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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에서 타자까지-102화 (102/137)

< 돌주먹 로키스 (2) >

102. 돌주먹 로키스 (2)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 소속 콜로라도 로키스.

같은 지구에 속해있긴 하지만, 본래 이들과 다저스의 관계는 악연과 거리가 멀었다.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혹은 천적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이들과 비교한다면 특별하게 얽힌 스토리들이 없다시피 한 관계였으니까.

그런 이들이 관계가 틀어지게 된 것은 작년 이맘때쯤의 일이었다.

"로드리게스의 로드 비프가 이곳 출신이거든."

"...로드 비프요?"

해준이 되묻자 마르쿠스는 난감하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수염을 긁었다.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드레이븐이 말했다.

"고상한 마르쿠스가 말하기엔 난감한가? 내가 말해주지. 로드 비프란 원정 경기 중에만 만나는 여자친구 같은 존재지. 잠만 같이 자는 뭐 그런 사이?"

그 말에 마르쿠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선수들이 장기간 훈련 기간이나 원정 경기에서 오로지 육체적 관계를 맺기 위해 만나는 상대를 일컫는 은어.

독실한 신자이자 절제된 생활로 유명한 마르쿠스로서는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는 단어였다.

해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어, 아..음. 그렇군요. 그런데 로드리게스의 로드 비프가 이곳에 있던 것과 무슨 상관이죠?"

스프링캠프에서 자신과의 경쟁에 밀려 고향 팀인 클리블랜드로 돌아간 로드리게스. 그의 불륜 대상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 로키스와 무슨 상관인지 도저히 떠오..

"아."

하지만, 그 순간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

"설마?"

"그 설마지."

마르쿠스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상대가 로키스의 클럽 리더인 나단 브레이저의 와이프였거든."

"..그 브레이저요?"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나단 브레이저.

콜로라도 로키스의 성골 프렌차이즈 출신으로 14년간이나 팀을 이끈 베테랑 1루수. 토드 헬튼의 후계자로 불리는 그는 콜로라도의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의 와이프가 다저스의 올스타 중견수 로드리게스와 바람이 났다?

메이저리그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야 로드리게스가 로드비프를 만나든 말든 사생활이니 참견하진 않았지. 하지만 그 상대가 같은 지구 소속 팀 리더의 와이프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말리려 했을 거야. 우리가 눈치챘을 때는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었지만."

마르쿠스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드레이븐 또한 그 당시를 상기하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로드리게스 빌어먹을 자식이 팀에서 겉돌았던 이유 중 하나도 그거야. 마르쿠스나 노아, 아니면 나 같은 경우에도 그런 지조 없는 자식은 보면 주먹을 한 대 날려주고 싶어 하거든. 게다가 같은 직장 동료의 와이프를 건드려? 몇 번을 씹어먹어도 부족할 놈이지."

해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리게스를 밀어내기로 했을 때 구단에서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던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개인의 문제로 팀에 위해를 끼치는 선수를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사이 마르쿠스의 설명은 계속됐다.

"결국 남편의 불륜을 알아챈 로드리게스의 부인이 이혼 소송을 제기했지. 로드리게스가 그리 세심하게 숨기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하여간 그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가십기자들이 달라붙었고... 진상이 알려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 하루도 필요하지 않았어."

그렇게 5월 중순에 다시 조우하게 된 다저스와 콜로라도.

이들 사이의 분위기는 마치 겨울이 7개월 정도 앞당겨 찾아온 것만 같았다.

로키스의 벤치는 살벌한 기세로 가득 차 있었고, 다저스 선수들은 로드리게스가 뿌려버린 똥물을 뒤집어쓴 탓에 한껏 예민해져 있었으니까.

"뭐, 그때 로드리게스가 엉덩이나 등짝에 한 방 맞고 넘어갔다면 좋았겠지만 말이야."

"..그럴 리가 없었겠죠."

해준은 로드리게스의 성격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했다.

작년 5월 22일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1차전.

리드오프였던 로드리게스의 등으로 공이 날아들었고, 그에 흥분한 로드리게스가 마운드로 달려가며 다저스와 로키스 간의 긴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제기랄, 이게 무슨 트로이 전쟁도 아니고. 여자 하나 때문에 다 큰 사내새끼들이 우르르 몰려서 패싸움 질이나 해대야 한다니."

드레이븐이 투덜거렸지만, 마르쿠스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로드리게스는 우리 팀의 일원이었어.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상대 팀에게 린치를 당한다면 우리로선 나서서 보호하는 수밖에 없지."

그 뒤로도 다저스와 로키스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로드리게스는 조금의 반성을 하는 기색도 없이 출루만 했다 하면 스파이크를 들이 밀어버렸고, 로키스의 선수들에 그런 그를 응징하기를 바랐으니까.

