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의 적Public Enemy No.1 (2) >
98. 공공의 적Public Enemy No.1 (2)
철옹성.
눈앞의 투수를 처음 마주했을 때 들었던 심정이었다. 그만큼이나 이번 상대는 확실히 다른 투수들과는 그 수준을 달리했다.
[아웃라이어(Outlier) 공공의 적Public Enemy NO.1]
-에드워드 쿠팩스
[소속]
-메이저리그
[특이사항]
-좌투좌타
[아웃라이어 업적]
-데뷔 이후 1,259구의 커브 무피홈런
-통산 커브 피안타율 0.125
-통산 커브 피장타율 0.199
다저스의 전설이자 커브의 아웃라이어.
에드워드 쿠팩스.
데뷔 이후 1,200구가 넘는 커브를 던지며 단 하나의 홈런도 허용하지 않은 마운드 위의 괴물. 그리고 크게 벌어진 어깨와 그에 어울리는 체격, 진지한 투쟁심이 깃든 눈빛을 가진 투수.
'온다!'
그런 그가 현재 투구판을 박차고 있었다.
폭발적인 전진력과 함께 이어진 테이크백 동작, 그와 함께 마운드에서부터 밀려오는 폭발적인 기세.
해준은 그 속에서 이전의 승부들을 되새기며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기억 속의 움직임과 눈앞의 동작이 오버랩되며, 투구 과정들이 하나하나 천천히 풀려나오기 시작한다.
거대한 체구 속에서 숨겨둔 팔스윙.
그의 고개가 숙여진다고 생각했을 때쯤, 시야에 들어오는 폭발적인 하얀 궤적까지.
쉬이이익-!
그 초구는 특유의 맹렬한 백스핀과 함께 하늘로 솟구칠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누가 보아도 포심 패스트볼이 분명한 선명한 일직선의 궤적.
하지만, 그 순백의 궤적은 홈플레이트 근처에 이르자.
퍼어어엉-!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것만 같은 하강 궤도와 함께 훅- 시야와 멀어진다.
"..스트라이크!"
그렇게 존 경계의 하단에 꽂혀 든 스트라이크.
이 모든 과정을 다시 한번 눈에 되새긴 해준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구는 역시 커브.'
이미 5번이나 상대했던 만큼, 초구가 어떤 구종, 코스로 올 것인지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은 어떠한 대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이 미친 구질은 아무리 건드려도 홈런을 때려낼 확률이 희박해.'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과는 차례대로 땅볼과 플라이.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의 구질 중 하나로 꼽히는 이것은 적응이라는 단어 자체를 거부하는 듯했다.
타임을 부르고는 벗어난 배터박스.
'그러니 초구는 버린다.'
한 차례 스윙 궤적을 체크한 해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1964년의 다저 스타디움.
몇 차례 대대적인 리빌딩을 거쳤던 2027년과는 다른 부분들이 이곳저곳 눈에 띄었다.
선명한 화질의 헥사 모양 전광판에는 수동형 스코어판이 들어서 있었고, 다른 구장과 별다를 바 없었던 좁은 파울존의 자리에는 아직 관중석이 들어서지 않아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하지만, 역시 그중 가장 압도적인 것은 5만 6천 석의 관중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
'길버트 밥과의 링크에서 겪었던 분위기와 매우 유사하지.'
스마트폰도, 마땅한 즐길 거리도 없이 야구에 집중하는 진지한 관중들의 시선이 쏟아져 내라고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는 플러싱 메도우 파크였고 지금은 다저 스타디움이라는 것.
"어서 삼진이나 당하고 들어가라고 이 빌어먹을 브루클린 자식아!"
"하여간 퀸즈나, 브루클린 자식들이나.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게 생겨먹었군! 어서 쿠팩스에게 삼진이나 먹고 질질 짜면서 벤치로 돌아가기나 하시지 도시 촌놈 양반!"
그리고 지금 자신이 속한 팀은 지금의 LA 다저스와는 원수지간인 뉴욕 메츠라는 것.
비교적 얌전하기로 유명한 다저스의 팬들이었지만, 이 시대의 뉴욕 메츠와 다저스의 관계란 그런 것으로 누그러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팬들이 원정 경기 응원을 오는 경우가 드문 1960년대의 서부.
