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연의 재능 (1) >
113. 본연의 재능 (1)
LA다저스 단장 에반 브루스.
매년 5월 말은 그에게 있어 소화불량과 두통, 심리적 불안감이 절정에 다다르는 시기였다.
페이롤만큼은 영원한 라이벌 뉴욕 양키스와 1위 자리를 다투지만, 승률은 5할 밑을 맴돌기 일쑤던 끔찍한 시기.
당연하게도 언론에서는 매일 같이 비난을 쏟아냈고, 그는 방공호에 들어가 폭탄의 굉음에 덜덜 떨듯 병적으로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고는 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막상 당해보면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지.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싶더라니까?"
단장 보조 에버슨 햅.
그 또한 매년 반복되던 그 끔찍한 참상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그때의 심정을 회상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큰돈을 영입한 선수들을 스윙에 맥아리가 없지, 투수들은 야수들 수비에 fuck 소리나 연발하다 무너져내리지. 그것만 하면 다행이게요? 서로 남 탓만 하다가 주먹질이나 해대는 놈들도 있었죠. 지옥이 있다면 그곳인가 싶었다니까요?"
이 팀에 있다가는 내 커리어마져 함께 침몰하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끔찍한 시기.
물론 끝에 가서는 매번 지구 우승을 거뒀으니 된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경험한 피가 말리는 느낌은 말로는 형용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2027년 5월 28일.
올해만큼은 달랐다.
[38승 17패, 승률 0.717. 다저스, 양키스에 이어 리그 전체 승률 2위. 드디어 맞이한 따뜻한 봄?]
[에이스 킬러 KANG, 애런 테린 격파! PHI전에서 2승 1패를 거둔 다저스의 매서운 기세.]
[내셔널리그 투수, 타격 전 부분 1위! 놀랍도록 달라진 다저스의 비하인드 스토리.]
[언빌리버블 KANG, 그를 영입한 단장 에릭 브루스. 그 혜안의 비결은? 전격 인터뷰 1부 공개.]
작년 스토브 리그.
모두를 충격에 빠트린 과감한 행보를 보이며 해준과 8년 4억 2000만 달러라는 역대 최고액 계약을 성사시킨 다저스.
시즌 초까지만 해도 해준의 영입은 원페어도 되지 못할 것이라는 비난이 이어졌지만, 그 영입이 실상은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라는 것이 밝혀지자 열심히 비판과 비난을 이어가던 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저스의 대표적인 골칫덩어리 중견수 가브리엘 로드리게스를 밀어낸 것을 시작으로, 수비와 타격, 공수양면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한 해준.
일부 언론에서는 놀라운 영향력으로 다저스를 변화시킨 해준을 베이브 루스에 비교할 정도였으니 그 파급력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마다 흐뭇한 시선으로 기사들을 훑어 내려가던 에반 브루스.
-릭입니다.
그런 그가 릭 베이츠 감독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을 때.
"....지금 자네 뭐라고 했나?"
그는 소화불량과 두통이 다시 이는 것을 느꼈다.
"강이 타격폼 수정을 원한다고?"
다저스 돌풍의 핵심인 해준.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변화의 징조가 감지되고 있었다.
"...내가 직접 보러 가야겠군."
에반 브루스가 황급히 단장실을 벗어났다.
+++
다저 스타디움의 라커룸.
새벽부터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 가벼운 훈련을 끝마친 해준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타격자세의 변화를 위해 조금씩 수정을 가해봤지만, 만족스러운 스윙 궤적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상황.
해준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타격폼이라.'
포심 패스트볼 아웃라이어 토니 디에고 블랑코.
지금의 자신을 있게 만들어준 퍼스트 링커이자 아웃라이어.
그동안 이 선수의 타격폼과 감각은 자신의 가장 근본적인 기반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탠스, 호흡, 스트라이드, 타격 어프로치, 사소한 자세의 디테일까지. 그 모든 게 포심을 사냥하기 위해 최적화된 선수였지.'
그에 더해 다른 아웃라이어들의 변화구 감각까지 더해지며 자신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최고의 결과라 봐도 좋았다.
KBO의 0할 타자가 메이저에서 4할을 치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 순조로움에도 슬슬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던 이상,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이 문제였다.
'타격폼이란 결국 한 선수의 재능과 경험으로 빚어진 집합체이니까.'
타고난 재능의 방향성, 운동신경, 팔다리의 길이, 동체시력.
그 외에도 수많은 요소를 고려하여 스스로에게 최적화시킨 것이 바로 프로 선수로서의 타격폼이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자면, 그 타격폼이라는 것은 아무리 시스템이라는 마법을 거쳤다 하더라도 결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소리였다.
