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폰서, 그리고 드러난 또 다른 잠재성 (3) >
111. 스폰서, 그리고 드러난 또 다른 잠재성 (3)
다저 스타디움의 밤이 점점 무르익어갔다.
수많은 스타들과 LA지역의 기업가들, 소식을 듣고 날아온 월스트리트의 몇몇 펀드 매니저들까지.
와인을 들이키고,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한창 꽃을 피우자, 디지털 전광판에 표시된 기부 금액의 상승 폭이 급속도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2,414,500]
일찌감치 탁구 대회에서 탈락하고 와인잔을 홀짝이던 언더에라의 CEO 마이크 타티스.
그는 그 금액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체크를 화장실 종이 끊듯이 끊는군. 고작 술기운 때문에 말이야. 이봐, 제이미. 내가 장담하는데 분명 저 중 몇몇은 집에 가서 와이프한테 꽤나 바가지를 긁힐 거야. 술에 취한 남자의 호기로움이란 때때로 비싼 대가를 치르는 법이거든."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이크 타티스는 고개를 돌리자 부하 직원 제이미 창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붉게 물든 얼굴로 테이블에 몸을 기댄 채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체크에 무언가를 써넣고 있었다.
마이크 타티스는 그 광경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자네도 기부하게?"
기부하는 제이미 창이라니.
평상시에는 팁도 15% 이상은 절대 내지 않는 그녀였다.
하지만 제이미 창은 단숨에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니라 보스죠."
그 단호함에 마이크 타티스의 얼굴 위로 얼빠진 기색이 떠올랐다.
"...내가 왜?"
"그럼 언더에라 CEO가 자선 대회에 참가해놓고 그냥 빠지려고 했어요? 헤이즐이 체크 건네주길래 제가 챙겨왔죠."
"..이런, 헤이즐. 그녀가?"
마이크 타티스는 탄식을 터트리며 빠른 속도 와인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건네줬다면 자신의 반박은 높은 확률로 기각될 테니. 게다가 기부를 통한 면세 혜택도 신경 써야 하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이걸 몇 잔이나 마셔야 본전인 거야? 괜히 왔다가 돈만 나가게 생겼군."
그런 마이크 타티스의 투덜거림에 제이미 창은 어깨를 들썩이며 숫자에 마침표를 찍었다.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노래도 있잖아요? Welcome to dream world~ We hope~ 응? 이 가사가 아닌가?"
그 모습에 마이크 타티스는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얘가 취했는데?'
평소 딱딱하기 그지 없는 제이미.
그런 그녀의 텐션이 묘하게 높아져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God damn it! 이봐, 제이미! 우리 회사 말아먹을 일 있어? 이건 2,000만 달러잖아!"
체크에 적힌 금액을 확인한 마이크 타티스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가 단박에 체크를 뺏어가자 제이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2000만? 200만 쓴 것 같은데.."
"그것도 많아!"
마이크는 재빨리 0 두 개를 지우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군. 2,000만 달러를 쓰면서까지 LA지역 신문에 이름을 올리고 싶지는 않는단 말이지."
그때, 한 편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자네의 그 작은 속은 여전하군 마이크."
마이크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큰 체구에 탄탄함이 드러나는 한 백인 남성이 서 있었다.
"행크?"
+++
"당신이 여기 올 줄은 몰랐습니다."
"나야 뭐. 사람들 모이는 곳은 어디든지 가는 중개상 아니겠는가?"
언더에라의 CEO 마이크 타티스.
그리고 그린 코퍼레이션의 수장 행크 그린.
이 둘은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풋내기가 사직서를 던지고 나가길래 쪽박이나 차라고 빌었더니... 쯧, 이제는 어패럴 브랜드 1위 가치의 CEO라. 역시 사람의 앞 일이란."
"...진짜 망했으면 속이 고소했겠습니다?"
"그렇지. 그리고 전 연봉의 2배를 제시해서 다시 데려왔겠지. 어때, 지금이라도 생각 있나?"
"됐습니다. 차라리 내가 그쪽 회사를 인수했으면 인수했지."
마이크가 작게 투덜거렸다.
MIT를 졸업했고 야구에 큰 관심이 있었던 그의 첫 직장이 그린 코퍼레이션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 늙은 뱀을 직접 상대하기엔 껄끄러운데..'
그리고, 그렇기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행크 그린이라는 남자의 페이스에 휘말리기에 십상이라는 사실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가야겠군.'
남은 와인을 한입에 털어놓고는 잔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린 마이크가 입을 열었다.
"2억 7,000만 달러. 왜 거절한 겁니까?"
그 말에 행크 그린이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응? 이미 미스터 강에게 들은 것이 아니었나? 내 클라이언트가 아직 보여주지 못한 것이 남았다고 말했을 텐데."
마이크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봐요, 행크. 내 직원들의 계산은 정확해요. 2억 7,000만 달러라는 금액은 강의 미래 잠재 가치까지 포함한 수치입니다. 설사 강이 테드 윌리엄스의 타율과 배리 본즈의 장타율을 기록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뭐 몇천만 달러 정도야 오르겠지만."
