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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에서 타자까지-114화 (114/137)

< 본연의 재능 (2) >

114. 본연의 재능 (2)

철렁 소리와 함께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아, 미안. 손에서 너무 늦게 빠졌네."

카일이 손을 흔들며 외치자, 다저스의 백업 포수 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연습구로 할래? 아니면 그냥 카운트?"

"이번 건 연습구로 하죠."

"준 네가 원한다면야."

자리에서 일어나 공을 주워 카일에게 돌려준 필은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번 승부에 흔쾌히 포수를 자청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는 타격폼까지 뜯어고친다니.'

사실 필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올라오는 흥분에 특유의 청록색 눈동자를 반짝였을 정도였다.

다저스에 나타난 천재적 이레귤러.

나이는 자신보다 4살이나 적지만, 벌써부터 메이저의 역사에 잊히지 않는 발자국을 남기고 있는 괴물.

그런 해준이 타격폼을 고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

어떻게 생각해봐도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운이었다.

'가까이서 어떻게 타격폼을 조절하는지 봐야지. 이런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물론 다른 선수가 시즌 중 이런 시도를 했다면 삽질이나 미친 짓이라며 비웃었을 것이다.

메이저리그에 붙어있기만 해도 보장되는 혜택과 연봉, 명예.

그것들은 이런 도박 테이블 위에 올리기에는 너무나도 달콤한 보상들이니까.

확실한 것만 가지고 덤벼들어도 모자랄 판에 타격폼 수정이라니?

미치광이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하지 않을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해준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나름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란 필조차 진짜 천재가 있다면 저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분명 말도 안 되는 결과물을 보여줄 거야.'

그렇기에 필은 굳게 믿고 있었다.

이 변화는 단지 이 괴물이 다시 한번 더 사람들을 놀래키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고.

그렇다고 해서 해준이 며칠 만에 타격폼을 수정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사소한 동작, 루틴, 마음가짐, 하다못해 그 날의 컨디션까지.

'디테일하고 조그마한 변화에도 폭풍이 닥친 것처럼 요동치곤 하는 것이 타격폼이란 놈이지. 처음에는 고생 좀 할 거야.'

필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해준이라도 앞으로의 페이스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다리를 조금도 들지 않던 타자가 레그킥이라니. 준의 타고난 운동 센스를 생각하더라도 타이밍과 밸런스를 잡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건 어쩔 수 없겠지.'

필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미트를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해준의 타격폼에서 온 신경을 기울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현재 상태와 앞으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참고하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체인지업 사인?'

마운드의 카일 리크가 사인을 보내왔다.

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퍼어어엉-!

카일 리크가 본격적으로 공을 던지기 시작했을 때.

몇몇 베테랑 선수들은 이번 라이브 배팅이 그저 테스트 수준에서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배팅 케이지 한편에 모습을 드러낸 에반 브루스 단장.

카일 리크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브루스 단장 때문인가?'

'카일 녀석. 최근 입지가 불안하긴 했지. 그래서 이러는 건가?'

'아무리 상대가 준이라도 하루아침에 타격폼을 바꾸고 나타났는데.. 단장 앞에서 안타를 허용하고 싶지는 않겠지.'

단순한 불펜 투구를 겸해 던지는 라이브 배팅이라 하기에는 살벌한 구위.

흥미로움과 유쾌함으로 가득했던 배팅 케이지 공기가 어느새 진지한 분위기로 뒤바뀌었다.

그 사실을 직접 상대하는 해준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초구부터 체인지업. 뒤에는 포심 패스트볼. 다시 체인지업이라..'

철저한 페이스 분배.

누가 봐도 타이밍을 뒤흔들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카일, 레그킥의 약점을 노리고 있구나.'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레그킥에 대한 인식은 어딜 가나 좋은 편은 아니긴 했다.

힘을 수월하게 모을 수 있다는 장점에 비해, 타이밍을 잡기가 만만치 않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카일 리크도 그 사실을 이용해 자신에게서 아웃을 빼어내기 위한 빌드업을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었다.

'뭐, 보통 선수라면 그게 통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선입견에 가까웠다.

운동신경이 좋지 않은 선수라면 레그킥은 분명 독이 될 수 있다. 다리를 크게 드는 자세에 신경 쓰다 보면 밸런스는 물론이고 자칫 타이밍마저 쉽사리 흔들리곤 하니까.

하지만 여기서 문제점은.

따아아악-!

