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곳에 떨어졌다. (3)
베이스캠프로 복귀하자 그녀가 일어나 있었다. 나는 장작불 주변에서 바람막이를 끌어안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연스레 말을 놓았다.
"소연 씨, 일어났네?"
"어... 현 씨. 아니, 오빠라고 할게요."
선소연이 무언가 다짐한듯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한다.
"어제... 밤에 많은 생각을 했어요."
"무슨?"
"솔직히 두려워요. 가족들도 보고 싶고요."
"음, 그래서?"
"두려움에 숨지 않으려고요."
"......"
"백 번 사죄해도 모자란 거 알아요."
"그 말은 이제 그만."
"오빠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는 걸로 사죄할게요! 절대 짐이 되지 않을게요."
"... 현명한 생각이야."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니 고맙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소연이 이어서 대꾸했다.
"그러는 의미에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부탁?"
"어디 갈 때 말 좀 해주고 가주실 수 있나요? 눈 떴을 때 안 계셔서 사실 조금 걱정했거든요. 아니, 솔직히 많이 무서웠어요. 버리고 가신 줄 알고."
"음... 주변을 좀 둘러본다는 게."
나는 멋쩍게 웃었다.
"아, 잠시만요!"
소연은 가방을 뒤적뒤적 거리더니 은색 알루미늄 포장 덩어리를 꺼내 내밀었다. 김밥이다.
"배고프실 텐데 드세요. 등산하면서 먹으려고 사 온 건데 가방에 남아있더라고요, 여기 초코바랑 생수도 있어요."
나는 건네받은 김밥을 하나 물었다.
식은 김밥이지만 상하지도 않았고 주린 배를 채우기 딱 좋았다.
어제 이후로 물도 마시지 못했다.
갈증이 나서 곧바로 생수를 돌려 깠다.
가방에 먹을 것이 있었다니 그래도 오늘 아침은 해결할 수 있어 다행이다. 생수를 입에 머금으려는 찰나 손을 번쩍 드는 소연이 보였다.
"저기"
내가 멈칫- 하자,
"이건 우리가 마실 식수를 찾을 때까지 아껴둬요. 혹시나 못 찾을 경우를 대비해서 조금씩 먹는 게 어떨까요?"
정확한 판단이었다.
조난당한 상황에서 식수는 식량만큼 중요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나름 멍청하지는 않군.
"응. 그래야지. 식사 후 이동해야 하니까 너도 목만 축여."
난 물을 목을 축일 정도만 살짝 머금고 소연에게 건넸다. 소연도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똑같은 양의 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으며 꿀꺽 삼킨다. 그 모습이 왠지 어미 고양이를 따라 하는 새끼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주변 좀 둘러보셨나요?"
"어. 조금 둘러봤는데, 살만한 곳이 아냐. 식량도 없고 조용한 게 시베리아 숲 한복판에 있는 기분이야."
"흠... 그럼 이따가 같이 찾아보죠!"
힘차게 대답한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얼굴이 붉게 물드는 그녀.
"저도 한 끼도 못 먹었는데. 같이 먹어도 될까요?"
마침 김밥 하나를 더 꺼내 물던 나는 멈칫했다.
"실없긴... 왜 안되겠어. 네 건데"
바닥에 걸쳐 앉아 김밥 한 줄을 나눠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소연의 몸도 아침이 되자 상태가 좋아졌는지 불편해 보이던 어제와는 확실히 달랐다. 나는 찌그러진 알루미늄 포일을 바닥에 던지고 떠날 채비를 했다. 참, 떠나기 전 소연의 가방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야지.
난 가방을 암벽에 두고 떨어진 상태라 하네스 장비와 그곳에 달린 보조 로프, 카라비너 3개밖에 없었고, 소연 역시 핸드폰은 추락하면서 잃어버린 건지 없다고 했다. 그녀의 가방에는 초코바 2개와 생수 1통, 구급약품 세트, 등산용 후레쉬, 속옷 한 세트와 하늘색 원피스, 수건 하나가 전부였다. 생각보다 더 막막했다.