심지어 이 금액은 대부분이 순수 현금 스폰에 해당했다.
세계 최고의 인체공학 전문가, 디자이너, 마케터들이 달라붙어 만들어낼 해준의 이름을 딴 새로운 브랜드마저 포함한다면 그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물론 종신 계약 생각이 있다면 10억 달러 이상도 가능은 합니다. 그러길 원합니까?"
그 말에 이번에는 행크 그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되지도 않는 소리. 10년 뒤의 미스터 강은 고작 그런 금액으로 잡을 수 있는 선수가 아니게 될 걸세."
서로의 생각이 확고한 상황.
그때 어느새 행크 옆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광녹이 입을 열었다.
"분명히 언더에라의 가치 측정은 과소평가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작년 스테파노 에릭센을 내세워 발생한 수익이 4억 2,000만 달러 아닙니까? 올해라면 몰라도 내년의 미스터 강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수익을 올릴 수 있을 텐데요."
그 말에 마이크 타티스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제이미 창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얼마가 적정치라고 생각하시죠?"
"적어도 10년 4억 7,000만은 제안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언더에라 스포츠 연구소의 우선 사용권은 당연하고요. 그 외에 강해준 선수의 이름을 딴 브랜드 런칭의 이익 비율도 조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제이미 창이 비웃음이 섞인 반응을 내보였다.
"우리들의 계산은 정확했어요. 당신이 말하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 브랜드 출시에 따른 이익을 너무 고려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요. 연구개발부터 시작해 마켓팅까지 다 최고의 인재들이 다루게 되죠. 언더에라와 같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곳은 얼마 없을 거예요."
하지만 오광녹의 반박은 재빨랐다.
"글쎄요, 오히려 그쪽이 고려하지 않은 점이 많은 것 같네요. 로키스와의 벤치 클리어링 이후 미스터 강의 브랜드 가치가 상승한 건 고려하셨습니까?"
그때부터 제이미 창과 오광녹의 대화가 빠르게 전개되었다.
"고작 한 경기가 선수의 가치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진 않아요."
"그 한 경기로 미스터 강의 트렌드 검색어 순위는 줄곧 스포츠 분야 1위를 기록하고 있죠."
"그 사실이 2억 7000만 달러에서 2억 달러나 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건가요?"
"메이저리그 최고의 슈퍼스타 애런 테린을 무너트렸고, 워싱턴의 게빈 하우스를 공략한 사실은요? 그 뒤로 미스터 강의 존재 자체만으로 평균 시청률이 1.3% 오른다는 조사 결과도 있죠."
"그들이 많은 팬을 확보한 스타들이긴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아요. 그 조사 결과 또한 아직 샘플 데이터가 부족하죠."
"미스터 강의 수비가 다저스의 내야진 수준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보고서는요? 중견수의 경우 평균 외야 실점허용률이 33.8% 하락했고 유격수의 경우 12.4%가 하락했죠."
"수치적 분석이 불충분했던 보고서였어요. 그의 수비가 뛰어나긴 하지만 다른 선수들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해석은 너무 비약이니까요."
그 팽팽한 긴장감에 마이크 타티스가 손을 들어 대화를 중단시키고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훌륭한 에이전트로군. 보통 데이터를 그렇게 바로바로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적은데 말이지."
행크 그린 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KBO 시절부터 미스터 강과 한 몸처럼 일해왔던 직원이지. 개인 분석 능력도 출중하고. 내가 괜히 고용했겠나?"
그리고는 이어말했다.
"애당초 이렇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네."
마이크는 그 말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마치 이 평행선의 연속을 끊을 방도를 가지고 있다는 듯한 말이었으니까.
"그렇다는 말은?"
"우린 말 그대로 아직 내보이지 않은 패가 하나 더 있었을 뿐이야. 아, 이제 시작하는군."
행크 그린의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
마르쿠스 배 자선 탁구 대회는 드레이븐 래리, 소피 래리 부부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드레이븐 부인이 미국 국가대표 출신이었다고?"
"어쩐지. 만만치 않더라니."
사람들의 시선을 꺼리던 드레이븐.
그는 불타오른 승부욕과 함께 어느새 우승한 자신의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관종은 관종인가."
"말로는 눈에 띄기 싫어해도 몸은 솔직하다 이거지."
다저스 동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기 바빴다.
별로 뛸 생각도 없어 양복을 한껏 차려입고 온 드레이븐은 어느새 땀범벅이 돼 있었으니까.
그렇게 탁구 자선 대회는 끝이 났지만, 이만큼의 사람들이 모인 만큼 준비된 이벤트는 몇 가지가 더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중 가장 큰 주목을 받는 것은.
"이제야 마르쿠스가 나설 차례인가?"
"다저스 역사상 최강의 타자 중 한 명인 마르쿠스와 대결이라. 평소라면 돈을 얼마를 주더라도 못할 경험이지."
