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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에서 타자까지-110화 (110/137)

< 스폰서, 그리고 드러난 또 다른 잠재성 (2) >

110. 스폰서, 그리고 드러난 또 다른 잠재성 (2)

포틀랜드, 오레곤 주.

이곳에서 태동한 어패럴 브랜드 1위 기업 언더에라의 본사는 오늘도 수많은 임직원이 바삐 복도를 돌아다니며 일 처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됩니다! 인제 와서 협상을 뒤엎다니, 이게 그 행크 그린의 비즈니스 마인드입니까?"

그런 이곳의 한 회의실.

막판까지 다다랐던 계약 건이 무산될 지경에 다다르자 맥 린도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회의실 한편에는 어패럴 업계의 신화 같은 존재인 마이크 타티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는데, 그 앞에서 자신만만했던 계약 건이 엎어지자 맥 린도어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야 말았다.

'이런. 너무 흥분했어.'

뒤늦게 자신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은 맥 린도어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헛기침과 함께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의 가치는 그 정도가 맥시멈입니다. 이 이상을 요구한다면 다른 대체 선수를 찾아볼 수밖에 없어요."

급속도로 팽창하며 괴물과 같은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는 메이저리그.

이들은 유럽과 아시아 시장을 말 그대로 폭격해버리며 블랙홀과 같은 기세로 시청자들과 새로운 팬층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장의 확대는 당연하게도 기회를 의미한다.

떠오르는 스타에게 자신들의 신발과 유니폼, 기타 스폰을 퍼붓는다면 그 몇 배, 몇십 배의 이익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는 어패럴 업체들.

이들은 눈에 혈안이 되어 자신들이 투자할 가치가 있는 스타를 찾기 바빴고, 그때 메이저리그를 폭격하며 나타난 라이징 스타가 바로 해준이었다.

당연하게도 업계 1위 자리를 수성하기 위한 언더에라의 움직임 또한 과감했다.

10년 2억 7,000만 달러.

메이저리그에서는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금액을 제시했으니까.

그만큼이나 이번 스폰건에 대해 언더에라가 걸고 있는 기대가 크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런 금액을 거부하다니!'

평소에도 블러핑을 남발하는 행크 그린이 이번에야말로 실수를 한 것이 분명하다며 맥 린도어가 투덜거렸지만, 제이미 창은 고개를 저으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맥. 현재의 강을 대체할 선수는 찾아보기 불가능해요. 이건 메이저리그에 한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아시죠? NFL, NBA, 라리가 같은 곳에서도 그만한 영향력을 가진 루키 인플루언서는 존재하지 않아요. 한마디로 현재 세계 스포츠 시장에서 가장 큰 잠재력을 지닌 존재란 소립니다."

"이봐 제이미. 그렇다고 여기서 더 금액을 높일 순 없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 2억 7,000만 달러라 해도 충분히 오버코스트라고."

"그건 가치 산정 방식에 따른 의견 차이죠. 제 계산에 따르면 강의 가치는 그것보다 3,000만 달러는 더 높아요."

"제길, 지금 행크 그린이 고작 3,000만 달러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이 상어 자식은 최소 2배를 부르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을걸?"

갑작스러운 폭탄처럼 떨어진 행크 그린의 계약 중단 의사.

덕분에 이번 계약을 담당했던 직원들 사이에서는 어수선함이 가중되었다.

협상 과정이 치열하긴 했지만,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서로 만족할만한 조건이라 생각했으니까.

계약서에 서로 사인만 휘갈긴다면 끝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NO.

그 이유를 추측하는 갑론을박이 점차 심해지는 가운데, 언더에라의 CEO 마이크 타티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변덕스러운 날씨의 포틀랜드답게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회색 컴컴한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악동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진짜 가치를 몰라줬다 이건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동안 수많은 슈퍼스타들과의 계약을 주도해온 그는 알고 있었다.

스포츠 선수의 진정한 가치란 단순히 인기나 스탯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선수의 워크에씩,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 대한 철학과 신념, 평소 생활 방식과 팬들을 어떻게 대하는가까지.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그 선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심도 높은 대화를 거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지금처럼 에이전시를 통한 단순 협상은 역시 아니야. 회사가 너무 급성장한 탓에 지금까지와는 방식을 달리해봤는데.. 역시 마음에 들지 않잖아.'

결정을 굳힌 마이크 타티스가 유리 벽에서 고개를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이봐, 제이미."

"네, 보스."

