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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에서 타자까지-106화 (106/137)

< 벨기언스 미사일 (2) >

106. 벨기언스 미사일 (2)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 위치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사장실.

사장 크레이그 노만은 전자담배를 한모금 빨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크으. 역시 맛이 좋진 않군. 달달한게 꼭 우리 조카 녀석에게 어울리는 수준인데. 아무튼, 트레버. 다시 생각해보자고."

손에 들린 전자담배를 한 차례 째려본 노만.

그는 노란 수염을 요란스럽게 푸르르 한 차례 떨고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날씨에 어울리지 않은 두툼한 점퍼를 입은 차분한 눈빛의 중년 백인 남성.

필리스의 단장 트레버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노만, 실내는 금연입니다."

"..나도 아네. 그러니 시가에서 이 똥 같은 전자담배로 바꾼 거 아닌가? 너무 뭐라 하지 말라고."

노만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전자담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번 다저스와의 시리즈. 그 중요성을 두 번 말하진 않겠네. 내년부터 더 하이스트 레이팅 시리즈가 도입된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데 뭐겠나?"

"...시청률이겠죠."

"그렇지, 그거야!"

노만은 두툼하고 큰 손으로 책상을 쾅- 한 차례 내리쳤다.

하이스트 레이팅 시리즈Highest Rating Series.

내년부터 도입되는 이 색다른 시도는 MLB 닷컴의 자체 중계 네트워크 기준으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시리즈를 유럽에서 치르겠다는 파격적인 제도였다.

10년 전의 구단들이라면 몸을 사리며 자신들을 피해가길 바라는 제도이기도 했다.

먼 원정 거리, 익숙지 않은 기후, 환경, 사람, 음식까지.

어딜 보아도 팀 전력을 곰팡이처럼 파고 먹을 요소들만이 한가득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필리스를 이끄는 사장 노만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한 단어를 강조했다.

"세계화라고, 세계화. 트레버, 지금의 유럽은 엘도라도나 마찬가지야! 그곳에 가서 한 경기를 뛰면 몇 명의 팬이 생길 것 같나? 몇 장의 유니폼이 팔릴까? 물론 나중에라도 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때가 된다면 죄다 양키스나 다저스의 모자를 쓴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릴 걸세.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이 기회를 잡는다면 필리스는 국제적인 구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세우는 거야!"

노만의 말에 트레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시청률을 끌어올린단 말입니까?"

트레버의 눈에는 노만이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 신묘한 마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원하는 순간에 몸무게는 올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런 트레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노만이 두툼한 턱살을 출렁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바로 우리가 가진 행운이라는 거지! 마침 서부 촌놈들에게서 슈퍼스타의 재목이 나타났니 뭐니 시끄럽지 않나?"

"강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성입니다만."

"이름이든 성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중요한 건, 그 끝을 모르고 승승장구하는 건방진 루키의 콧대를 눌러줄 수 있는 선수가 우리의 소유라는 거야 트레버. 그걸 대대적으로 홍보해보자고. 타이틀은.. 마침내 박살 날 다저스의 희망. 어떤가? 애런 테린의 SNS로 이 글을 올리자고. 전국의 팬들이 우르르 몰려오지 않겠나?"

트레버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기발한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나 했더니 결국은 애런 테린의 영향력을 이용해 어그로를 끌어보자는 말이었으니까.

평소 지적이고 차분한 이미지의 애런 테린이 그런 막돼먹은 문장을 올린다면 분명 주목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생각한다는 게 고작..'

티가 나지 않게 빠득- 이를 간 트레버가 화를 진정시키고 대답했다.

"첫째. 애런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본인이 들으면 정색할 말을 하시는군요. 그는 SNS도 하지 않고요. 그리고 둘째. 다저스의 루키... 강은 예측 불가의 괴물입니다. 애런이라고 해도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상대임이 분명하죠."

트레버가 해준의 이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작년 겨울 때의 일이었다.

눈앞의 사장 크레이그 노만이 부임하기 전,

전임 사장이었던 잭 올리버가 영입을 하겠다며 자금을 끌어모았던 기억이 있으니까.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트레버 자신은 회의적이었다.

4억 달러. 맙소사, 4억 달러라니?

그가 생각하기로 메이저리그에서조차 그런 금액에 어울리는 선수는 극소수의 몇몇에 불과하다.

'분명 그 말도 안 되는 수비 재능만큼은 이레귤러 수준이다. 하지만 타격에서 의문점이 너무나 많았어.'

물론 지금 와서 보자면 다저스의 혜안이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2일 기준 타격 1위, 출루율 1위, 장타율 1위.

홈런은 내셔널리그 1위에 도루까지 19개 기록, 6월이 다가오기도 전에 20-20을 눈앞에 두고 있는 괴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으니까.