자신은 그저 그런 운동신경을 지닌 선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4구째,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다 안쪽 스트라이크존에 살짝 걸치는 써클 체인지업.

해준의 배트에 걸린 공이 파울 타구가 되며 케이지 그물망에 걸려 떨어졌다.

'이제 슬슬 맞네.'

실전은 처음이기에 살짝 어긋났던 레그킥의 타이밍.

그것이 조금씩 맞아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까다로운 건 여전하지만.'

메이저리거급의 투수.

숙련도가 떨어지는 지금으로서는 파울이라면 몰라도, 장타를 때려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해준은 잠시 타석에서 벗어나 배트를 휘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부족한 게 뭐지?'

성공적으로 공을 때려내고는 있지만, 그것뿐.

타격의 목적이 공을 강하고 정확하게 때려내는 것이라면, 자신은 정확하게 때려내는데 치중한 나머지 강하게는 때려내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감이 올 것 같기는 한데..'

아직은 아니었다.

'뭐, 더 때리다 보면 알 수 있겠지.'

그렇기에 해준은 다시 타석에 들어서 자세를 잡았다.

고민을 해도 원인이 짐작되지 않는다면, 더 많은 데이터를 쌓고 다시 고민해보면 그뿐이니까.

하지만 카일 리크는 이번 승부를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꿀걱-

실전처럼 긴장감이 극에 달한 그의 목울대가 크게 한 차례 울렁였다.

'5구를 넘기면 안 돼.'

눈앞의 타자는 고작 데뷔 몇 개월 만에 역사상 최고의 배드볼히터라 불리기 시작하는 괴물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같은 배팅 센스 앞에서 투구수를 많이 가져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

'이번에 끝낸다.'

그렇기에 그는 이 순간을 승부를 결정지을 타이밍으로 보았다.

자신이 지든 이기든, 여기서 끝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들이밀 생각은 없었다.

'준은 하루 만에 바꿔 들고 나타난 타격폼으로 내 체인지업을 커트해대는 놈이야. 허를 찔러야 끝낼 수 있다.'

생각을 정리한 카일 리크가 투구판을 밟았다.

이제껏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투구.

지금까지의 철저한 체인지 오브 페이스 투구는 이 공을 위한 것이었다.

'준, 아무리 너라도 이건 건들지도 못할 거다.'

기존의 무기로는 메이저리그에서 버텨내길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카일 리크가 최근 갈고 닦았던 무기.

마침내 그 비수를 꺼내든 그가 마운드를 박찼다.

타아앗-!

한편, 카일 리크의 타이밍에 맞춰 레그킥 동작에 들어간 해준.

왼발 무릎이 명치 부근까지 올라오자 축발이 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카일 리크의 손을 떠나기 시작한 공의 궤적.

그것의 정체는 너무나도 확실해 보였다.

'체인지업!'

그와 함께 콰짓- 소리와 함께 바닥을 찍어버리는 왼발의 스파이크.

앞에서 단단하게 형성된 벽이 힘을 응축시키며, 확신이 담긴 스윙이 휘둘러질 준비를 끝마쳤다.

그 순간.

'...이건?'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타이밍이 흐트러졌다는 것.

까득-! 소리와 함께 스윙을 늦추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어졌지만, 한창 절정에 돌입한 타격 자세는 이미 배트를 휘두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런, 스윙 타이밍이 너무 빠르다!'

카일이 숨겼던 비수.

그 정체는 매우 간단했다.

새로운 구종이 아닌, 새로운 구질.

기존의 체인지업보다 조금 더 느린 이번 체인지업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지라도 분명 자신의 타이밍을 뺏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겼다!'

승리를 확신한 것은 공을 던진 카일 리크 또한 마찬가지.

예측을 벗어난 공의 궤적과 회전, 그리고 코스.

그로 인해 발생했던 미세한 격차.

이번 승부는 자신의 승리로 끝날 것이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0.01초의 차이일지라도, 타자에게 있어서 저 격차를 극복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그 순간.

'뭐지?'

해준은 모든 감각을 거칠게 뒤흔들어버리는, 내면 깊숙이서 고개를 들고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했다.

타격폼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끼이이이이익-!

휘둘러졌어야 할 배트가 강제로 머리 높이에 머문다.

자신도 모르게 억제되는 상체의 숙임.

하체는 이미 전진운동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대퇴근과 견갑골 사이의 힘의 전달 루트가 최대한 꼬여지고 팽팽하게 땡겨지며 타이밍을 강제로 늦춰버린다.

