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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에서 타자까지-120화 (120/137)

< 언론플레이? (4) >

120. 언론플레이? (4)

장인철 피디는 자신에게 닥친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성적으로 이해는 했지만.

'잠깐, 내가 왜 이런 꼴이지?'

그의 감정이 지금 상황에 대해 맹렬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또 별개의 일.

황당, 의문, 어벙함을 지나 이제는 분노가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지금 방송국 PD를 협박해?'

카메라와 마이크.

그가 살아온 사회에서 이러한 무기는 오로지 자신만이 휘두를 수 있는 특권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향하자, 장인철 피디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함께 본능적으로 해준의 몸을 훑어내렸다.

그리고는 곧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새끼 봐라? 마이크도 안 찼잖아.'

카메라가 백날 둘러싸고 있어 봐야 이 거리에서 마이크 없이는 대화가 담기지도 않는다.

장인철 피디는 해준의 앞에 바싹 달라붙었다.

'좋아, 지금 각도면 입 모양도 카메라에 안 들어가.'

그것을 확인한 장인철 피디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중얼거렸다.

"야, 강해준이. 너 미국에서 조금 잘나간다고 눈에 뵈는게 없지. 감히 방송사 PD를 상대로 협박질을 해?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고발 프로그램 하나 내봐? 내가 고발 전문인 거 알지? 이쪽 바닥에 탈탈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는 사람? 그런 사람 없어. 너라고 다를 줄 알아?"

장인철 피디는 야구 중계를 담당하는 중계 PD도 아니고, 하이라이트나 제작하는 제작구성 PD도 아니었다.

음주 운전, 성매매, 사기, 대학 진학 비리 등 스포츠 업계의 더러운 면모를 파헤치고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 전문 PD.

SBW의 평판이 좋지 않으면서도 이쪽 업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은 이런 PD의 역할이 컸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그러니까 좆되기 싫으면 당장 저 카메라들 치워. 뭐, 인터뷰 다시 해볼 테면 해보라고? 머리에 피도 안마른 새끼가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처먹어서.. 부모가 없어서 그렇겠지? 너 조대욱 감독이 키웠다며? 그 영감도 이 바닥 살면서 더러운 짓 많이 했을 텐데 어디 한 번 내가.."

그 순간 해준이 천천히 몸을 낮춰 장인철 피디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뭐, 뭔 놈의 눈빛이.'

장인철 피디는 몸을 한 차례 본능적으로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해준의 눈동자를 바라보자 잡아먹힐 듯한 위압감과 함께 오한이 등골을 타고 올라온 탓이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땀방울이 신발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해준은 그런 장인철 피디를 마주 보며 웃음을 흘려 보였다.

"이봐요, 장 피디님.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하신 것 같네요."

"뭐라고?"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차가움에 장인철 피디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긴가민가했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어디까지 처리해야 할지.. 하지만 방금 정해졌네요."

그와 함께 해준이 손짓을 하자 옆에 서 있던 오광녹이 아이패드를 건네주었다. 해준은 그 아이패드 화면을 조작하며 말을 이었다.

"고발 프로그램? 그것도 피디로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겠죠.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러기 힘들 겁니다."

"...무슨 헛소리야! 너! ...이 새끼 계속 이상한 소리 늘어놓으면.."

장인철 피디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지만, 황급히 카메라를 의식하며 목소리 끝을 죽였다. 아무리 마이크를 차지 않았다 해도 목소리가 커질 만큼의 흥분은 금물이다.

카메라에 음성이 담기면 무슨 꼬투리가 잡힐지 몰랐다.

하지만 해준은 그런 장인철 피디를 싸늘한 눈빛으로 한 차례 바라보고는 천천히 아이패드의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후배에 대한 폭언에 폭행, 여작가 성희롱은 일상에.. 고발 프로그램을 촬영하면서 심심치 않게 해 먹으셨네요. 대학 스카우트 비리를 덮어주는 조건으로 온갖 접대에 뇌물은 기본, 지인한테 부탁받고 특정인을 표적으로 되지도 않는 루머만 가지고 프로그램 내보낸 적 있으시죠? 그 고교 감독은 결국 구설에 휘말려 물러나고 장 피디님 지인이 그 자리 꿰차셨네요? 그리고.."

해준의 입에서 그동안의 치부가 줄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폭언, 폭행부터 시작해 있지도 않은 증인을 출연시켜 루머를 사실로 둔갑시키는가 하면, 해준에게 했던 것과 같이 출연을 거부할 시 상대를 고발 프로그램 대상으로 삼겠다는 협박까지.

장인철 피디의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그, 그건."

"어때요, 더 읽어드려요? 고작 몇 시간 만에 드러난 게 이 정도인데 마음먹고 파면 어떻게 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아시죠?"