그렇다고 다저스 선수들이 그것을 멀뚱하니 보고 있을 수 없는 노릇.

그렇게 서로 치고받고 하다 보니 다저스와 콜로라도는 어느새 그들이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을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마르쿠스는 진중하면서도 열기가 느껴지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쯤 됐으면 누가 잘못했냐는 중요하지 않아. 원인 제공을 누가 했던, 이미 벌어진 싸움에서는 무조건 이겨야 해. 메이저리그에서는 기세에서 밀리면 끝이니까."

그리고, 그 갈등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크게 터졌던 것이 바로 9월에 일어났던 역대급 벤치클리어링.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군."

옆에서 조용히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루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메이저리그에서 성격 사납고 덩치 큰 선수들을 모아놓기로 유명한 콜로라도 로키스다.

마르쿠스는 그 경기에서 갈비뼈에 금이 가 진통제를 맞으며 경기를 뛰어야 했고, 드레이븐은 상대 팀 3루수의 턱을 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우르르 몰려온 선수들에 의해 깔리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루이스 또한 그 경기에서 얻은 어깨 부상으로 포스트시즌에서 고생했을 정도였으니 메이저리그에 악명이 자자한 돌주먹 로키스가 비록 가을 야구에 진출하진 못했더라도 발목을 잡는데 성공한 것은 분명했다.

[다저스의 선수단 여러분, 마일하이 시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5분 뒤부터 하강을 시작할 예정이오니..]

그때 들려오는 기장의 착륙 안내 소리.

잠에 빠져있던 다저스 선수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숨을 쉰 루이스는 성호를 한차례 긋고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죽게 된다면 천국에 갈 여비는 좀 아끼겠군. 하늘과 가까우니."

+++

5월 20일.

쿠퍼스 필드에 들어선 다저스 선수단의 얼굴에는 아직 해소하지 못한 피로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전날 워싱턴 내셔널스와 더블 헤더를 치루고는 곧바로 넘어온 만큼 체력적으로 불리한 상황.

--우우우우우우우!

"신성한 쿠어스에서 꺼져버려, 빌어먹을 다저스 새끼들!"

"원정 불륜 팀이 감히 어딜 기어들어 오는 거야? 또 로키스의 돌주먹을 맛보고 싶나 보지?"

"로드리게스가 사라졌다고 우리가 환영이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했냐 멍청이들아!"

설상가상으로 열정적인 덴버의 관객들 또한 다저스에 대한 적의를 쏟아내고 있었다.

몇몇 기가 약한 선수들은 하얗게 얼굴이 뜰 정도.

하지만 그런 비난 속에서도 드레이븐은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들 인기는 여전하잖아? 괜히 걱정했네. 잊어먹었을지 알고 얼마나 걱정했다고."

"..그냥 잊어먹었으면 좋겠는데."

"응? 이봐, 루이스. 자네가 뭘 모르나 본데. 이곳 쿠어스 필드에서 로키스 선수들 다음으로 유니폼을 많이 파는 선수들이 바로 우리야."

드레이븐의 말에 루이스가 의외라는듯 되물었다.

"..우리가?"

그 반응에 드레이븐이 낄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태우려고 산다던데? 판매량이 많은 순서대로 이곳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소리지. 내가 1위고 자네는 아마.."

"됐어. 별로 듣고 싶진 않군."

한편, 벤치 한편에서 상대 더그아웃의 분위기를 확인한 마르쿠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준, 너도 워밍업 때 눈치챘겠지만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거칠게 플레이하는 친구들인데 로드리게스 사건 이후로 명분까지 생긴 상황이야. 까딱하면 시즌 아웃이라고."

해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KBO는 아무리 팀 간의 갈등이 심하더라도, 모두가 선후배 관계로 엮어있는 만큼 그 분위기가 일정 선을 넘지 않는다.

그에 비교해 이곳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누군가 총을 꺼내 난사할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까.

그러한 숨 막히는 위압감에 고스란히 노출된 측이 자신들 쪽이라는 것은 더더욱 큰 문제였고.

'확실히 심각하긴 하네.'

해준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 가볍게 스윙 궤적을 체크하며 생각에 잠겼다. 몇몇 선수들의 얼굴은 이미 게임에 진 것이라도 한 것마냥 침울한 기색이 역력한 상황.

아마 작년 마지막 벤치클리어링에서 크게 밀렸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탓이 클 것이다.

'이건 안 좋은데..'

리그 1위와 3위의 위치라 할지라도,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부가 뒤집히는 것이 야구다. 그런 면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는 이미 경기의 반을 먹고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들리는 구심의 재촉 소리.

"배터, 타석으로!"

구심의 목소리는 경기 시작 전부터 전해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타석에 들어섰다.