바로 다저스의 프렌차이즈 스타이자 차기 레전드인 마르쿠스 영과의 대결이었다.
통산 슬래시라인 0.321/0.423/0.602.
메이저리그 포수 유일의 300홈런-300도루를 기록한 다저스의 레전드.
그가 유니폼을 입은 채 타석에 들어서 있었다.
안전을 위해 자선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덕아웃, 혹은 내야 관중석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상위 기부자 5명만 할 수 있다는 게 아깝긴 하지."
"10명, 15명 이런 식으로 늘릴 순 없으니까 말이야. 아직 시즌이 한창 중인 선수라고."
"그런데 너무 뻔한 결과이지 않아? 그 마르쿠스잖아."
"으휴, 이 친구야. 생각을 해봐. 홈런을 맞더라도 이야깃거리가 되는 거야. 보통 사람 중에 마르쿠스와 대결을 해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메이저리거가 아닌 이상."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어? 나온다."
처음 나선 이는 한 IT기업의 젊은 CEO였는데, 대학 시절 선수로 뛰었다며 자신만만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결과.
따아아아악-!
홈런.
초구부터 타구가 담장 너머로 사라지자, 멋쩍게 웃어 보인 그는 마르쿠스와 악수를 나누고는 마운드를 내려갔다.
"이런, 인정사정없는데?"
"그렇다고 해도 상대를 봐가면서 친다고. 이번에는 상대가 선수 출신이라니 제대로 해줬던 모양인데."
그 뒤로도 상위 기부자들이 줄줄이 마운드에 올랐다.
2번째 참가자는 할아버지 대신 마운드에 오른 어린 손자였는데, 마르쿠스를 삼진으로 잡아내고는 방방 뛰며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좌중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게 만들었다.
3번째로 올라온 드레스를 차려입은 한 유려한 분위기의 여성은 예상외의 속구로 뿌리며 좌중들을 놀라게 했고, 4번째로 오른 30대 남성은 우전 안타를 허용했지만, 활짝 웃은 표정으로 그 공을 소중히 품고 관중들 사이로 사라졌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이벤트.
하지만, 5번째에 이르자.
"다음은... 어라?"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오른 투수를 보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강이라고?"
"다섯 번째 기부자가 130만 달러였지? 그것참. 4억 달러 계약자라 그런가 통도 크군."
"마르쿠스와 강의 대결인가?"
"이거 흥미로운데. 다저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포수이자 명타자 마르쿠스와 앞으로의 역사에 이름을 새길 슈퍼 루키의 대결이라."
"같은 팀이라서 이런 광경은 평생 보기 힘들 줄 알았는데 말이야."
사람들은 강한 흥미가 돋았는지 하나같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중견수를 봤을 때 최고 송구 속도가 95마일 정도던가?"
"KBO 시절에 100마일을 찍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메이저리그에서는 아직 그 구속을 보여준 적이 없지."
"그래도 메이저리거인데 93마일 정도는 던지지 않겠어?"
이야기 소리로 가득 차 있던 관중석과 덕아웃이 순식간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대결.
해준은 그 시선들 속에서 마운드를 밟았다.
'쇼케이스라. 참 비싼 쇼케이스네.'
그것도 130만 달러짜리다.
타석에 들어선 마르쿠스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마르쿠스. 그런 표정 짓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해준은 그를 마주보며 씨익 웃어주면서 눈앞의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아웃라이어 '벨기에산 미사일' 애런 테린과의 링크 활성화율은 8%입니다.]
[활성화율이 매우 낮은 상태입니다!]
[투구에 필요한 체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커맨드가 흔들립니다.]
이제 막 오픈된 아웃라이어 투수 파트.
활성화율이 워낙 낮은 탓에 상상했던 것처럼 본격적인 투타 겸업은 무리였지만.
'협상을 위한 쇼케이스를 위해서는 충분하지.'
해준은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왼발이 들어 올려지고, 오른발의 스파이크가 투구판을 박찬다.
팽팽하게 당겨진 견갑골과 대퇴근.
"흐읍-!"
하체에서 시작된 힘이 꼬인 고무줄이 풀리듯 풀려나는 허리를 타고 어깨, 팔꿈치에 차례대로 전해졌다.
그 과정에서 애런 테린의 투구 매커니즘을 통해 증폭된 힘이 릴리스 포인트에서 폭발.
마침내 해준의 손에서 뿜어진 하얀 궤적이 홈플레이트 공간을 찢어발기며.
퍼어어어어엉-!
폭발적으로 솟아오르는 강속구가 미트를 뚫어버릴 듯 파고들었다.
"....스, 스트라이크-!"
편한 마음으로 서 있던 구심의 뒤늦은 콜.
당황한 표정으로 해준의 투구를 바라본 마르쿠스.
침묵에 빠진 좌중의 관중들까지.
잠시의 침묵 끝에, 그 모두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동시에 전광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숫자가 떠오르자.
"what?!!"
"...holy shit."
관중들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 스폰서, 그리고 드러난 또 다른 잠재성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