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선의 뱃고동 (1) >
128. 범선의 뱃고동 (1)
6월 20일, 다저 스타디움.
[TEX 5 : 3 LAD]
무겁게 깔린 뜨거운 공기가 텍사스 투수의 폐간을 가득 채워 나갔다. 물론 정말로 뜨겁다는 것이 아니었다.
여름을 맞이한 샤베즈 레빈이 덥기는 해도, 습도까지 높아 사람의 숨통을 죄어오는 곳은 아니니까.
다만 관중들 쏟아내는 열기가 그대로 압박감으로 치환되어 투수의 심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제기랄. 무슨 분위기가..'
텍사스의 마무리 투수 잭 브루안이 질린 표정과 함께 스파이크로 마운드의 흙을 골랐다.
3년 만에 방문한 다저 스타디움.
선선한 날씨와 여유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관중들로 이곳에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브루안이었지만, 다시 돌아온 다저 스타디움은 180도로 달라진 분위기로 휩쌓여있었다.
승리에 대한 지독하리라만큼의 확신.
한창 플레이오프에 맞춰 템포를 끌어올리던 양키 스타디움에 밀리지 않은 그 오만함이 다저스의 관중들에게서도 전해지고 있었다.
브루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광판으로 고개를 돌려 카운트를 확인했다.
[9회 말, 2아웃]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2명의 주자를 출루시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2개의 아웃카운트를 기록했고, 이제 한 명만 더 잡는다면 이번 경기는 텍사스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된다.
브루안은 애써 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제기랄, 이기고 있는건 우리라고. 네 놈들이 이긴 것 같은 분위기로 날 압박하지 말란말이야.'
물론 이유정도는 알고 있다.
브루안은 고개를 돌려 타석에 서있는 다저스의 99번을 바라보았다.
'괴물 같은 자식. 타자 혼자 이런 분위기를 끌어낼 수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다저스의 리드오프, 최근 메이저리그에 떠오르는 별들 중 가장 빛나는 별로 평가받고 있는 프릭필더 KANG.
3/4/5도 아닌 4/5/10을 기록하고 있는 괴물.
슬럼프가 찾아왔다던 시기도 있었지만, 피츠버그 전 이후로 다시 그 폭발적인 기세를 되찾은지 오래였다.
해준은 그런 브루안의 시선 속에서 떠오른 두려움을 읽어냈다.
'승부하는걸 꺼림직해하는 기색은 있는데...'
오른발 스파이크 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치고는 자세를 잡는다. 최근 타격 감각은 천장 없는 한계를 향해 치솟고 있었기에, 느낌은 정말 좋았다.
[특수 모듈 '스택형타구속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도박성 모듈 '전력분석예측'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특수 모듈 '철인' 효과로 타격 사이클이 절정에 도달한 상태입니다.]
그에 더해 여러 모듈들의 효과까지.
들어오기만 하면 무조건 장타를 뽑아낼 수 있다는 이유 없는 확신이 전신을 휘감았다.
'루이스가 최근 미쳐 날뛰고 있으니. 나를 걸러내지는 않을거야.'
더군다나 후속 타자는 최근 3경기 5홈런이라는 미친 페이스를 자랑하는 루이스 화이트. 그런만큼 해준은 상대가 자신을 걸러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투구판을 박찬 브루안의 손에서 떠나기 시작한 공.
그 회전의 실밥을 확인하는 순간.
'커브!'
배트가 움직였다.
"흐읍-!"
가슴팍 유니폼이 크게 들썩이고, 벼락 같이 휘둘러진 스윙 궤적이 순간 번뜩인다.
배트 그립에서 아무런 반발감도 전해지지 않자, 해준은 공이 제대로 걸려들었음을 확신하며 팔로우스로우마저 폭발적으로 끌어당겼다.
따아아아아악-!
답답하게 막혀있던 가슴을 한 번에 뚫어버리는 시원스러운 타구음.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Deep right center field! No doubt about it! 결국 경기를 다시 한번 뒤엎어버린 다저스!! 잭 브루안의 고개를 결국 떨궈집니다! 다저 스타디움을 뒤흔드는 강의 끝내기 역전 스리런! 다저스가 텍사스와의 인터리그를 모조리 가져오는데 성공합니다!]
구장을 담아내는 카메라 워크가 흔들리고, 박수 소리, 고함과 함께 플라스틱 맥주잔이 부딪혔다.
LA다저스 대 텍사스 레인저스 2차전.
저 멀리 샤베르 레빈의 밤하늘을 갈라버리는 타구.
