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9화 (9/128)

풀려가는 실마리. (2)

[2009년 12월 7일]

이곳에 떨어진 지 3일차.

지금부터 기록을 시작한다. 휴대폰은 먹통이 되었고 가져온 시계로 날짜를 센다. 밖에 소리가 들린다. 산짐승의 소리라 믿고 싶지만 그러기엔 이 소리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생소하다. 무섭고 외롭다. 컴컴한 공간에서 숨죽이고 있을 때는 숨이 턱 막힌다. 내 딸, 은주가 보고 싶다.

[2009년 12월 10일]

이곳의 낮과 밤은 한국과 정반대인 것 같다. 그래도 24시간 주기인 건 비슷하다. 그러나 이곳은 확실히 지구가 아니다.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봤다. 긴급히 폭포 뒤로 도망쳤다.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떨어지는 물이 몸에서 나는 향을 줄여주는지 괴물들은 금방 돌아갔다.

[2009년 12월 11일]

구석에 숨어 의미 없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굶주렸다. 5일 동안 계곡에 있는 물로 배를 채우고 있다. 아직도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내 미래가 보인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쓸쓸하게 죽어가는 모습이.

[2009년 12월 12일]

오늘은 신비한 경험을 했다. 숲을 전부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날아왔었다. 분명히 낮이었는데도 밤이 된 것처럼 어두워졌다. 주변에 있는 흉포한 괴물들이 그 존재를 공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언가는 강력했다. 하늘이 번쩍이고 수많은 괴물들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고하게 생긴 푸른 새.

나는 그 존재를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빛이 없는데도 푸르게 빛나는 것이 사파이어로 온몸을 치장한 느낌이었다. 너무 커서 전체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그 새는 나에게 호의가 있는 듯싶었다. 신기한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내 생각을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 있었고, 내 머릿속에도 그 새의 생각이 틀어박혔다.

그 새는 지구가 탄생할 때부터 존재했던 것 같다. 지구의 내핵에는 거대한 에너지가 있고, 이것을 노리는 종족이 많이 있었다고 했다. 수많은 외계 종족으로부터 이곳을 지켜왔다고 말했다. 세상에, 지구를 지키던 수호신이라니.

약 6,600만 년 전, 불의 힘을 다루는 종족이 쳐들어왔다고 했다.

유카탄 반도에서 이루어진 큰 전투.

힘이 빠진 새는 최후의 힘을 써 이 공간에 그 종족들을 본인과 함께 봉인했다고 했다. 왜 그런 곳에 하필 내가 휘말린 걸까. 몇 가지 사실을 내게 전달했다.

알기 쉽게 정리해봤다.

1. 이 공간은 그 새의 고유 공간으로 한계가 없는 공간이었다. 만약 어떤 존재에게 큰 상처를 입으면, 그 존재를 이길 수 있도록 성장한다. 불 외계 종족의 왕과 수천만 년 동안 이곳에서 전투를 했고, 서로 끊임없이 성장했다고 했다.

2. 이 종족의 침공이 다가오면 이 균열의 틈이 생기게 되고, 그 틈을 통해 불의 종족의 왕이 나가게 되면 지구가 소멸할 정도의 힘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했다.

[2009년 12월 15일]

나는 푸른 새의 도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새의 마법 같은 능력은 내 배고픔을 없애주었고, 신체능력도 강화시켰다. 그분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떨어진 게 이 종족의 침공이 다가오는 증거라고. 틈이 완전히 벌어지기 전에 여기 있는 모든 불의 종족들을 소탕해야 한다고. 절대 지구의 틈으로 이 종족들이 나가서는 안된다고. 혹시 자신이 지게 되더라도 왕은 데려갈 테니 뒤를 부탁한다고 했다. 마치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는듯했다.

