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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에서 타자까지-109화 (109/137)

< 스폰서, 그리고 드러난 또 다른 잠재성 (1) >

109. 스폰서, 그리고 드러난 또 다른 잠재성 (1)

5월 26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3연전을 끝으로 오랜 원정이 끝이 났다. 조금이라도 가족들과의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해 곧바로 비행기에 몸을 실은 LA다저스 선수단.

이들이 다저 스타디움에 도착했을 때는 LA 새벽 특유의 쌀쌀한 공기가 이들을 맞이해주고 있었다.

해준은 긴장이 풀린 나른한 표정으로 다저스 내야진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 해준을 바라본 노아가 말했다.

"보기 좋은 표정이군."

"표정이요?"

"음. 뭐라 해야 할까? 원정에서는 날이 잔뜩 선 모습이었거든."

그 말에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셔널스, 로키스, 필리스까지.

3연속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하나씩 터진 원정이었다보니 그곳에서 오는 피로와 체력 부담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확실히 감각와 신경이 너덜너덜해졌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해준은 어깨를 살짝 으쓱 거렸다.

"항상 긴장만 하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게다가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니 편해진 거겠죠."

"집이라... 그렇지. 누구나 자신의 집이 가장 아늑하지."

해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노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보니 준, 현재 묵는 곳이 구단에서 마련해준 오베 펜트하우스지? 거긴 돈 있어도 구하기 힘든 곳이니까 있을 때 즐겨두라고. 1년이 지나면 나가야 하잖아?"

그 말에 해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재 자신이 거주하는 곳은 다운타운 사우스파크 인근에 위치한 콘도가 맞긴 했지만, 자신의 기억에는 이들에게 자신이 어느 곳에 사는지 말한 기억이 없었던 탓이다.

'지역 정도는 말했던가?'

그렇다하더라도 노아가 펜트하우스라고 꼭 집어 말할 이유는 없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대답이 돌아온 쪽은 특유의 졸린 눈으로 걸어가던 제이크였다.

"그곳이 다저스 구단주 소유거든. 1년에 한 번, 다저스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신인에게 주어지는 혜택 같은 거야. 나라던가, 케빈 스티븐. 그리고 지금은 양키스에서 뛰고 있는 후안 터너가 살았었지."

다저스가 맞이한 영광의 시대를 열어젖힌 3연속 신인왕의 주인공들. 그 말에 노아가 고개짓으로 흘깃 앞서 가는 드레이븐을 가리켰다.

"게다가 드레이븐 저 녀석이 다저스로 넘어올 때 조건 중 하나가 그 오베 펜트하우스였거든. 안전하고, 주변 환경 좋고, 구장과 가깝고. 가정을 지닌 사람에게는 최고의 조건이지. 물론 나중에는 학군때문에 맨해튼 비치에 따로 집을 구하긴 했지만 말이야."

그 말에 해준은 묘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살고 싶을 때까지 살아도 된다고 해서 그런 조건이 있는지는 몰랐는걸.'

거주할 집을 구하는 것은 모두 에이전시에게 위임했었기에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계속 살겠다고 하면 루키에게 주워질 혜택이 하나 사라지는건가?'

문득 떠오른 사실에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다저 스타디움과도 가깝고 좋은 환경이기도 하지만 이런 고급 콘도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보안이 철저하는 점이다.

누군지도 모를 루키를 신경 써 비워주기에는 그 이점이 너무나 컸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해외 바이어들마저 대거 유입되며 매물이 싹다 말라버려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했고.

'..그러고보니 스폰서 계약이 모두 체결되면 펜트하우스가 아니라 건물을 올릴 수 있을 거라 그랬지.'

KBO의 2군 경기장에서 구르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스케일.

자신이 아웃라이어 시스템과 연결된 것은 작년 7월의 일.

채 1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찾아온 급격한 변화를 다시 한번 상기한 해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스폰서라..'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그래왔듯, 자신 또한 스폰서를 희망하는 수십 곳의 기업들이 접촉을 해온 상태였다.

이 모든 계약을 체결하고 나면 들어올 총수입은 연봉을 뛰어넘을정도.

10년 전의 메이저리그라면 모를까, 지금의 메이저리그 스타들은 연봉에 스폰서 수익을 더해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는 상황.

해준은 드레이븐과 노아의 대화를 한 귀로 흘러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끄응, 그러고보니 애들이 Buck's BBQ에서 불도그를 사오라고 했었는데 말이지. 정신이 없다보니까 까먹었네."

