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육군대위, 귀환하다-6화 (6/128)

각성의 시작. (2)

나는 어렸을 적부터 TV에 나오는 춤과 노래를 곧장 잘 따라 했다.

'끼가 참 많은 아이구나'

주변 어른들이 나를 보면 웃으며 이런 말을 했었다. 조그마한 애가 끼가 많자 신기하게 생각했던 엄마는 TV 예능 프로그램에 날 데려갔었다.

나쁘지 않았다.

웃으며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대단하다고 치켜새워주는 MC 아저씨.

엄마는 확실하게 밀어줬다.

학교는 착실히 다니면서 남들은 공부하러 학원에 다닐 때 나는 실용음악 학원과 댄스 아카데미에서 살았다.

이쁘장했던 외모는 학창시절부터 물이 올라 많은 남학생들이 관심을 가졌다. 수많은 선물과 구애를 받았고 그중 한 명이랑 짧은 기간 사귀기도 했었다.

어린 나이에도 키는 무럭무럭 성장했고 나름 인기 있는 그룹을 배출한 엔터테인먼트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는 부모님도 기뻐했고 나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건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빠르게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세상은 넓었다.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데뷔는 자꾸만 미뤄졌다. 나보다 매력있고 실력 있는 연습생들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았고 기회를 잡기엔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인고의 시간을 가질수록 열매는 단 법이야'

소속사 사장님이 장기 연습생들을 상대로 면담할 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면?

나와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남들처럼 대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남다른 기술을 배운것도 아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처음엔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은 마음이었다.

'잘 될 거야' 하는 친구들의 응원과 가족들의 걱정 어린 시선들이 마음의 위안이 되기보단 불편했다.

질린 도시를 떠나 숲속으로 향했다.

모든 잡념을 털어내고 산을 오르는데 집중했다. 정상에 도착했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자동차들과 공장처럼 나열된 수많은 빌딩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회인들을 보며 저 넓은 공간에 내 자리하나 없을까 싶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위안되는 것은 정상의 공기가 맑고 참 시원하다는 것이다.

지친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

그렇게 등산이 취미가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나는 특이한 꿈을 꿨다.

산 정상에서 발에 헛디뎌 추락했는데 신비하면서도 무서운 공간으로 떨어지는 말도 안되는 꿈.

끝없는 절망과 공포만 있을 줄 알았던 그 공간엔 다행이 희망과 설렘도 존재했다. 그래도 그 꿈속 괴물은 지나치게 무서웠다. 그녀의 상상력이 이렇게 좋았나 싶을 정도로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끔찍한 괴물이 그녀의 희망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데뷔의 꿈이 영영 사라지는 것처럼 무서웠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때로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꿈 속인데 이렇게 춥다니,

중요한 순간에 꿈에서 깰 것 같다.

'으응- 좀 더 잘래'

나는 팔을 뻗었다.

무언가 따듯한 것이 만져졌고,

무의식적으로 꼬옥 껴안았다.

그것은 마치 다리에 끼고 자는 롱 쿠션 같이 부드럽고 편안했다.

'무서운 꿈이지만 좀 더 꿔도 될 것 같아.'

나는 희망도 없는 현실보단 그래도 희망이 존재하는 꿈이 좋았다.

***

근데 그 괴물에게 덤벼들고 나서 어떻게 됐지? 머리를 굴려봤다.

이상하게 꿈에서 깨기 직전처럼 내용이 진행되질 않았다. 캄캄했던 시야에 이는 붉은 햇살이 느껴졌다.

급속도로 현실감이 찾아왔다.

눈물이 흘렀다.

그래 꿈이 아니었어.

그런데 몸이 따듯했다.

눈을 떴다. 그리고 나를 껴안은채 자고 있는 한 사내를 보고 놀랐다.

화들짝 놀라 멀어졌다.

이내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눈이 너무 부셔'

햇빛이 너무 강해 바늘로 눈알을 콕콕 찌르듯이 아팠다. 마치 후레쉬를 눈에 직접 비추는 것 같다. 그리고 몸에 느껴지는 이질감이 묘했다.

'세상에'

다친 팔은 예전처럼 돌아와있다.

슬쩍 만져보니 찢어진 근육이 다시 붙어 강화한 듯 더욱 단단해져있었다. 눈을 계속 깜빡이며 눈부심에 적응하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시력이 더 증가한 것 같다.

겨우 보는 것에 적응한 나는 몸 안을 구석구석 확인했다. 옷은 원피스로 갈아 입혀져 있고, 소독약으로 보이는 벌건 액체가 몸에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 빼고는 흉터 없이 깨끗했다. 주변에 검붉게 걸레짝이 되어버린 등산복이 보였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빠가 갈아입혔구나.'

몸에 칠해진 소독 자국으로 밤새 날 보살폈겠구나 추측할 수 있었다. 위태로운 상황이었겠지만 그래도 알몸을 보였다는 게 부끄러웠다.

옆에는 상의를 벗고 자고 있는 오빠가 보였다. 상체를 자세히 보니 나처럼 상처 없이 깨끗했다. 또 신기한 현상으로 몸이 회복했나 보다.

'다행이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괴물에게 팔을 내주고 정신없이 비명을 지른 후에 기억이 없다. 그때는 씹혀 부러지고 온갖 신경들이 비명을 지르는 다신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다음 일은?

왜 우리가 무사하지?

나중에 오빠한테 물어봐야겠다.

일단 밖으로 나가보자.

나는 발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는 순간.

꽈앙-

머리를 천장에 강하게 들이받고 떨어졌다.

충격에 견디지 못한 돌이 부스스 떨어진다.