[2009년 12월 16일]

천지가 진동하고 대지가 흔들린다. 하늘을 찢어발길듯한 소리와 눈부신 섬광이 이어 터졌다. 치열하다. 온몸이 아프다. 두 괴물의 전투의 여파만으로 내 오장 육부가 찢어져 나가고 있다. 동굴에 숨어있어도 소용이 없다. 이미 수많은 괴물들이 소멸했고 공간이 파괴되고 있다. 나는, 살고 싶다.

[2009년 12월 17일]

온몸에서 죽은 피가 흐른다. 죽어가는 게 느껴진다. 손이 떨리다. 글을 쓰기도 힘들다.

보고 싶다 은주야....

***

"맙소사......"

헛웃음이 나왔다.

지구에 있었다면 거짓말이라 치부했겠지만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일기장을 정독하고 또 정독했다. 여러 가지 정보가 머릿속에 쏟아지다 보니 마치 깨진 유리조각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이 내용을 제대로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을 잊었다.

먼저 천천히 호흡을 다스리고 생각했다.

알고 싶었던 이 공간의 비밀.

공룡 멸종의 유력한 근거로 알려진 유카탄반도.

외계 종족의 침공.

인류의 문명이 꽃 피고 있을 때, 그늘에서 이런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혼란스럽군."

한참의 적막 후 내가 던진 첫 마디였다.

"우리가 죽은 게 아니었어요."

옆을 바라보자 소연이 감정에 복받친 듯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살아있는 걸 확인하니까 기쁜가?"

"아니요, 그것보다는... 그냥 마음 한편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은 것 같아서요."

"그건, 다행이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미소 지으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지금껏 혼자 마음고생했는지 눈에 눈물이 넘칠 듯이 그득 괸 상태가 안쓰러워 보인다.

그러나 아직 좋아하기는 이르다. 지구로 복귀할 일말의 힌트는 얻었지만 정확한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고 아직 이곳은 우리에게 위험한 공간이다.

"우선 정리해보자."

"그래요."

그녀는 민망했는지 씩씩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고지에서 봤던 그 커다란 괴물들 말이야."

"저도 그 생각 했어요."

"그 파란 괴물이 수호신이었던 것 같아."

"빨간 호랑이같이 생긴 애가 지구를 침공했던 외계 괴물이었겠네요. 수호신의 호적수였던?"

"이걸 봐."

나는 일기장을 펼쳐 한 문구를 가리켰다.

[혹시 자신이 지게 되더라도 왕은 데려갈 테니 뒤를 부탁한다고 했다.]

쓰러져있었던 두 괴물.

찢어진 날개.

은주 아버지 시체의 부패도.

시체가 완전히 부패하여 백골만 남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7~10년.

정보들을 조합해 봤을 때, 천지가 요동쳤다는 치열한 전투가 끝난지 채 10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양패구상(兩敗俱傷).

최선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최악의 결과는 피했다.

해답이 없을뻔했던 생존율이 조금이나마 올라간 것이다.

"수호신이 왕을 죽이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아. 문제는 내가 봤었던 빨간 익룡이야. 아직 잔재들이 남아있어. 누가 더 있을지도 모르고."

"불의 힘을 다룬다고 했어요."

"그리고 우린 불에 약해."

진화된 육체를 실험할 때 라이터 정도의 화력에도 검게 그슬렸었다.

놈들이 불을 제대로 다룬다면 한층 어려워진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요. 우리는 분명 이곳에 떨어졌을 때도 몸에 변화가 있었잖아요."

"추락 중 부상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필수 조건일 수도 있고. 그것보다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건 하나야."

"뭔데요?"

갑자기 강해진 이유.

크르르에게 큰 상처를 입었다.

때문에 놈을 간단히 이길 수 있을 만큼 진화했다.

지금 놈들에게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더 강해지는 것."

***

계획을 새로 짰다.

목적지로 가는 것을 유보했다.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진 이상 목표를 바꿔야 했다.

내 최종 목표는 생존.