"이봐, 드레이븐. 다저스 핵심 선수가 필리스의 홈 한복판에서 그걸 사려고 했단 말이야? 애초에 필라델피아에서부터 가져오면 다 식어버릴게 분명하잖아."

"애들이 그런걸 신경쓰나? 막무가내라서 사가기로 했지. 젠장, 유일한 휴식일은 그대로 반납해야겠어. 어딜 놀러가주기라도 해야무시를 안당하지."

물론 연간 수백 억을 벌어들이는 이들이라 해도 일상 생활은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충 들어보자면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드레이븐조차 집에 가는 순간 작아지는 모양이니.

그렇게 동료들의 잡다한 가정사를 들으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해준은 자신을 기다리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행크?"

"준, 오래만이오. 비행기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왔지."

취향을 나타내는 거대한 픽업 트럭 앞에서 에이전트 행크 그린.

그가 웃음을 띄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

"미안하군, 조. 이 시간에 불러내서 말이야."

"그럴 것 없습니다 행크. 오랜 원정에서 쌓인 피로는 빨리 풀어주면 줄수록 좋죠. 게다가 그 강이라니? 소식을 알았다면 제가 먼저 달려왔을 겁니다. 아무튼 이걸로 마사지는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약이 밀려있어서요."

마사지를 끝낸 한국계 미국인 조태웅.

그는 해준에게 살짝 목인사를 건네고는 행크와 악수를 나눈 후 사라졌다.

행크 그린은 그런 조태웅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웃음을 지었다.

"어때, 시원한가? 최근 월스트리트에서 떠오르는 세라피스트야. 금융인들 사이에서 먼저 이름을 날려서 그런지 시간당 1000달러를 줘도 고용하기 힘든 수준이지. 다행히 자네의 열렬한 팬이라더군."

해준은 그 말에 몸을 일으켜 나른하게 풀린 표정으로 어깨를 돌려보았다.

뭉쳐있던 근육부터 뻐근하던 관절과 인대까지.

특수모듈 철인이 만들어낸 효과와는 다른 편안함이 심신을 편하게 해주고 있었다.

"확실히 다르네요. 행크도 받지 그랬습니까?"

"나? 나 같은 노인네야 받아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지."

그런 행크 그린의 말에 해준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전신을 훓어보았다.

당장 NFL에 나가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덩치와 근골. 60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단단함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뭐, 본인 관리는 어지간히 하는 것 같으니 내가 신경 써줄 필요는 없겠지.'

목을 한바퀴 돌려 주위 근육의 나른함을 느낀 해준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외부 한쪽벽 전체가 거대한 유리로 이루어져있는 펜트하우스에 아침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다.

해준은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세라피스트 한 명때문에 오신 건 아닐테고.. 역시 스폰서 문제입니까?"

그 말에 행크 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이라면 전문 에이전트 한 명이 붙어서 처리하지. 하지만 자네는 내가 직접 챙기기로 했네."

매일매일이 승부의 연속인 메이저리그.

그곳에서 뛰는 해준이 수십 개 스폰서와의 계약을 일일히 컨펌하기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행크 그린은 최적으로 정리된 후보군 리스트가 나오고 나서야 브리핑을 위해 해준을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크 그린의 입에서 다국적 기업들의 이름이 줄줄히 언급됐다.

"일단 소산 그룹일세. 계약을 맺게 되면 이곳의 스마트폰을 써야하지만 연간 650만불(한화 80억 상당)을 지급하기로 했지. 총 3년 계약이지. 다음은 OG 그룹인데 금액은 소산보다 작지만 계약 기간이 길고 위약금이 적은 것이..."

해준은 그 설명들을 들으며 행크와 세밀한 계약 사항들을 조율했다.

액수는 크지만 실생활에서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써야된다 생각하는 계약들은 걸러냈고, 서로 그 조건이 상충되는 곳들 또한 마찬가지로 걸러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스폰서들의 목록을 완성했을 때.

리스트의 끝 목록에 있는 기업의 이름을 본 해준이 잠시 멈칫했다.

"언더에라군요."

"그렇지. 3년 전까지만 해도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가 1조 이상인 비상장기업)이었지만 상장을 하며 글로벌 의류 기업 1위의 자리를 단숨에 꿰찬 곳이지."