'그런데 이런 선수를 상대로 승부를 장담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트레버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더욱이 그 방법은 이미 워싱턴에서 써먹었지 않았습니까? 결과는 보시다시피, 그대로 박살이 났죠."

그 선례가 바로 워싱턴의 1선발 게빈 하우서였다.

해준을 평가절하했던 그의 인터뷰는 많은 공분과 호기심, 은근한 기대감을 사며 11.4%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본인이 끌어들인 관중들 앞에서 처절하게 박살 나는 그 심정은 과연 어떨까?

실제로 그 뒤로 워싱턴의 관중 수입이 줄었다는 기사조차 날 지경이었다.

그런 트레버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노만 사장은 기이한 웃음을 띠며 책상 위의 아이패드를 들어 보였다.

"내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나?"

트레버는 미간을 좁히며 그 태블릿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인물에 대한 보고서가 들어가 있었다.

곧바로 아이패드를 건네받은 트레버는 그 보고서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전력분석원.. 이 자식들이. 나한테는 없는 보고서가 왜 노만한테 있어?'

그것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사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노만이 벌써부터 자신만의 정보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는.

"...이게 사실입니까?"

"보면 알지 않나?"

노만의 말이 생각 외로 틀리지만은 않았다는 것이었다.

트레버는 신음성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강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패스트볼 킬러로 유명하죠. 하지만 그의 천적이 포심 패스트볼 구사율이 80%가 넘어가는 애런이라니.."

필리스는 정말로 해준을 확실히 막아설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애런의 별명이 벨기에산 미사일이라지? 누구도 하지 못한 다저스 폭격. 그거 우리가 해보자고."

씨익- 탐욕스러운 웃음을 떠올리는 노만.

최고 시청률을 노리는 그의 얼굴에 자신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

시티즌스 뱅크 파크.

LA다저스와의 1차전이 열리는 이곳은 시작 전부터 타 원정과는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Beat fucking Dodgers!"

"휘익- 어이, 서부 촌놈새끼들아. 유서 깊은 도시의 공기는 좀 어떠냐? 상쾌하지?"

"You motherfucker dodgers!"

다저스의 연고지인 LA가 필라델피아보다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라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상상 이상의 욕설들이 쏟아져내리는 그 광경에 마르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매년 반복되는 광경이지만 도저히 적응되질 않은 악명 높은 필리건들의 욕설.

2차전에서의 등판을 위해 불펜 투구 세션을 소화하던 브랜드 빌링슬리 또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왔다.

"이곳은 여전하군. 그래서 실내 불펜에서 던지려고 했는데. 빌어먹을, 내부 공사가 웬 말이야?"

시티즌스 뱅크 파크의 불펜은 다른 구장과 달리 불펜이 우측 외야에 복층 구조로 위치해있었다.

덕분에 필리스의 관중들은 불펜 투구 장면을 매우 가까이서 내려다볼 수 있었는데, 원정팀의 불펜 투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욕설을 쏟아내고는 했다.

꼬마 팬에게서 f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들었다는 브랜드는 진절머리를 치며 덕아웃 내부 통로로 사라져갔다.

"흐음.. 걱정이군."

마르쿠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벤치를 둘러보았다.

어딜가도 욕을 먹지 않은 경우가 드문 드레이븐이야 심드렁한 표정이었고, 루이스는 라커룸에서 헤드셋을 눌러쓰고는 마인드 컨트롤에 한창인 상황.

베테랑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이 험악한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해준이 걱정이었다.

마르쿠스는 글러브를 손질하던 해준에게 다가갔다.

"이봐, 준."

해준은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얼굴 위에는 조금의 긴장도 나타나 있지 않자, 마르쿠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긴장이 하나도 안 되나 보네? 보통 신인들은 이곳에 오면 뻣뻣하게 굳어버리곤 하는데 말이야."

더욱이 다저스에서 유일한 동양인인 해준이다.

대놓고 인종차별 욕설이 날아오진 않았지만 다른 선수들에 비해 표적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해준은 오히려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마르쿠스. 혹시 집 비밀번호 바뀌어본 적 있어요?"

"...음? 무슨 소리야 그게?"

"술에 취한 관객들이 제집 앞에서 대기 탄 적도 있어요. 그 날 병살타를 3개 쳤거든요. 그냥 평소처럼 삼진이나 당하지 왜 건드려서 그 난리를 만드냐고 온갖 욕을 다 얻어먹었던 날이었죠."

마르쿠스는 그 말에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KBO 시절의 해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으니까.

해준은 그저 조용히 글러브를 손보며 덕아웃으로 쏟아지는 왁자지껄한 욕설들을 흘러들었다.