사실 해준이 말한 것들은 은연중에 이 바닥에 알려진 사실들에 해당했다. 업계 관계자라면 모를 수 없는 사실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질과 비리를 일삼던 장인철 피디가 PD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선배들이 그리 해왔고, 그런 자극적인 소재를 이용해 시청률을 끌어올린 덕에 방송사라는 거대한 권력이 그를 지켜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경우가 달랐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상대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떠오르는 슈퍼스타. 의혹이 사실이든 아니든 방송국은 꼬리를 잘라내듯 단숨에 자신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너 이.. 아니, 그걸 어디서 주워들은.. 아니, 원하는 게 뭐야?"

그 말에 몸을 일으킨 해준이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왜 뭘 원해서 이런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그냥 그대로 돌려드리는 겁니다. 당신이 나에게 했던 행동들. 얼마나 기분 더러운지 아시라고요."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장인철 피디는 불안했던 마음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준의 말을 듣고 안심한 탓이었다.

'그렇지. 아무리 막 나간다 해도 방송국이랑 대놓고 척을 지고 싶겠어?'

그저 돌려주는 것이라면, 터트릴 생각까지는 없다는 것이니까.

"그럼 내가 물러나기만 하면.."

장인철 피디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과 함께 입을 열었다.

운이 좋다면 조용히 이번 일을 끝낼 수 있다.

방룡필 국장에게 대판 깨지긴 하겠지만, 차라리 그편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그때 오광녹의 말이 들려왔다.

"오디오 잘 담겼네요. 크으, 자백 좋고. 인터뷰는 여기서 끝입니다. 수고하셨어요, 장 피디님. 아니, 앞으로는 그냥 장인철 씨인가?"

"뭐라고? 오디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장인철 피디는 자신도 모르게 옆에 서 있던 오광녹을 바라보았다.

그의 옷깃 위로 마이크가 드러나 있었다.

급한 마음에 해준의 옷만을 살피고, 그 옆에 있던 오광녹을 살펴보지 못했었다.

"자..잠깐."

어떻게든 지금 사태를 무마해보려던 장인철 피디.

그때 그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스마트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지이잉- 지이잉-

반쯤 멍하니 스마트폰을 들어 바라본 그는, 그 순간 눈빛에 조그마한 생기가 돌았다.

[방룡필 국장]

'그래, 국장님이라면..'

이 사태를 무마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자신이 시작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자신은 어디까지나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었다.

"자, 잠깐 전화 좀."

황급히 고개를 돌린 장인철 피디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빠르게 중얼거렸다.

"방 국장님. 마침 전화 잘 하셨..."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이미 고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장인철 이 빌어먹을 새끼야! 너 뭐 하는 새끼야! 지금 미국 가서 뭔 짓을...

+++

해준의 인터뷰가 방송을 타고 나간 후.

다저스 선수들을 필두로 SNS상에 퍼져나갔던 해준에 대한 응원은 거대한 불길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언론 카르텔의 더러운 면모. PD들의 권력형 갑질?]

[한국 방송 관계자 '스포츠뿐만 아니라 연예, 음악계 전반에 걸쳐 PD들의 갑질은 유명하다. 중소기획사에게 출연을 종용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협박성 멘트를 이어가며 강제로 출연을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할 정도. 강해준 선수의 피해 사실도 이와 유사하다. 이번 사실을 밝힌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나는 그를 응원한다.']

[한국 미디어 KBM, MBW 빠른 사실 부정 보도. 묵묵부답 SBW?]

[로스앤젤레스의 스타, 메이저리그의 혜성 강을 협박하는 대담함. 뉴욕 출신 저널리스트 드류 피베타 '악명 높기로 유명한 뉴욕의 언론들도 그러지는 않는다'며 혀를 내둘러.]

[LA다저스 단장 에반 브루스 SNS에 입장 밝혀 '이번 일은 매우 끔찍한 사건이다. 당분간 한국 언론인들의 입장을 통제할 것. 앞으로는 허가받은 극소수만이 취재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북미 언론들은 한국통을 통해 얻은 온갖 소스들을 속보로 쏟아내기 바빴다.

축구의 아성을 너머 전 세계 1위 스포츠로 자리 잡을 압도적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는 메이저리그.

그 리그의 최고 슈퍼 스타가 자국의 언론으로부터 협박을 당했다?

이것만큼 조회수가 보장되는 사실 또한 없었다.

이러한 기사들은 빠른 속도로 번역되며 메이저리그가 자리를 잡고 있는 전 세계 국가들로까지 퍼져나가기까지 시작했다.

한편, 이에 대한 국내 팬들의 반응 또한 싸늘했다.

-국격 조져지는 소리 들린다, 주모! 여기 헬뽕 한사발!