행크 그린의 설명에 해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리스트에 나타난 언더에라의 제안은 분명 그 덩치에 걸맞는 천문학적인 것이었으니까.

"10년 2억 7,000만 달러(한화 3,300억). 축구나 테니스에 비한다면 조금은 모자라도 메이저리그에서는 최고 금액이네. 언더에라에서 자네에게 내밀 수 있는 사실상 최고 금액이라고 봐도 될 걸세."

수천억이 오고간다는 메이저리그의 FA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규모의 계약.

그것을 단지 스폰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현재 자신의 위치가 어디까지 올라와있나를 나타내고 있었지만, 해준은 고민에 거듭했다.

'2억 7,000만 달러라..'

현재 언더에라가 맺은 최고 규모 스폰은 신의 재림이라 불리는 축구 황제 스테파노 에릭센의 10억 달러(한화 1조 2000억).

물론 추정 금액에 종신 계약의 형태이긴 하지만, 연 평균 금액으로 봐도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했다.

"이게 현재 제 가치로군요."

해준의 말에 행크 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신 계약 형태라면 에릭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근접하는 계약을 끌어낼 수야 있겠지. 메이저리그 또한 성장세를 거듭해 유럽 축구에 비견될 정도로 시장이 커지는 중이니까. 하지만 우리들의 계산으로는 최고의 가치를 산정해 받아낼 수 있는 합의점이 10년 2억 7000만이었네. 자네의 10년 뒤라면 지금의 몇 배의 가치가 될테니 그때 재계약이 진짜 승부겠지."

해준은 생각에 잠겼다.

'본래 돈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대로 넘기기에는 그동안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며 느낀 점들이 너무나 많았다.

유명 헐리우드 배우, 팝스타, 헤지펀드의 소유주들, 떠오르는 스타트업 기업의 CEO들까지.

시구를 하러 찾아왔거나, 크고 작은 파티에 참가한 이들은 메이저리그의 스타들과 나누는 잠깐의 대화 속에서도 돈이라는 무기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드러내곤 했다.

세력이 강한 유명 NGO에 후원을 하거나, 유망한 기업에 투자를 하거나, 하다못해 기부를 통해서라도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고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높여나간다.

'나도 앞으로는 미국에서 살아가겠지.'

10년 내에 은퇴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자신 또한 이제부터라도 미국의 생활 양식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번 기회를 흘려보내면 10년을 기다려야해.'

현실적으로도 10년 내에 언더에라 이상 가는 스폰 기업이 나타날 가능성은 드물었다.

해준은 이번 계약을 더욱 적극적으로 리드하기로 결심했다.

결심을 굳히자, 눈 앞에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애런 테린과의 마지막 타석.

그곳에서 초구 홈런을 때려내고 홈플레이트를 밟은 순간 눈앞에 떠올랐던 홀로그램.

[포심 패스트볼 대응 레벨이 TOP-END(80)에 도달하셨습니다.]

[포심 패스트볼 아웃라이어로서의 감각이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본 해준이 한참이나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행크."

"결정을 내렸소?"

행크의 물음에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협상...

가치가 달라졌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평가 또한 달라져야한다.

해준은 무슨 소리냐는듯 되묻는 행크를 바라보며 얕은 웃음을 띄어보였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이제는 안다.

자신에게는 이번 계약과 메이저리그를 뒤흔들 수 있는 새로운 무기가 손에 쥐어졌음을.

애런 테린을 완전히 무너트리며 완성하게된 포심 패스트볼 아웃라이어로서의 모습.

그것은 단순히 포심 패스트볼의 완벽한 사냥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해준은 시스템 로그의 가장 첫 번째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아웃라이어 '야수' 파트가 완성되었습니다.]

2026년 7월 1일.

대구 더히트와의 경기에서 스스로 한 분야를 완벽하게 정복한 그 순간. 너무 불현듯 지나가 놓쳐버렸던 메시지가 가장 위에 위치해있었다.

그리고, 다음 파트의 메시지는 이랬다.

[아웃라이어 '타자' 파트가 개방됩니다.]

'야수'를 완성함으로써 '타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극히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타격의 기본이 되는 포심 패스트볼에 대한 모든 것을 완성한 타자라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눈앞에는.

[아웃라이어 '타자' 파트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동안 어렴풋이 추측으로만 생각하던 그것이 떠올라있었다.

[아웃라이어 '투수' 파트가 개방됩니다.]

< 스폰서, 그리고 드러난 또 다른 잠재성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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