마이크 타티스의 한 마디에 여전히 갑론을박을 다투던 제이미 창과 맥 린도어의 대화가 맥이 끊겼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보스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다른 회의 참가자들 또한 재빠르게 귀를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제안 금액을 높일 생각인가?'

'함께 진행할 사업의 USRL(언더에라 스포츠 연구소) 사용 우선권을 줄지도 모르지.'

'스파이크 사업의 이익 비율을 조절할 수도 있지.'

어느 것이든 다른 프로젝트들의 예산 편성에 큰 영향을 미칠 말임이 분명했다. 여기서 더 금액을 소모해야 한다면 그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마이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자네, 탁구 좀 칠 줄 안다고 했지?"

+++

5월 27일.

휴식일이 분명한 날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다저 스타디움의 필드는 슈트와 드레스를 차려입은 수많은 셀럽들과 이를 취재하기 위해 플래시를 터트리는 기자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피트! 이쪽 좀 봐주시죠."

"이봐요, 그렇게 찍으면 각도가 이상하잖아요? 내가 포즈 다시 취할 테니까 예쁘게 찍어줘요."

"바우어, 이번 앨범 소식 들었어요. RIAA에서 4번째 플레티넘 인증 따냈다면서요?"

할리우드의 이름난 감독이자 배우인 제임스 피트, 그의 연인 테레사 허진스, 패서디나 출신의 괴물 래퍼 맷 바우어까지.

각 분야에서 한 영향력 한다는 셀럽들마저 모습을 드러내자. 다저 스타디움의 열기는 경기가 열리는 날 못지않은 열기로 가득 차올랐다.

해준과 함께 다저 스타디움에 들어서던 오광녹은 입을 떡- 벌린 채로 두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와, 이거 말이 안 나오네요. 저 사람 진짜 제임스 피트에요? 저 사람 영화 전부 소장하고 있는데! '자네 손에 들린 패는 조커가 아닐세. 배트휴먼이지.' 크으, 이 대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

해준은 그런 오광녹을 어이없어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대사가 그래?"

"모르세요?"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해준은 작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1년에 한 번, 이맘때쯤 열리는 마르쿠스가 주최하는 자선 탁구 대회.

올해로 9회를 맞이한 이 대회는 메이저리그의 영향력 확대와 함께 급속도로 그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LA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얼굴도장을 찍는 수준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제는 LA에서 열리는 자선 행사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규모라잖아. 봐봐, 스폰서들도 잔뜩 붙었잖.. 응? 이게 누구야. 우리 루키잖아!"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건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해준이 눈을 돌리자 그 앞에는 윗단추 두 개를 푼 채로 정장을 차려입은 드레이븐 래리가 서 있었다. 옆에는 우아하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의 와이프 소피 래리도 함께였는데,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 사람의 부인 소피 래리에요. 해준 씨 맞으시죠? 그쪽은.. 아마 에이전트 미스터 오? 두 분 모두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준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프랑스 억양이 섞인 우아하고 친근한 말투.

미인의 등장에 오광녹은 표정이 밝아졌고, 소피 래리를 처음 본 해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시는 대로. 그나저나 진짜... 와이프 맞으시죠?"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미녀와 야수라고."

소피 래리가 작게 웃음을 지었고, 드레이븐은 어딜 가나 그런 소리를 듣는다며 작게 투덜거렸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일행들과 함께 작게 수군거렸다.

"드레이븐 앞에 서 있는 동양인이 그 강이지?"

"그렇지. 성질 더러운 드레이븐과 스스럼없이 대화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다저스에 나타난 역사상 최강의 중견수, 그리고 유격수라.. 과연 체격부터 튼튼하군. 다른 운동을 했어도 수준급이었겠어."

"사진 좀 같이 찍어달라고 해볼까? 조금만 지나도 사람들이 몰려들 것 같은데."

그런 시선을 알아챈 드레이븐은 익숙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제길,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 좋은 의미로 모였던 자리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나 모르겠어."

드레이븐은 경기에서는 그 누구보다 시선을 즐겼지만, 유니폼을 벗고 나서는 사람들의 주목을 꺼리는 성격이었다.

"뭐, 저야 처음이지만 많이 복잡해 보이긴 하네요."

해준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그에 어울리는 사람들, 그들을 취재하며 돌아다니는 기자들까지.

현 메이저리그의 상승세는 확실히 어마어마할 정도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몇몇 기자들이 자신과 드레이븐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는 모습에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 소피 레이는 드레이븐을 나무라 하듯 차분히 말했다.

"레이, 다들 좋은 의미로 모인 사람들이에요. 도움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요? 여기서 모인 돈은 교육의 사각지대에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쓰이니까요."