근데 머리에 통증은 없다.

'이게 뭐야.'

다시 조심히 걸어보려 했지만 계속 고꾸라졌다. 중심잡기가 너무 힘들었다.

'힘 조절이 안돼.'

천천히 생각했다.

우선 시야가 저번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

멀리 들리는 산짐승들 소리.

이곳저곳에서 울리는 풀벌레 소리.

주변 모든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세밀하고 거대하게 울렸다. 다행히 크르르- 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계곡가에서 넘어졌다가 일어나며 계속 걷는 연습을 했다. 청각과 시야도 시간이 흐르자 처음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제대로 걷기 위해서는 평소처럼 걸으면 안 된다. 힘을 더 약하게 주고 살며시 걸어야 한다.

다리에 강하게 힘을 주는 순간 10m 앞에 있는 나무가 바로 눈앞에 순간이동하듯 튀어나온다. 깜짝 놀라서 나무에 들이박자 그 큰 나무 기둥이 뿌리가 뽑힐 듯 흔들리면서 이파리가 우수수 떨어졌다. 이곳에 떨어진 이후 신체가 비정상적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꼬르륵-

어느 정도 적응을 하자 배가 너무 고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뱃가죽이 등 거미에 달라붙는 느낌을 보아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오빠도 분명 배가 고프리라.

이번엔 그를 위해 내가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계곡가에 집중했다.

물 흐르는 소리 사이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들이 들렸다. 분명히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소리다.

발전한 청각이 신기했다.

나를 괴롭히던 수많은 잡음들은 사라지고 집중하고자 하는 소리만 강조되어 들렸다. 계곡으로 조심히 들어가 바위틈을 바라봤다.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무언가 스륵- 움직이자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잡았다.

물고기다!

잡는 것에는 성공했다.

다만 쥐어짜듯 잡은 물고기가 터져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에휴-'

너무 흥분한 나머지 힘 조절을 못했다.

결국 옛날 TV에서 봤었던 사냥 방식을 사용했다. 주변을 내리쳐 물고기를 기절시키는 방식이었는데 손으로 가볍게 물가를 치니 힘찬 물고기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떠올랐다.

물고기를 조심스럽게 올려내는데 성공한 나는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근처에 보이는 모든 물고기들을 잡았다.

'맑은 지리탕을 끓여주고 싶은데'

다쳐서 누워있는 그에게 구운 생선보다는 탕을 끓이는 게 효과가 더 좋을 것 같았다. 밤새 추웠기도 해서 따듯한 국물을 먹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장어 굽는 냄새에 반응했던 괴물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냄비도 없고.

'어찌해야 하지?'

결국 꼬치를 해서 말려두기로 했다.

나중에 굽던지 생으로 말려 포로 먹던지 오빠가 답을 제시해 주겠지. 하나하나 손질한 후 나뭇가지에 꿰어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세워놓았다. 정리를 끝낸 후 그가 누워있는 동굴로 향하는 순간-

꽈앙-

머리와 돌이 맞닿는 소리.

씨익 웃었다.

'일어나셨나 보네'

***

몸이 불쾌하면서도 상쾌했다.

피로와 어지럼증 그리고 머리에 이는 열은 완전히 사라졌다. 시렸던 추위도 느껴지지 않는다. 문제는 햇살이 눈부시다는 점과 고막을 때리는 청각, 육체에 느껴지는 넘치는 힘이 통제가 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일어나셨어요?'

묻는 선소연의 목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바깥에 나서자 보이는 건 부담스러울 만큼 많이 잡아 나뭇가지에 엮여있는 큼지막한 쏘가리들. 그리고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쪼르르 달려와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하는 소연이.

"몸에 힘을 빼고 걸으세요. 아무래도 몸이 또 진화한 것 같아요. 금방 적응할 거예요."

"어떻게 된 거야?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무래도 누가 보살펴준 덕분에요. 그나저나 제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어떻게 된 거예요?"

"잠시만."

두통이 일었다.

힘을 빼고 평평한 바위 위에 조심히 걸터앉아 머리를 감싸고 생각했다. 무시무시한 괴물이 더 큰 괴물의 먹이로 전락한 후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보살펴 줬다고?

도중에 깨서 소연을 들쳐매고 간신히 이곳으로 옮겼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 앞에 쪼그려 앉은 선소연이 뭔가를 건넨다.

"여기요. 일단 이거 드시고 천천히 생각하세요. 손가락에 힘 풀고 받으세요."

생수통에 담은 계곡물이다.

안 그래도 갈증 나던 현은 생수통을 건네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가을 계곡물이라 그런지 시원하다.

"더 큰 놈을 봤어."

"네? 무슨...."

소연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다.

"우리가 봤던 그 괴물보다 수십 배는 컸어. 그놈 덕분에 살았다."

"헐! 크르르보다 더 큰 괴물이 나타났었다고요?"

"크르르?"

"맨날 크르르- 거리면서 다니잖아요."

뭔가 놈의 생김새답지 않게 귀여운 이름이다. 그나저나 하루 지났다고 얘는 왜 이리 나한테 친근하게 대하는지 모르겠다.

"응, 공룡시대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큰 익룡이 크르르를 한 입에 쪼아먹고 날아갔어."

"... 대박."

"어쨌든, 이곳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야."

"그럼 앞으로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변화한 몸을 측정해보자."

아무래도 어제보다 몸이 민감한 것이 더 세진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고 계곡 옆 넓은 공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가 좋겠군.

소연을 데리고 이동하려고 발에 힘을 주는 순간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뒤로 자빠졌다. 제기랄. 소연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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