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면 어떨까?'
'과거로 돌아간다면 더 잘 살 수 있을 텐데.'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본다고 들었다.
난 맹세컨대 그런 망상을 해본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 지옥같은 곳에서 귀환한 후 내가 알던 세상은 완벽히 사라졌다.
곳곳에 붉은빛의 균열이 열리고 있었고, 개인화기가 통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등장했다. 수많은 지역의 인구가 피해를 입었고 많은 이들이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졌다.
"자연이 인류를 버렸다."
많은 학자들이 말했다.
과거 먹이를 구하기 힘든 목 짧은 기린이 사라지고 목이 긴 기린만 살아남았다는 다윈의 주장처럼 인류는 자연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고.
세계를 지배했던 인간이 드디어 약육강식의 약자가 되어 6500만 년 전 지구를 지배했었던 공룡의 멸종처럼 흔적만 남기고 지워질 것이라고.
그러나 인간은 역시나 위대했다.
'최초의 헌터 버나드 스미스'
그를 필두로 인류는 각성을 시작했다. 다른 짐승들과 달랐던 위대한 지능의 힘으로 정체 모를 괴물들에게 힘껏 저항했다. 헌터라는 신인류가 탄생하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어쩌면 그 끔찍한 곳에 떨어졌을 때,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식이 파괴된 공간과 점점 변해가는 신체를 온몸으로 느꼈으니까.
이상한 곳에 떨어졌다. (1)
"흣차-"
힘차게 숨을 내쉬었다.
왼쪽 등 근육과 양 손가락이 뻐근한 게 거의 정상에 다다랐다는 신호다.
나는 한 피치 등반 후 암벽 사이로 튀어나온 돌출물에 앉아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산 정상까지 약 10m.
암벽등반의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 근육을 풀어주고 어느 정도 회복하기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휘이잉!
기분 좋은 바람이 흠뻑 젖은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땀을 상쾌하게 식혀줬다.
'시원하군.'
올라왔던 자연의 절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울창한 숲과 장엄한 산봉우리들에 회색 물감으로 덧칠한듯한 기괴한 암벽들이 보였다.
나에게는 지금이 나날이 피로했던 일상을 날려보낼 수 있는 휴식의 순간이었다. 특전사 고군반(OAC) 시절 동기 놈들은 휴가 때도 매번 훈련이냐고 핀잔을 주지만 말이다.
암벽등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며, 사실상 2인 1팀으로 이루어지는 확보다.
확보가 뭐냐고?
동행자의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하는 생명줄이다. 안전장치 없이 하는 클라이밍도 있지만 난 국가의 몸.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의 군사 전문가들과 특수전의 귀재들이 모인 특수부대원들을 이끄는 리더다. 최소한의 안전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리드 솔로 클라이밍을 즐긴다.
홀로 자기 확보를 하는 방식인데 난이도가 굉장히 높다. 매 피치마다 다시 하강해서 확보물을 회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들은 한 번 오르는 암벽을 2배의 노력을 들여 오르는 것이다.
특히나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등반 코스는 하켄이나 볼트 등의 인공 설치물이 없어 확보할 자연물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음...
무엇이 좋을까.
오른쪽 위에 암벽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작은 나무가 보였다.
'이 정도면 되겠어.'
제법 튼튼해 보여 성인 남성의 체중을 지탱할 정도는 될 것이다.
나는 카라비너(Carabiner)와 나무에 보조 로프를 연결하고 하강 준비를 했다. 이전 피치에서 사용했던 확보물을 회수한 후 마지막으로 올라가면 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일반 코스로 올라온 등산객들이 많은지 시끌벅적했다.
'전면 하강으로 내려갔다 올까?'
내 전면하강 실력에 대해 말하자면,
거의 완벽에 가깝다.
교관들, 대원들
모두 혀를 내두르고 감탄한다.
그러나 이런 높은 암벽에서는 하늘을 보고 발로 벽을 밀쳐 몸을 수직으로 세운 후 천천히 내려가는 후면하강이 체력적으로 제일이다.
암벽에 발을 디디고 푸르른 허공을 바라봤다. 신선하고 향긋한 산 내음과 선선한 바람이 느껴진다.
마침 산 정상에서 등산복을 입은 한 여자가 쪼그려 앉아 쳐다보고 있었다.
암벽등반 하는 게 신기한가보다.
안전장치 하나 없는 암벽에 저렇게 서있으면 위험할 텐데. 그래도 예쁘장하게 생겼네.