"내가 그러니까 조용히 있잖아. 정장까지 차려입고 와서 말이지. 응? 저기 마르쿠스로군. 인사나 해야겠어. 이봐, 루키 천천히 둘러보라고."

드레이븐은 여전히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다 마르쿠스를 발견하고는 살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표정으로 보아 아마 대충 인사만 하고 구석으로 사라질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해준은 그런 드레이븐에게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나중에 뵙죠. 레이."

"..제발 너만은 그렇게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소름 돋는다고. 아무튼 간다."

그렇게 드레이븐은 소피 래리와 함께 마르쿠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런, 탁구 대회라고 해서 편히 입고 왔더니만. 왜 다들 정장인 거죠?"

해준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는 한 백인 남성.

옆에는 얼굴이 붉게 물든 채 주변을 곁눈질하는 여자가 서 있었는데, 그녀 또한 후줄근한 티셔츠와 긴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채였다.

탁구 자선 대회이긴 하지만 유명 셀럽들이 모인 만큼 정장을 차려입는다는 드레스 코드를 모르고 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해준의 반응과 달리 오광녹은 입을 어버버 벌리며 말을 꺼냈다.

"어..어. 그러니까. 마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오광녹.

그런 그의 말을 눈앞의 남자가 빠르게 채가며 악수를 건넸다.

"당신이 에이전트 미스터 오죠? 소개해줘서 고마워요. 언더에라 CEO 마이크 타티스입니다. 가드가 통과시켜주질 않아서 고생했네요."

+++

타아악-!

"오우우우우-!"

"제이크, 릴리 포드 팀이 이겼네. 역시나구만!"

"휘익-! 제임스. 다른 건 몰라도 탁구 영화는 찍지 말자고. 영 재능이 없어 보이네."

"뭐야, 벌써 끝이야? 다음은 내 차례니까 다들 집중하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탁구 자선 대회가 시작됐다.

다저스의 선수들과 참가를 희망하는 유명 인사들이 팀을 이뤄 진행되는 토너먼트 방식.

차례가 한참이나 남은 해준은 옆에서 함께 게임을 구경하던 마이크 타티스에게 물었다.

"저 때문에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공식 석상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마이크 타티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이곳에 나타난 이유라곤 그것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준의 물음에 마이크 타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라도 한번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2억 7,000만 달러짜리 계약을 단번에 파토내버린 이유도 궁금하긴 했고."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금액.

그것을 제안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돌아온 거절 의사.

'일단은 자신의 가치를 더 인정해달라는 의사의 전달이겠지만..'

하지만 막상 만나본 해준은 그의 생각과 매우 다른 분위기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마이크 타티스는 자신이 만났던 세계 최고의 스포츠 스타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스테파노 에릭센과도 다르고..'

축구 황제 스테파노 에릭센.

그는 화려하면서도 완벽한 삶을 지향하는 남자였다.

그만큼이나 자신의 계약 또한 화려하길 바랐으며, 종신 계약의 형태로 역대 최고의 스폰 금액을 안겨주고 나서야 만족하는 기색을 보였다.

'앤드루 콜린스와도 다르다.'

테니스의 신 앤드루 콜린스.

조용하고 언론을 꺼리는 말수 적은 그였지만,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만큼은 어마어마한 프라이드를 뽐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 남자는 스테파노 에릭센과 계약을 맺기 전까지만 해도 최고 스폰 금액 계약의 소유자였다.

'스포츠 선수들은 누구나 그런 면이 있지. 누구보다 관심을 원하고, 쟁취하려 들고 지기 싫어하지.'

하지만 이 남자는 적어도 그런 자기도취적 성향의 남자는 아닌 듯 보였다. 무언가를 뽐내고, 인정받으려는 특유의 분위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해준은 자신을 읽어내려는 그런 마이크 타티스의 시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언더에라에서는 제 가치를 제대로 산정해내지 못했으니까요."

그 말에 마이크 타티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스포츠 선수들은 항상 그런 말을 하곤 하죠.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얼마를 원하는 겁니까?"

"그건 그쪽이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그저 제 모든 걸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요. 계약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죠."

해준은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마이크 타티스를 보며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언더에라의 CEO 앞에서 보여줄 수 있다면, 최상의 결과를 뽑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꽤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쇼케이스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

이 자선 대회에서 열리는 몇 가지 서브 이벤트.

'어깨 좀 풀어둘까.'

그중 하나에서 보여줄 생각이었다.

< 스폰서, 그리고 드러난 또 다른 잠재성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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