-SBW 새끼들 사고 한 번 크게 쳤네 ㅋㅋㅋㅋㅋㅋ 지금 다 버로우 탔음. 욕 퍼부으려고 했는데 전화도 안받음.

-크으, 이래도 아직 해외 뉴스란에는 기사 하나 안 뜨죠?

-다 같은 새끼들이라니까 ㅋㅋㅋㅋㅋ 지 식구라고 감싸주는 거 봐라.

-이번에 강해준 선수 협박한 새끼 SBW ㅈㅇㅊ 피디랍니다. 이 바닥에서 유명함 ㅋㅋㅋㅋ

-와, 그 사람 고발 전문 프로그램 PD 아님? 지는 온갖 정의로운 척하면서 뒤로는 그러고 다녔단 말이야?

-이 바닥에 그런 놈들 한둘이냐 ㅋㅋㅋ 언론사들 다 똑같음. 맨날 근로 환경이 어쨌네, 불법이 어쨌네 하면서 지들이 가장 썩어 빠졌음.

-와, 근데 강해준 진짜 패기 개오지네. 언론사 그냥 정면에서 들이 박아버림 ㅋㅋㅋㅋㅋㅋ

-ㅇㄱㄹㅇ. 이거 경기 전에 있던 일이라며? 경기 끝나고 MOM 인터뷰에서 노빠구로 터트려버리네 ㅋㅋㅋㅋㅋㅋㅋㅋ

-이 형 예전부터 그러긴 했음. 포스팅 때도 세오레즈 폭발시켜버린 거 다들 알잖아. 4달러 ㅋㅋㅋㅋㅋㅋ 뒷일 생각하면 그런 일은 못하지.

그렇지 않아도 언론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지니고 있던 국내 팬들이다. 그에 더해 약속이라도 한 듯 국내 언론들이 침묵을 지키자 이에 대한 불만들이 연쇄 폭발처럼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띠리리리- 띠리리--

SBW 방송국.

이곳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전화벨 소리가 포성처럼 울려대고 있었다.

"아, 네. 저희는 교양국이고요 선생님. 스포츠국 사건은 아무것도 모르.."

"네? 아, 여기 예능국이라고요! 예능! 아, 이렇게 웃긴 일이 왜 예능이 아니냐고요? 무슨 말이 되는 소릴..."

"네. 네. 저희는 모르는 사.."

이러한 상황에 가장 사색이 된 쪽은 당연하게도 스포츠국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스포츠국 사무실은 고요함에 휩싸인 상태였다.

그 겉을 맴도는 칼날 위를 걷는듯한 긴장감.

직원들은 모두 하얗게 뜬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무실 내 모든 전화선을 뽑도록 만든 방룡필 국장.

그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어디서부터.."

이런 난리가 난 이상, 승진은커녕 자리보전조차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단순히 한 명의 야구 선수가 입을 열어 난 사단이라기엔 너무나도 압도적인 파급력.

한국의 슈퍼스타들조차 자신을 이런 식으로 들이받지는 못했다.

'그걸 강해준이?'

그의 입장에서는 지나가던 개미만도 못했던 선수가 KBO 시절의 강해준이었다. 아무리 메이저리그에서 잠깐 잘나간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커다란 파급력을 몰고 올 수 있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시청률 때문에 다큐멘터리 하나 찍어보려다 이게.."

빈대를 잡으려다 초가집을 태워버린 상황.

사장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스마트폰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지만, 방룡필 국장으로서는 도저히 그 전화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 끝났어..'

아마 지금쯤이면 SBW 사장이 귀신 같은 얼굴을 하고서 스포츠국을 찾아오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불행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조용히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확인하던 PD가 귀신에 홀린 듯이 다가와 말했다.

"..방 국장님."

"뭐?"

"Utube의 채널들이 정지되고 있습니다. 수익 창출도 모조리 막혔다고..."

"뭐라고?"

글로벌 동영상 공유 사이트 Utube.

나날이 떨어지는 TV광고 단가에 위기의식을 느낀 SBW는 최근 들어 Utube에서 수많은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은 어느새 이들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그런 채널들이 줄줄이 정지당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제는 화를 낼 기운조차 없는 방룡필 국장.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바라본 그의 눈에 채널에 날아온 경고 메일이 들어왔다.

[해당 채널은 급격히 증가한 이용자들의 신고로 정지되었으며, 이에 대한 사유를 해명...]

전 세계에서 이 소식을 접한 메이저리그, 그리고 해준의 팬들이 득달같이 몰려들어 SBW 채널을 모조리 차례대로 신고하고 있었다.

"이런 씹어먹을..."

딱-!

힘이 풀린 그의 손아귀에서 스르르 놓아진 스마트폰이 바닥에 떨어져내렸다.

< 언론플레이?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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