일기장에선 외계 종족의 침공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즉, 기회가 와서 지구로 간다 해도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다.

여기서 최대한 강해질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

또, 이곳에 있는 괴물들이 지구로 나가게 되면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이 공간 전체를 수색해서 놈들을 몰살시켜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잡느냔 거죠."

소연도 골머리가 아픈지 머리카락을 잡고 배배 꼬며 고뇌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이 안 나온다.

크르르를 단숨에 잡아먹었던 무시무시한 존재.

이 공간에서 성장하려면 놈과 싸워야 한다.

단, 조건이 있다. 싸우되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

크르르만 해도 천운이 따랐기에 망정이지, 한낱 먹이로 전락할 뻔했다.

"일단, 불에 대한 저항력은 길러놔야 해."

"어떻게요?"

"지져야지."

***

작열통(灼熱痛)

인간이 느끼는 고통 순위를 말할 때 항상 1위를 다툰다.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그것도 불에 대한 저항이 생긴다는 확신도 없이 분신을 한다는 것은.

먼저 왼쪽 팔뚝만 지져보기로 했다.

회복은 빠르게 되는지, 저항력이 얼마 정도 높아지는지 실험을 해볼 생각이다.

모닥불은 빠르게 피워졌고 그 모습을 소연은 질색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모해요. 도전정신이 아니라 그냥 무모한 사람이었어."

소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불안한 눈빛을 보낸다.

"넌 굳이 안 해도 돼. 우선 실험해보고 효과가 있으면 그때 생각해보자."

"아니요. 할 거면 같이해요."

하는 말은 비장한데,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 언밸런스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왼쪽 팔을 뜨겁게 타오르는 불 끝에 살짝 가져다 댔다. 열이 올라온다. 순식간에 온도가 높아지며 자극이 화끈하게 올라온다. 눈살을 찌푸렸다.

"끄으-"

참으려 했지만 신음이 자동으로 흘러나온다. 피부조직은 어느새 벌겋게 홍반(紅斑)이 생겼고, 쭈글쭈글하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물집이 터지기 시작하며 진액이 흘러나온다.

참아야 한다.

이 정도 고통도 못 참으면 지구 복귀는커녕 생존도 못할 것이다. 지켜보던 소연이 보기 힘들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린다.

대략 15초 정도 흘렀을까.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팔을 뺏다.

피부는 이미 누렇게 익어있었다.

"괜찮으세요?"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여기 주변에서 하룻밤 보내고 상태를 보자."

"저도 할거에요."

내가 고통받는 동안 마음을 굳혔는지 당당하게 팔을 불로 내민다. 상태보고 나중에 해도 된다니까. 어떤 상황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본인이 하겠다는데 구태여 말릴 생각은 없다. 그녀는 몇 번 손을 넣다 뺏다 하더니 나를 쳐다봤다.

"혼자선 도저히 못하겠어요."

"무리할 필요 없어."

"대신해주세요."

덜덜 떨리는 팔을 나에게 내민다.

못해줄 건 없지.

한숨을 내쉬고 그녀의 팔을 꽉 잡았다.

"오빠가 한 만큼 해주세요. 제가 못하겠다고 해도. 강제로."

고개를 끄덕거린 나는 재빨리 팔을 집어넣었다.

이런건 빠르게 해야지 미적거리면 공포감만 커질 뿐이다.

"끄읍! 끼약!"

높은 톤의 비명소리가 토해진다.

그녀는 참기 힘든지 발을 동동 구르면서 오른쪽 손을 파닥파닥 거리기 시작했다.

소연이의 팔도 나와 비슷하게 익어갔다.

끼아아아아악!

무슨 여자애 소리가 이래. 응?

일순 등줄기가 스산해졌다.

갑자기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

위화감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놈이다.

크르르를 잡아먹었던 빨갛고 거대한 익룡.

허공을 찌르는 소리와 함께 내려온 놈은 벼락같은 기세로 날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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