'처음부터 나를 위해 정립된 게 아니니까.'
그 증거는 몸에 쌓이는 피로에서부터 증명되고 있었다.
-현재 종합 피로도 51.5%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특수 모듈 '철인'으로 스스로의 상태를 수치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수비와 공격, 공수양면에서 놀라운 활약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수치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피로도.
KBO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원정 거리와 시차 적응 문제도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자신에게 맞지 않은 타격폼이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을 조금씩 좀먹듯, 신체의 내구도를 갉아먹어 가고 있었으니까.
'당장은 티가 나지 않을지 몰라도 3년 정도 지속 되면 또 이야기가 다르지.'
그렇기에 지금부터 타격 자세를 수정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무언가 빼먹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트라우마에 시달리기 이전.
자신에게 온전히 맞춰 정립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타격폼을 연습해보던 해준은 계속해서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진 듯한 느낌 속에 빠져들었다.
'그게 뭘까?'
해준은 라커룸에서 태블릿을 꺼내 영상을 재생시켰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봉황대기 결승전.
태블릿 영상 속, 아직 앳된 얼굴의 자신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타석에 서 있었다.
매우 가벼운 토텝만으로 타이밍을 잡아내는 지금과는 다른 극단적인 레그킥.
스트라이드 넓이 또한 지금보다 넓게 잡아간다.
따아아아아악-!
이어폰을 타고 호쾌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해준은 고등학생 시절 자신의 타구가 담장 너머를 넘어가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격 어프로치도 매우 공격적이었어.'
지금 돌아보자면 고등학생 시절이니 먹히는 타격이기도 했다.
변화구의 각은 크지 않았고, 공이 몰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무엇보다 공 끝이 프로 레벨보다는 매우 대응하기 수월했으니까.
'물론 프로에 가서도 먹힐 수도 있었지만.. 그걸 제대로 검증도 해보기도 전에 머리에 헤드샷을 맞아버렸지.'
트라우마에 시달린 이후로는 저 타격폼을 싹 고쳐버렸다.
공이 보이질 않으니 어떻게든 때려낼 확률을 높일 수 있도록 스윙폭을 줄이고, 데이터 분석을 통해 코스와 구질을 예측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던 날들.
'하지만 이제는 공이 보인다.'
트라우마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자신의 재능을 끌어낼 수 있는 타격폼을 되찾는 것이 최우선이다.
'하지만 정작 이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없단 말이지.'
해준이 계속해서 영상을 돌려보았다.
스스로 확신도 없는 타격폼을 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때, 뒤에서 다가온 마르쿠스가 자신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봐, 준. 소식 들었어. 타격폼 고칠 거라며?"
그 말에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 빠르네요. 로니어 코치님이 말해줬어요?"
"그렇지 뭐.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바로 네 이름이 나오더라고."
마르쿠스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저스의 클럽 리더인 마르쿠스.
코치진은 그에게 많은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고, 그것은 해준이타격폼을 수정하겠다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로니어 마토스 코치는 마르쿠스가 해준의 타격폼 수정을 만류하기를 원하며 이야기를 꺼낸 것이고, 정작 마르쿠스의 생각은 달랐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뭐든지 본인에 대해서는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준 너라면 더더욱 말이야. 말을 하진 않아도 뭔가 문제점을 느끼고 있는 거지?"
마르쿠스의 말에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체력적으로 너무 부담스러운 폼이거든요. 지금이라면 몰라도 나중에 가서는 결국 파탄을 드러낼 거에요."
"하긴, 지금 타격폼에 정착한 지 1년도 안 됐다고 했나?"
마르쿠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타격폼이란 처음에는 잘 들어맞는 것 같다가도, 예기치 못한 순간에 치명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곤 하는 법이다.
'준은 감이 좋지. 사전에 그 징조를 감지한 모양이로군.'
그렇게 생각한 마르쿠스의 시선에 해준이 들고 있던 태블릿이 들어왔다. 마르쿠스는 그 태블릿에서 재생되고 있는 영상을 자세히 바라보고는 물었다.
"뭐야 준. 이거 네 고등학교 때 비디오야?"
"네. 봉황대기 때죠."
"봉황대기? 처음 들어보긴 했지만, 투수의 레벨이 높아 보이네. 분명 한국 내에서는 유명한 대회겠지?"
"메인 토너먼트 대회 중 하나죠."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비디오 속에서 투수는 훗날 KBO에 데뷔해 MVP까지 수상하니까.