일단 아침에 세운 계획대로 확 트인 시야를 확보할 고지가 나올 때까지 위로 올라갔다. 내가 가방을 메고 선두에 서서 걸었고 소연이 내 발을 보며 꿋꿋하게 따라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해는 벌써 중천으로 이동했고, 강한 햇빛이 나뭇잎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샅샅이 부서졌다.
휴식 없이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째.
흙이 단단하지 않고 경사가 높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잘 따라왔다. 등산로도 없어 힘들 텐데.
"이상해요."
뒤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렸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뭔가 발견했나?
"보통 이 정도 걸으면 숨이 차야 하거든요."
그녀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전혀 힘들지가 않아요. 말은 못 했었는데 사실 어제 팔도 엄청 아팠거든요? 뼈에 금이라도 간 것처럼. 근데 지금은 멀쩡해요."
그러고 보니 나도 그렇다.
2년 마다의 천리행군과 산악 훈련, 특수전 훈련들로 다져진 육체이긴 하지만 올라오는 동안 숨 하나 가쁘지 않은 것은 조금 이상했다.
또 보통 암벽등반을 완주하고 나면 다음날 근육통에 시달리기 마련인데, 몸은 상쾌하기만 했다.
소연은 펄쩍펄쩍 뛴 후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고 이래도 힘들지 않다는 듯 신기해하다가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우린 정말 죽은 건가 봐요."
"그럴지도 모르지."
끄덕거리던 나는 기습적으로 소연의 왼쪽 볼을 찹쌀떡 마냥 꼬집어 늘렸다.
"아얏-"
소연은 따끔하는 표정을 지으며 왜 그러냐는 듯 쳐다봤다.
"아프지?"
"네."
"아침에 배고팠지?"
"그런데요?"
"봐. 우리는 배고픔도 느끼고 통증도 느껴. 이게 살아있음과 다를게 뭐야"
"......"
"넌 죽음이 뭐라고 생각해?"
"죽음... 이요?"
"응."
"음... 아직 어려서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짧은 고민 후 소연이 덧붙였다.
"미지의 세계요?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고, 산 사람에게 알려주지도 못하니까?"
"무신론자구나?"
"뭐. 부모님 따라 가끔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사람이 좋고 말씀이 좋아 가는 거지, 완전히 믿지는 않았었어요."
"여기서 잠깐 쉬고 가자."
나는 경사진 길 옆 큰 바위에 자리를 잡고 소연에게 손짓하며 말을 이었다.
"난 예전에 죽음이란 '나'라는 자아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거라고 생각했어."
"... 자아요?"
"지금껏 살아온 기억들과 앞으로 흐를 시간 동안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지는 거."
"......"
"그런데 지금 난 지구에서의 일도 기억하고, 생각도 할 수 있어. 내 이름 두 자. '강 현'이라는 존재가 여기 있잖아."
제길.
말이 길어졌다.
팀원들에게 설교하던 버릇이 여기서 또 나와버렸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죽음이 또 다른 삶의 시작일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그렇게 울상 짓지 말라고."
"오빠는 신기해요."
"뭐가?"
"그냥... 묘하게.. 믿음이 간달까?"
소연이 빙긋 웃더니 일어나 내 등을 밀었다.
"자- 얼른얼른 가자구요! 날 저물기 전에 찾아야죠!"
고지까지 가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배는 다시 고파졌지만 평소와 달리 체력도 좋아 졌을뿐더러 컨디션도 좋았다. 나와 소연은 신중한 걸음으로 구불구불한 능선 길을 따라 정상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나는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소연도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도대체 저게 뭐야!
***
고지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전체적인 모습이 드러났다.
거대한 나무들과 수풀들이 우거져 있었고, 아득히 먼 곳에 보이는 산맥들 바깥으로 마치 이 공간을 봉인해 두기라도 한 듯 사방을 둘러싼 파란 벽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어림잡아 10km는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두 마리의 거대한 괴물. 크기가 마치 여러 산을 합친 것처럼 어마어마했다.