일부러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발을 내디뎌 내려갔다.
휘이이이잉!!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었다.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내려가던 것을 멈추고 팔을 당겨 급히 제동을 걸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바람이 많이 불때는 성급하게 내려가는 것보다 몸을 꼿꼿이 세우고 로프에 의지해서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대기하는 것이 상책이다.
"꺄아악-"
세상엔 가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존재한다.
가령 살면서 벼락에 두 번 맞고 살아난 사나이라든지, 뇌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는다든지, 아니면 지금처럼 암벽등반 도중에 추락하는 여성과 부딪친다든지.
빌어먹을.
소녀가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로프를 비틀어 피할..'
"끄-윽"
채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둔탁한 충격이 찾아왔다. 소녀가 떨어져 내려 부딪치는 시간은 약 1초.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판단을 내리기에는 극소한 시간이었다.
일단 가슴 위에 떨어진 소녀를 꽉 붙잡았다.
신음이 절로 나왔다.
갈비뼈가 욱신거렸지만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확보줄에 매달렸다. 그녀와 함께 마치 커플 번지점프를 하듯 핑그르르 돌았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나와 부딪친 충격으로 기절한 것인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상황은 괜찮았다. 본의 아니게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고, 아직 확보줄이 버텨주고 있었으니까.
투둑-툭
"씨...발."
갑자기 확보물로 삼았던 나무의 뿌리가 뽑혀버렸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뿌리까지 확인하지 않고 근거 없이 나무를 믿은 나의 실수였다.
대차게 부는 바람.
흔들리는 나무.
떨어지는 그녀와의 충격.
변수가 너무 많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배꼽에서 특전사 강하 훈련 때나 느꼈던 알싸한 감각이 느껴졌다. 축 늘어져 있는 소녀를 원망하며 함께 추락했다. 재수도 없지.
'아 떨어진다. 이제 죽는구나..'
특임대 코드네임 '악귀' 대위 강 현의 삶.
휴가 때마다 항상 따듯하게 맞아주던 부모님.
이제 한창 대학 졸업을 앞둔 귀여운 여동생.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하하호호 웃고 떠들었던 친구들.
마지막으로 부사관임에도 신뢰와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따라주는 특임대원들.
짧은 순간 30년간의 삶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눈을 떠 땅 아래를 바라봤다.
삐쭉 삐쭉 튀어나온 돌덩이들이 보였다.
방금까지는 아름답게만 느꼈던 암석들이 이제는 온몸을 찢어발길 위험한 병기로 보였다. 저기에 떨어지면 많이 아프겠지. 머리부터 떨어져서 온몸이 산산조각 날 거야. 뇌수와 피가 튀어나와 돌을 빨갛게 물들이겠지.
다시 눈을 감고 속으로 숫자를 세며 충격에 대비했다. 아니 죽음에 대비했다.
'하나, 둘, 셋, 넷...'
"응?"
땅바닥에 부딪쳐오는 충격이 없다.
조금 과하게 오래 떨어진다.
분명 눈 감기 전에는 대략 3초면 충격이 왔어야 하는데. 아! 이미 부딪쳐서 뇌가 부서졌기 때문에 아픔을 못 느끼는건가?
아니면 뇌에서 흘러나오는 엔돌핀을 통각보다 촉각으로 먼저 인식해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건가?
옛날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라크 무장세력에 피랍되어 참수당하던 중 극적으로 구해진 미군 이야기.
그는 당시 목이 1/3이나 잘려나갔는데도 고통보다는 쾌락을 느꼈다 진술했었다.
그러나 쾌락은 느껴지지 않는다.
떨어지고 있는 느낌도 계속 난다.
궁금증에 눈을 슬며시 떴다.
"어? 이게 뭐야?"
보이는 것은 방금까지 있던 산속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하얀색과 파란색의 불빛들이 신비하게 어우러져 긴 통로 형식으로 펼쳐져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사라지고 주변 환경이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치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던 블랙홀의 느낌처럼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끝이 없고 점점 어두워지는 무저갱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것처럼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광경을 몽롱하게 쳐다봤다.
끈기있게 기다리자 갑자기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면서 무중력 상태가 되었다. 점점 어두워 지던 불빛은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털썩-
그리고 머리가 땅에 닿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하얀 빛이 번쩍이며 세상이 바뀌었다.
***
몸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가슴팍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는 것을 빼놓고는 다른 부위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만져보니 갈비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지만 통증이 느껴지는 게 근육이 찢어지거나 금이 간 것 같다.