'KBO 시절로 돌아간 것 같네.'

그와 함께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작년 7월 중순.

1군에 복귀한 자신이 처음으로 소란을 침묵으로 뒤바꿔버리는 그 순간을.

그리고, 그 정적이 얼마나 짜릿한지를.

"플레이볼!"

그렇게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 구심의 우렁찬 콜이 울렸을 때.

어마어마한 아유가 쏟아져내리는 그라운드에 들어선 해준은 슬쩍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벤치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애런 테린.'

특유의 흰머리와 큰 체격,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본 그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기이한 느낌이 전해지는 투수.

[아웃라이어 '벨기언스 미사일Belgians Missile' 애런 테린과 조우 하셨습니다!]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이 아직도 시야 한 편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잡았다.

'2차전 선발이라...'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1차전.

'일단은 팬들의 기세부터 꺾어버린다.'

홈 팀 팬들, 그것도 악명 높은 필리건들의 함성을 저 괴물 같은 아웃라이어가 등에 업기 전에.

"후우..."

해준은 필리스를 한 차례 폭격해버릴 생각이었으니까.

그때, 필리스의 주전 포수 호세 파들로가 말을 걸어왔다.

"이봐, 루키. 우리 팀 팬들이 조금 거칠었지? 환영 인사라고 생각하라고. 대신 여기서는 살살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걸어오는 그 말에, 해준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이런 어쩌나."

"음?"

"난 봐줄 생각 없는데."

그러기에는 이미 평소와는 다른 감각이 온몸을 휘젓고 있었다.

[최초로 동일 계열의 아웃라이어와 조우하셨습니다!]

[더 패스트볼 긱'The Fastball Geek' 토니 디에고 블랑코의 감각이 자극을 받기 시작합니다!]

어떠한 감각이든 익숙해진다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차가움도, 뜨거움도, 심지어 고통조차도.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미 완벽하게 체화됐다고 생각했던 토니 디에고 블랑코의 감각.

그것이 다시 한번 깨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 링크가 연결된 순간 같다.'

하지만 아직 한 치가 부족하다.

평균 구속 99.9마일(160.7km/h).

최고 구속 106마일(170.6km/h).

오로지 포심 패스트볼 하나만으로 메이저리그를 휩쓸어버린 저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아직도 무언가 부족했다.

해준은 그 남은 마지막 조각을 채우기 위해.

"흐읍--!"

본격적으로 필라델피아와의 1차전을 박살 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따아아아악-!

1회 초, 초구 공략.

손에서 전해지는 그 감각에 해준은 공을 바라볼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Oh my goddess---! KANG의 타구가 시작부터 자유의 종을 강타합니다! 시즌 24호포를 터트리며 필라델피아의 환영에 보답하는 더 프릭필더 KANG입니다!]

우측 외야, 시티즌스 뱅크 파크의 명물 자유의 종을 강타하는 리드오프 홈런.

그 광경에 자극을 받은 필리스 팬들의 욕설이 쏟아져 내렸다.

"No fucking way! you motherfuc---!"

"이 빌어먹을 자식아, 적당히 치고 꺼져버려!"

이때까지만 해도 시티즌스 뱅크 파크는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돌아온 3회 초.

카운트는 2-3.

터엉-!

[펜스 직격! 다저스의 주자들을 모조리 홈으로 불러들입니다! 이 폭주 기관차를 막을 투수는 과연 언론의 말대로 애런 테린뿐일까요? 포수 호세 파들로가 고개를 내젓습니다!]

2타점 2루타.

이번에도 필리스 팬들의 고함 소리와 함께, 몇몇 쓰레기가 외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기세는 아니었다.

그렇게 5회 초.

따아아아아아악-!

다시 한번 초구.

[Holy shit-! 이번에도 터져나오는 장...]

3번 연속으로 장타를 얻어맞자,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쏟아져내리던 욕설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8회.

[Blast-! 이번 공은 외야수들의 사이를 가르며 쭉쭉 뻗어 나갑니다!]

그리고 9회.

[You fucking unbelieva···!]

기어코 스트리밍 중계 해설진이 욕설을 내뱉게 한 그 순간.

해준이 2루를 밟으며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는.

"......"

시티즌스 뱅크 파크는 경악이 뒤섞인 침묵에 빠진 뒤였다.

그리고, 마침내.

"..후우."

해준은 자신이 준비를 마쳤음을 깨달았다.

[MIX UP 단계에 접어드셨습니다.]

[아웃라이어 '벨기에산 미사일Belgians Missile' 애런 테린, 그의 한계를 끌어내세요.]

패스트볼 아웃라이어로서의 완성.

그 미지의 영역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 벨기언스 미사일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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