먼 거리임에도 시야에 꽉 들어찬다.
걸리버를 바라보는 소인들의 기분이 이러할까.
산을 배게 삼아 누워있는 빨간 고양잇과 괴물은 보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흘러 숨이 턱 막혀왔다.
그 옆에는 어찌 보면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커다란 푸른색 새가 날개가 찢어진 채로 쓰러져 있었다.
호랑이와 독수리를 연상케 하지만 지구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흉포한 모습의 괴물들이었다. 두 괴물 주변은 융단폭격이라도 당한 듯 황량하고 적막했다.
"... 소연 씨 저게 뭐라고 생각해?"
"... 저도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이곳이 엄청나게 끔찍하고 위험한 곳일 수도 있다는 것."
"우선 앉아봐. 정리 좀 해야겠어."
혼란스럽다.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녀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주 앉았다.
담배를 찾아 한 까지 입에 물었다.
손이 떨렸다.
"이곳을 두르고 있는 신비하게 생간 파란 벽이 있어."
"저기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거 말이죠?"
"어. 그 너머로 시야가 제한되는 게 내 느낌상 밖으로는 나갈 수 없는 것 같아."
"그럼 어쩌죠?"
나도 그게 궁금했다.
다행인 건 두 괴물이 치열하게 싸운 듯 쓰러져 있다는 것.
주변에 둘러진 파란 벽.
거대하고 고결하게 생긴 푸른 새.
자세히 보니 색이 똑같다. 마치 저 괴물이 이 공간을 의도적으로 막아놓은 듯한 느낌.
왠지 저곳에 힌트가 있을 것 같다.
그래 쫄지 말자.
"이곳에 마냥 있을 순 없으니 저 괴물들이 있는 산으로 이동해봐야지."
"...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해 보이는데..."
소연은 호들갑을 떨며 만류했다.
"소연 씨."
"네."
"내가 살아 나가자 한 것은 이곳에서 의미 없이 생존만 하자는 게 아니야."
그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 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하고 왜 이런 곳이 존재하는지, 사방은 왜 푸른 벽으로 막혀있는지 알아야겠다.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해."
"그치만."
"사방을 둘러봐도 이 공간에 보이는 건 저 괴물들뿐이야. 왠지 누군가 우리를 저기로 인도하고 있는 것 같아."
"그건 오빠의 느낌이잖아요! 너무 위험해요. 다른 방안을 찾아보면 안 될까요?"
"잘 봐. 저 괴물들. 미동도 없잖아. 살아있다고 해도 저 괴물들한테 우리는 개미보다 작은 존재야.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걸?"
"......"
"바로 이동하자는 소리는 아니야."
"그럼요?"
"최종 목적지를 저기로 잡고, 날 저물기 전에 우리가 먹을 만한 식량을 구해보자."
불안한지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하던 소연은 문득 대꾸했다.
"무모하다는 소리 많이 듣죠?"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무모하다라...'
그런 말을 자주 했던 놈이 있긴 있었다. 팀 휴가 때마다 혼자 위험한 암벽을 찾으러 다니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가장 친했던 동기. 혼자는 위험하니 취미생활 맞는 사람을 구해보라고 잔소리하던 게 엊그제였다.
작전 시에도 우리 팀은 항상 위험한 역할을 맡았었다. 내가 찾아다니기도 했고, 그래서 붙혀진 별명이 "악귀"였지만. 과거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또 복잡해졌다.
"도전정신이 강하단 소리는 많이 들어봤는데."
"도전정신은 무슨..."
"쓰읍-"
"후우- 알았어요. 믿을게요. 사실 좋든 싫든 저한텐 오빠가 유일한 아군이고 이 괴상한 공간에서 믿을 수 있는 현실이에요. 돕기로 마음먹었으니까 확실하게 따라줄게요."
맞는 말이다. 현 상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
소연은 돌아앉아 푸르게 수놓아진 수풀림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