[11연승! 텍사스의 철벽 불펜마저 무너트린 다저스가 11연승을 달리기 시작....]
그것을 바라보던 해준이 배트를 내던졌다.
+++
6월 20일.
[TEX 철벽 불펜 침몰, 끝내기를 폭발시킨 KANG의 배트 플립.]
6월 21일.
[KANG, 로키스와의 1차전마저 끝내기로 장식하며 3연속 끝내기 기록. 다저스 12연승 쾌속 질주.]
[리키 핸더슨에서 배리 본즈까지. 다저스의 강에게서 느껴지는 독재자의 향기.]
6월 23일.
[LA다저스, 콜로라도 로키스 시리즈 싹쓸이! 14연승 성공!]
그리고 6월 25일까지.
[15연승 도달. 무너져내린 애리조나. KANG, 9경기 연속 MOM으로 메이저리그 역대 기록 갱신]
[최근 10경기 .568/.698/1.189. 슬럼프를 넘어 한 층 더 진화해버린 다저스의 괴물.]
한 번 감을 되찾은 해준의 페이스는 끝을 모르고 그 상승세를 더해갔다.
"흐읍!"
따아아아악-!
[담장 직격! 브랜드 워커에 이어 커트 로빈슨까지 홈인! 3루타를 쳐낸 강이 포효합니다! 스코어를 5점 차까지 벌리는 다저스 선수단! 상대는 이미 전의를 상실했어요!]
쳤다하면 장타에.
퍼어어억-!
[YES!, It's double play, and he is The Freak Fielder! 이제는 모르시는 분들이 없을겁니다! 강의 수비는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레벨이라는 것을요! 믿을 수 없는 다이빙 캐치,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송구가 오늘도 그림 같은 하이라이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수비는 변함없이 상대에게 절망을 안겨주었으며.
촤아아아악-!
[세입! 세입입니다! 상대의 루상을 농락하기 시작하는 KANG! 이제 그는 절대 걸러서는 안될 존재라는 것을 상대는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요! 벌써 2도루째! 타석에서도, 베이스 위에서도 그를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는 베이스 위에서 마저 막을 수 없는 기세로 내달리기 시작한 다저스의 괴물 리드오프.
그렇게 애리조나와의 2차전마저 승리로 끝이 났을 때.
"대박이에요, 대박! 2위랑 압도적인 차이로 유니폼이 팔려나가고 있다고요! 이러다가 야구로 버는 돈보다 유니폼으로 버는 돈이 많아지면 어쩌죠?"
해준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며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던 오광녹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유니폼 매출량과 기타 수치들을 확인한 오광녹은 자신이 말도 안된다는 소리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LA다저스 지역 케이블 시청률 역대 최고 수치?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있는 메이저리그. 그 1등 공신은 다저스의 퍼펙트 플레이어 KANG.]
[KANG의 굿즈가 전량 매진된 다저 스타디움 팀 스토어, 오스만 매니저 '이런 일은 이곳에서 20년 이상 근무하며 처음 있는 일이다.']
유니폼은 미친듯이 팔려나갔고, 홈구장의 팀 스토어는 해준의 굿즈를 찾는 팬들로 넘쳐나며, 시청률마저 매 경기 고공행진을 기록해나간다.
유명 검색 엔진 트렌드 리더의 이름에는 해준의 이름이 고정적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였다.
비시즌?
오광녹은 해준의 출연을 바라는 수많은 TV쇼와 토크쇼 PD들이 연락을 주고 받으며 스케줄을 조정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력분석실에서 형하고 쪼그려 앉아 컵라면이나 먹으면서 비디오 분석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오광녹은 살짝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KBO 전력 분석원 시절, 자신이 이렇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면 사람들은 손가락질 하며 미친놈이라 했을 것이 뻔했다.
KBO 2군 선수의 에이전트를 맡아 수 억의 인센티브를 받는 미래라니?
하지만 그가 생각해도 망상에 가까운 현실이 지금 눈앞에 찾아와있었다.
오광녹이 헤실헤실 거리며 웃음을 짓자, 해준은 그런 그를 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입에서 나온 말은 그와는 살짝 다른 종류였지만.
"광녹아, 야구 선수의 전성기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신기루야. 즐길 수 있을 때 즐길더라도 지금 같은 일들이 쭉 일어나지는 않겠지."
물론 지금의 감각은 너무나 확고하다.
몸은 가벼웠고, 공은 실밥 하나하나까지 다 눈에 잡히는 착각이 들 정도였으며, 배트는 성냥개비를 휘두르는 것 같았으니까.