그 순간, 해준은 아마추어 시절 자신이 왜 레그킥을 고집했었는지 깨달았다.

'..그러고보면 이 타격폼이 내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최고의 자세였지.'

무결점의 이스마엘, 악마의 괴력이라 불리는 데블린처럼 메이저리그의 이름난 타자들은 각자 자신만의 시그니쳐와 같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 또한 패스트볼에 대한 비정상적인 강함과 특유의 배드볼 히팅 센스가 그 시그니쳐로 팬들에게 인식되고 있던 상황.

하지만, 그것들은 자신의 본연의 재능이 아니었다.

누구의 것이 아닌, 자신만의 진짜 재능.

트라우마 이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그것.

'어긋난 타이밍을 강제로 맞춰버리는 능력.'

힘을 모으는 것이 수월한데 비해 타이밍의 캐치가 어려운 레그킥. 하지만 자신의 재능은 장점을 취하면서도 단점을 강제적으로 보완해버릴 수 있었다.

"흐읍-!"

한 템포 늦게 억제되었던 배트가 폭발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트라우마와 아웃라이어들의 존재에 눌려, 그동안 자신을 외면해왔다는 것에 대해 거세게 항의라도 하듯.

결정적인 순간에 그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기 시작한 본연의 재능.

'이걸 잊고 있었다니.'

----------!

그 짧은 시간 동안 타격폼의 힘을 더더욱 응축해버린 타격자세는.

따아아아아악-!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으로 공을 때려내고 있었다.

+++

5월 28일.

[호우--! 전 세계의 다저스 팬 여러분, 다저 스타디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말 오랜만의 홈 경기죠? 역대 유례없는 호조의 페이스를 보이는 다저스의 시즌 초 모습! 이것을 그동안 집에서만 봐야 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됐습니다만, 이제는 아닙니다! 홈에서 이어지는 6연전! 그 시작을 리그 5위 샌디에이고와의 3연전으로 시작합니다!]

이틀간의 휴식을 끝마친 LA다저스.

38승 15패를 기록하며 7할이 넘는 승률을 기록하고 있는 팀답게, 넓은 다저 스타디움의 관중석은 푸른 물결도 가득 찬 상태였다.

"오늘도 한번 이겨보자고!"

"Go dodgers!"

"강, 경기 끝나고 사인 좀 해줘요!"

반면, LA에서 멀지 않은 샌디에이고의 팀이 원정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파드리스의 원정 팬들은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프레스 박스의 기자들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즌 승률이 4할에 간당간당하니 팬들이 굳이 여기까지 와서 보고 싶진 않았겠지."

"7할 대 4할. 뭐, 기대할 것도 없군."

"오늘은 별다른 이슈거리가 없겠는걸."

"뭐 있겠어? 다저스 승리, 파드리스 패배. 미리 써놔도 될 것 정도인데."

"그러고 보니 강은 이제는 완전히 슈퍼스탄데? 수비만 나서도 환호성이 쏟아질 지경이니."

긴장감이 생겨나기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전력 차.

포토존의 사진 기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다저스의 선수들을 향해 있었는데, 이를 바라보는 파드리스 선수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제길, 어디를 가더라도 찬밥 취급이군."

"약팀 선수들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개개인의 인기가 수익과 직결되는 시대다.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노출도가 적어진다는 의미니 이익에 민감한 몇몇 파드리스 선수들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실력이 모든 것이 메이저리그 세계.

퍼어어어억-!

"아웃!"

[What a catch! 1회부터 KANG의 미친 수비가 다저스 팬들의 심장을 강타하는군요! 노약자분들은 관람을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이거 농담인 거 아시죠?]

억울하다면, 실력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fuck, 저 괴물은 자식은 여전하잖아."

안타성 타구를 뺏긴 샌디에이고의 3번 타자 저스틴 아델.

그는 이제는 체념이라도 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벤치로 돌아왔다.

1회 초, 시작부터 안타성 타구를 뺏어내며 수십 대의 카메라를 자신에게 쏠리도록 만든 해준.

자신은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수비도 저 난리면 타석에서는 얼마나 난리를 치려나."

그는 공수교대를 위해 글러브를 챙기면서도 참담한 앞날이 예상되는 것처럼, 전광판을 한 차례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뒤.

[다저스의 첫 공격 기회! 이제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다저스의 리드오프 KANG이 타석이 들어섭니다!]

다저스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 본연의 재능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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