부상으로 몇 해 만에 사라지긴 했지만, 분명 고등학생 시절 재능만큼은 자신과 비견될 정도였다.
따아아아악-!
그때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마르쿠스는 그 광경에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수준을 따지자면···. 이쪽이 훨씬 레벨이 높군.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도 1라운드에서 뽑혔을 거야. 왜 KBO에서 뛰었던 거야? 곧바로 메이저로 오질 않고."
그 핀잔 아닌 핀잔에 해준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있을 당시에는 조금 민감했거든요. 인재 유출에."
"그 당시라면.. 음, 그럴 수도 있겠군."
마르쿠스 또한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저리그가 본격적으로 스타 양성을 지향하기 시작하던 첫해. 그동안 국제 아마추어 영입을 억제하던 CBA룰이 개정되자 한국과 일본, 대만 등의 프로 리그들은 민감한 반응 내보였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웃으며 해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튼 너무 고민만 하지 말고. 그냥 느낌대로 휘둘러봐. 때로는 영상 속에서 알 수 없는 걸 알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는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라이브 배팅이라도 해볼래?"
+++
타격 코치 로니어 마토스.
다저스에 몸을 담은 지 5년.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이 중년의 타격 코치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옆에는 팔짱을 끼고 있는 마르쿠스가 서 있었는데, 로니어 마토스는 배트 케이지에 들어선 해준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타격폼을 굳이 수정하겠다고?"
"본인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더군요. 뭐, 다른 타자도 아니고 준 아닙니까? 남들이 느끼지 못한 무언가를 느낀 모양입니다."
"...허어."
로니어 마토스 코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저스 돌풍의 핵심, 동양에서 건너온 이 젊은 타자의 성적은 굳이 변화를 주기에는 너무나 놀라웠으니까.
시즌 타율 0.427, 출루율 0.555, 장타율 1.020.
테드 윌리엄스보다 높은 타율, 2004년 배리 본즈의 출루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장타율만큼은 2할이나 더 높다.
물론 타석수가 누적될수록 이 성적은 어느 정도 하락세를 그릴 것이라 예상됐지만,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지금의 해준은 메이저리그 루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을 보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런 타격폼을 바꾸겠다고?'
심지어 벌써 타격 연습에 들어간 상황이다.
로니어 마토스는 문득 이 눈앞의 자신만만한 젊은이가 잠시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타격 코치로서 이대로 타격폼 수정을 보고만 있을 수는 노릇.
로니어 마토스는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말리는 건 좋지 않지.'
그도 경험했듯, 젊은 혈기는 때때로 누군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수록 그 의지를 불태우는 법이다.
'본인도 몇 번 겪어보면 알거야.'
그리고 그것을 굳이 실전에서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마운드에는 로니어 마토스의 코치의 부탁을 받은 불펜 투수 카일 리크가 올라가 있었는데, 최근 등판이 없다시피 했던 그는 흔쾌히 해준에게 공을 던져달라는 부탁을 수락했다.
그 광경을 다른 다저스 선수들이 놓칠 리 없었다.
오후 훈련은 이미 정리가 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곧 있으면 원정팀 선수들이 들어올 시간.
막바지에 이루어진 흥미진진한 대결에 재밌다는 표정을 지은 다저스 선수들이 모여들었다.
"뭐야, 라이브 배팅이야?"
"준이 타격폼을 수정한다는데? 그거 테스트한다는 것 같더라고."
"엑, 진짜? 그래서 로타스 코치님 얼굴이 죽을상이었구나?"
"애초에 수정하겠다고 한 지 하루도 되질 않았는데 무슨 벌써 테스트를 해."
"하루라도 빨리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소리지. 도루 빼고는 전 스탯이 3위권 안에서 노는 타자인데. 수정 시간이 길어지면 슬럼프에 빠질지도 모르니까."
배팅 케이지 주변으로 선수들이 모여들어 잡담을 나누고 시작했다. 그 사이, 해준은 타석에 자리를 잡고 고등학교 시절의 타격폼을 떠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티배팅으로 어느 정도 감은 파악했어.'
마지막으로 이 자세를 취한 것은 벌써 7년 전의 일.
하지만 해준의 뛰어난 운동신경과 감각은 벌써부터 어느 정도 그 타격폼을 궤도에 올려놓은 데 성공했다.
'남은 건 실제 투수를 상대로 얼마나 먹히냐 알아보는 것뿐.'
그렇게 잠시 뒤.
"갑니다!"
준비를 끝마친 카일 루크가 투구판을 박찼을 때.
"레그킥?"
해준의 왼쪽 다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 본연의 재능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