다.

쿠르르르-

놈의 최후는 굉장했다.

핵이 부서짐과 동시에 돌산을 이루고 있던 거대한 몸뚱이가 으스러져 가루가 되었다.

순식간에 모래사막 하나가 만들어지는 모습.

돈 주고도 못 볼 광경이었다.

***

그간의 고달픔과 외로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 한 명의 존재.

혼자일 때와 둘일 때의 차이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다시 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와는 예전보다 더 친해진 것 같았다.

24시간 내 몸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는다.

입맛도 돌아왔다.

멧돼지를 통으로 구워서 먹기도 했고

탕을 끓여먹기도 했다.

크르르들은 더 이상 우리 쪽으로 오질 않았다.

힘의 격차를 느꼈는지 본능 적으로 피해 다니는 듯했다.

흉측하게 생겨서 먼저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딱히 잡을 생각도 없었다.

계획을 새로 짰다.

제일 높은 고지에서 지도를 그렸고 외곽 쪽 산부터 돌며 남은 외계 종족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혹시라도 지구로 복귀할 수 있는 힌트가 있을까 군데군데 흔적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이곳에 군단장 이상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우리의 상대가 될만한 놈들은 없었다.

거주지는 필요 없었다.

노숙에 익숙해져 있었기도 하고

주먹 한방이면 넓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곳곳을 빈틈없이 돌아다녔고

크르르를 제외한 모든 괴물들을 소멸시켰다.

왕이었다는 괴물과 푸른 새의 사체를 둘러보기도 했다.

딱히 나오는 것은 없었다.

사체들은 단단했다.

갖은 수를 다 써봐도 상처하나 낼 수 없었다.

아마 수천 년 동안 진화하고 또 진화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공간도 참 사기다.

이런 곳에 적들을 가둔 푸른 새는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인지...

우리는 점점 의욕을 잃어갔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떨어졌던 숲.

그쪽에서 힌트를 찾아보기로 했다.

거기서 안 나오면, 틈이 완전히 열리길 기다리며 살아야지.

그때였다.

이동하던 중에 희미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진화된 귀가 아니라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작게 들렸다.

(꺄아악-)

여성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멈칫- 한 나는 소연을 쳐다봤다.

"무슨 소리죠?"

그녀도 들은 것 같다.

(제기랄 피해!)

곧이어 들리는 남성의 외침.

"가보자."

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달려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들떠 보인다.

사람에 대한 고픔.

지구에 대한 단서.

나뿐만 아니라 그녀도 절실히 원하고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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