당연히 성적이 뒤따라오니, 성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스포츠 스타에게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해준은 이 모든 것이 찰나에 불과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었다.
오광녹은 미래를 너무 부정적으로 본다며 한소리를 해댔지만, 해준은 선수 당사자로서 에이전트와는 다른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찾아보면 언제나 있었지. 언제까지고 잘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순간 고꾸라지는 선수들이 말이야.'
그 이유는 너무나 여러가지다.
신체적 부상일수도, 심리적 이유일수도, 불행한 사고일 수도 있다.
하다못해 한창 절정기를 구사하다가도 잘맞은 타구가 호수비에 걸리고나서는 다시는 그 감각을 찾지 못하는 선수에 대한 이야기까지 존재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다저스의 클럽 리더 마르쿠스는 신인들에게 항상 이런 말을 해주고는 했다.
'지금 잠깐 배트에 공이 잘 맞는다고 영원히 그럴거라 착각하지마. 야구 선수는 잘나갈때 벌어두고 못나갈때 까먹는 직업이니까.'
자신에게는 그런 말이 필요 없을 것이라며 말을 아낀 마르쿠스였지만, 해준은 마르쿠스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놔야 한다.'
생각해보면 아웃라이어 시스템과 링크된 후, 자신의 야구는 끝 모를 폭발적인 성장의 나날들이었다.
KBO 2군, 포심부터 시작해 체인지업, 커브, 슬라이더에 대한 감각을 차례대로 각인해나가고, 홈런을 때려내며 결국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자리에 도달했다.
'여기서 더 미친듯한 성장을 바라기에는 어렵지.'
해준이 시야 한 편에 떠올라 있는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포심 80, 싱킹 패스트볼 70, 커브 70....'
그곳에는 자신의 능력이 수치화 되어 보기 좋게 나란히 떠올라있었다.
이제는 특정 아웃라이어를 만나지 않으면 성장하기 힘든 수준까지 올라온 변화구 감각들.
심지어 주루와 송구까지 완성된 상태이니, 여기서 더 발전한다면 나사나 국가 비밀 연구소에 끌려가 해부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해준은 LA 다운타운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 성장에 집중하는 것은 낭비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하는, 집중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
해준의 고민이 깊어졌다.
하루하루 경기에, 물이 오른 감각에 몰두해 방망이를 휘두르고 뛰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해준은 그보다 더욱 뚜렷하고 큰 목표를 원했다.
자신을 미칠듯이 다그칠 수 있는, 그로 인해 더 높은 곳까지 오르도록 만들어주는 무엇인가를.
막상 성장의 순환 속에서 벗어나자니 또 다른 유형의 목표들이 너무나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때 해준의 눈에 들어온 한 포스터가 있었다.
"..올스타전?"
7월 16일로 예정된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최근에는 그곳으로 향할 선택 받은 선수들에 대한 온라인 투표가 한창이었는데, 해준의 이름은 유격수 부분 1위를 내달리는 중이었다.
LA 시내에도 이를 홍보하고 투표를 독려하는 포스터들이 잔뜩 붙어있었는데, 그 포스터 정중앙에는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해준이 서있었다.
"아, 올스타전이요? 역대 최대 득표 페이스일껄요? 자세한 집계 사항 확인하고 알려드릴께요."
운전을 하던 오광녹이 커브를 돌며 대답했다.
해준이 올스타전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2027년 7월 16일.
그 날의 다저 스타디움은 분명 미국 전역에서 모여든 팬들로 떠들석해질 것이 분명했다.
"7월 16일이라.."
그때, 야구광답게 오광녹은 자신도 모르게 머릿 속에 떠오르는 사실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7월 16일이면 조 디마지오가 56안타를 쳐낸 날 아닌가?"
뉴욕 양키스의 범선(The Yankee Clipper), 56경기 연속 안타의 전설 조 디마지오.
오광녹의 중얼거림을 들은 해준이 입 속에서 그 이름을 여러번 굴려보았다.
"조 디마지오라.."
야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법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의 이름.
목표로 삼자면 그런 선수가 좋을까?
해준은 자신의 고민에 그 이름을 끌어들여보았다.
모두의 기억 속에 남는 위대한 선수. 분명 좋은 목표다.
'하지만 너무 추상적인데. 더 구체적인..'
그 순간.
[아웃라이어 '양키스의 범선The Yankee Clipper', 조 디마지오의 기록에 도전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범선의 뱃고동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