'그렇다면 일단 기세부터 가져온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팀 대 팀의 싸움에서 기세부터 지고 들어간다는 것은 패배의 지름길.

'이 분위기를 뒤집을 한 방이 필요하다.'

판을 뒤집을 패를 떠올린 해준이 자세를 잡았다.

"플레이볼-!"

+++

로키스의 포수 샘 린.

그는 얇게 뜬 눈으로 타석에 들어선 다저스의 루키를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요즘 메이저리그를 시끄럽게 만드는 장본인이란 말이지..'

4할의 타율, 5할의 출루율, 9할의 장타율.

그에 더해 약점이란 약점은 발견되는 즉시 수정해버리는 이해 불가의 괴물.

리드를 하는 포수 입장에서는 골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정면으로 승부하기엔 좀 부담스럽고... 일단 좀 흔들어볼까.'

생각을 마친 샘 린이 입을 열었다.

"이봐, 루키. 내가 다저스에 대해 비밀 하나 알려줄까?"

해준은 그 말에 스파이크 끝을 배트 헤드로 툭-툭- 치며 샘 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샘 린이 씨익- 웃으며 이어 말했다.

"네 여자친구 관리 잘해. 다저스는 순 불륜남들 천지거든."

그에 해준은 슬쩍 구심을 바라보았지만, 제지의 의사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마르쿠스 말이 사실이네.'

다저스와 로키스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악화일로 된 것은 이들의 갈등을 방치하다시피한 구심의 영향 또한 컸다.

농구나 미식축구에 비해 선수들 간의 충돌이 없다시피 한 야구.

이는 젊은 층들에게 루즈하다는 비판과 함께 큰 디메리트로 다가갔는데, 이 문제가 MLB 사무국의 골칫거리 중 하나라는 사실은 비밀 축에 들지도 못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메이저리그의 벤치클리어링 비율은 급격히 상승한다.

이는 선수들 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방치하여 팬들의 시선을 끌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깔린 사무국의 생각임이 분명했다.

그사이에도 샘 린의 도발은 계속됐다.

".....어먹을 로드리게스 자식을 보호한 것만 해도 그렇지. 딱 보면 알겠더라니까? 가재는 게 편이라잖아? 끼리끼리 노는 거겠지. 어쩌면 서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르지. 잠깐,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루키 너도 혹시..?"

단순한 트레쉬 토킹이라고 하기엔 다분히 아슬아슬한 수위에서 놀고 있는 대화.

"이봐, 샘 린. 거기까지. 선은 넘지 말아야지. 안 그래?"

듣다 못한 구심이 인상을 찌푸리며 제지에 들어가려 했지만.

"괜찮습니다."

해준은 오히려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주변에서 그런 것만 보고 자라왔나 보죠. 아, 혹시 부모님이? 이런, 힘들었겠습니다."

"What? 너 지금 뭐라고.."

그 말에 순식간에 샘 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말을 이으려 했지만, 심판의 화가 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먼저였다.

"샘 린! 게임에 집중해!"

"..제길, 알았수다. 알았어."

루키의 한 마디에 밀려버린 상황.

이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은 샘 린이 씩씩대며 리드에 들어갔다.

그의 표정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텅!

그의 표정은 한 차례 더 일그러지고 말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샘 린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폴대를 바라보았다.

'..그걸 밀어서 맞췄다고? 미친 자식이잖아?'

카운트 2-2.

족히 공 3개는 빠지는 싱커.

그 순간, 눈앞에서 무언가 번뜩인다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타구가 노란 폴대에 부딪힌 뒤였다.

[IT'SSSSS A KING KANG TIME! 다저스의 리드오프, KANG이 시작부터 폴대를 때려내는 타구를 날려버립니다! 카운트 2-2! 바깥쪽 싱커를 밀어쳐 그대로 시즌 20호 홈런을 기록하는 다저스의 슈퍼 루키입니다!]

"What the fuc...."

"MOTHERF..!!"

"---!!!!"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리는 쿠어스필드의 분위기.

더욱이 이들의 기를 막히게 하는 것은, 홈런을 때려낸 다저스의 루키가 그 타구를 천천히 감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Hey! You MOTHERFUCKE...!"

그 사실에 분노한 로키스의 선발 릭 피어스가 마운드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을 때.

타구를 바라보던 해준은 천천히 포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도 비밀 하나 알려줄까?"

마스크 뒤로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고 있는 샘 린.

해준은 그 마스크 철망 너머에 있는 샘 린과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는 말했다.

"시비도 실력이 되는 사람이 거는 거야."

그와 함께.

"지금처럼 말이야."

휘이익-

보란 듯이 배트를 콜로라도의 벤치를 향해 던져버리자.

-----------!

쿠어스필드에 경악 서린 침묵이 내려앉았다.

< 돌주먹 로키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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