주변은 시커멓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묘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일단 불빛이 필요해.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았다.
라이터를 키자 주변 환경이 조금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있으면 편했을 텐데 확보물 가방에 두고 떨어졌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한대 물고 라이터를 옮겨 주변을 비춰보았다. 그녀는 등산용 가방을 멘 채로 내팽개져 있었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먼저, 검지와 중지를 맥박에 가져다 댔다.
미약하게나마 맥박 뛰는 소리가 들린다.
죽은 것 같지는 않고 기절한 것 같다.
손가락을 다시 코 밑부분에 가져다 댔다.
숨 쉬고 있다.
소녀 옆 커다란 나무 기둥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마저 피우며 주변을 살폈다. 굉장히 크고 이색적인 나무들과 떨어진 낙엽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숲속인 것 같다.
마음속이 심란했다.
상식이 파괴된 상황, 예상컨대 이곳은 사후세계겠지. 죽어본 적도 없고, 죽은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는 상황에서 이곳에 대한 정보는 없다.
갑작스레 닥친 죽음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내면의 공포라는 감정을 키워갔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우선 이 여자.
이 여자가 없었다면 죽음으로 내몰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살할 생각으로 뛰어내린 것일까? 아니면 바람에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확보물을 잘못 선택한 내 실수와 소녀의 추락 위치가 복합적으로 맞아떨어진 추락 사고다.
그녀를 증오해야 옳을까?
우선 그녀를 깨워보기로 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
어깨를 툭툭 치며 깨웠다.
그러나 반응이 없다.
너무 약하게 깨웠나?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꽈악 잡고 대차게 흔들었다.
"허억-"
그녀는 눈을 번쩍 뜨며 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들고 본인의 얼굴을 비추는 내 얼굴을 보고..
"꺄아악! 까... 깜짝야."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본 듯 뒷걸음치면서 멀어져 갔다. 뭐야. 내가 그렇게 흉악하게 생겼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추락했던 순간을 떠올렸는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정말 죄송해요. 저 때문에..."
"......"
"몸은 괜찮으신가요?"
그녀가 내 몸을 눈으로 낱낱이 확인했다.
"일단 괜찮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왜 거기에서 떨어진 거죠?"
"갑자기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몸을 지탱하지 못했어요... 구해주셔서 정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내가 추락하는 자신을 받아 구해주었다 생각한건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주변을 다시 돌아보더니 묘한 이질감을 느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인가요?"
"......"
"혹.. 혹시? 저를..."
그녀는 두 손으로 몸을 감싸며 말을 더듬었다. 마치 어둡고 으슥한 공간에 사내와 단둘이 남겨져 있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부딪침으로 인해 몸에 통증이 느껴지는 듯 간간이 신음을 내기도 했다.
"침착해봐요."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마음속은 복잡한데 저급한 오해나 하다니 괜스레 또 짜증이 올라왔다.
'그래도 확보물을 잘못 설치한 내 잘못도 있으니 괜히 드잡이질 하진 말자.'
한숨을 내쉰 나는 내가 보았던 추락 장면과 지금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제가 추락하다가 그쪽이랑 부딪치고 이상한 곳에 빨려들어가보니 이곳이란 거죠?"
"정확하네요."
"그렇다면.. 우리는 죽은 건가요?"
"그건 알 수 없지만... 확실히 현실적인 상황은 아니에요."
그녀는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다 고개를 떨구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나도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나무에 털썩- 기대어 고민을 시작했다.
이 시커먼 숲에서 무얼 해야 할까.
불빛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된다. 땀에 젖은 옷이 말라가는지 날씨가 추워졌다.
일단 너무 어둡다.
후레쉬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 쪽은 누구신가요? 그러니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가 적막함을 깼다.
"강 현입니다. 30살이고 군인이죠. 아가씨는?"
"저는 선소연이요. 24살이에요."
"그래. 통성명은 이쯤 하고, 혹시 그 가방에 후레쉬 같은 거라도 있습니까?"
"아! 네. 여기요!"
그녀는 긴장했는지 아니면 나한테 미안한 마음인건지 신병처럼 재빠르게 후다닥 가방을 열고 후레쉬를 건네주었다. 등산용 배낭세트에 묶여있던 증정용 후레쉬였다.
"죽었다기엔 몸에 통증이 그대로 느껴지고, 땀이 말라 추위도 느껴지고 있어요.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우선 불을 좀 피워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