이곳을 가득 채운 5만 명이 넘는 관중들이 쏟아내는 적의를 마주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프레셔가 될 수밖에 없었다.
"후우.."
하지만, 해준은 그런 숨 턱 막혀오는 기분을 한 번의 호흡으로 해소해버리고는 타석에 들어섰다.
벌써 6번째 링크.
관중들의 존재를 의식하기에는, 눈앞의 투수가 뿜어내는 존재감이 너무나도 확고했다.
여전히 시야 한 편에 떠올라있는 괴물 같은 기록들.
그것을 다시 한번 힐끗 바라본 해준은 다시 타격 자세에 들어갔다.
'분명 괴물 같은 기록들이지만...'
[목표 – 아웃라이어 '공공의 적Public Enemy NO.1' 에드워드 쿠팩스를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기]
자신은 그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해준이 홈플레이트를 향해 최대한 붙어서 라인 위로 스파이크를 짓이겼다.
퍼어어억-!
"볼!"
그 뒤, 칼날 같은 예리함과 함께 눈앞을 가로질러버리는 하얀 궤적. 자신이 타석에 붙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쿠팩스의 타오르는 시선이 쏘아지기 시작했다.
씨이익-
그와 함께 해준의 입꼬리 말려 올라갔다.
'역시 이 시대의 투수들은 터프한 면이 강하다.'
그리고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은 채 오히려 그 시선을 도전적인 기세와 함께 받아쳤다.
지난 5번의 대결.
그곳에서 자신이 도출해낸 결론은 간단했다.
'터프하고 강한 사냥감일수록 힘으로 상대하려 들어선 안 된다.'
꾸준히 성장을 거듭한 몇 년 뒤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다소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고안해내야 했다.
그 사이, 해준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시 한번 머리를 향해 달려드는 포악한 패스트볼.
퍼어어억-!
"볼-!"
2구 연속으로 머리를 향해 패스트볼이 달려들자 다저스 관중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잘한다 쿠팩스! 그 겁도 없는 브루클린 촌놈 자식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려!"
"미친 자식, 어디 쿠팩스 앞에서 홈플레이트에 붙어먹으려 들어? 그러다 진짜 골로 간다는 것만 알아두라고!"
보통 타자라면 기가 질려서라도 물러날 분위기가 들끓었다.
하지만,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을 번뜩인 해준은 주변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걸로 2볼 1스트라이크.'
자신이 쿠팩스를 상대하는 다른 방법은 간단했다.
첫째, 지금처럼 상대의 투쟁심을 자극해 볼을 낭비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
따아악-!
"파울-!"
퍼어어엉-!
"볼-!"
따악-!
"파울-!"
더 히팅 프릭, 보로디미르의 히팅 센스를 활용하여 까다로운 코스의 공들을 걷어내기.
그렇게 카운트는 3-2.
타석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끈질기게 달라붙기 시작하자, 쿠팩스의 눈동자에서 거친 스파크가 튀었다.
'좋아. 여기까지는 왔다.'
그것을 바라본 해준이 눈을 번뜩였다.
지난 5번의 경험에서 벌어들인 경험을 우위로 활용하여 도달한 루트 끝. 이제부터는 이 앞에 어떤 구종이, 어떤 코스를 향해 덤벼들지 모르는 상황.
'남은 건 내가 의도하는 곳으로 오느냐 하는 것뿐.'
예리하게 끌어올려 진 감각 속에서 다시 한번 타격 자세를 잡는다. 송진 스틱을 바른 나무 손잡이와 맨손바닥이 끈적하게 달라붙으며 기분 좋은 그립감을 만들어냈다.
'홈런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건 세 번째.'
바로 상대가 포심 패스트볼을 당겨치기 좋은 코스로 던져올 것.
먹잇감은 이미 충분히 던져둔 상태였다.
바깥쪽 코스를 커트하면서도, 몸쪽 코스에서는 조금도 물러나려 하지 않는 모습.
이런 타자에게 쿠팩스는 높은 확률로 포악한 몸쪽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삼진을 만들어내고는 했다.
그리고 쿠팩스가 그 특유의 자신감과 함께 패스트볼을 꽂는 순간이, 자신의 배트가 휘둘러질 순간이었다.
'와라.'
자세를 잡자, 곧바로 와인드업에 들어가는 쿠팩스.
망설임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투구판을 박찬 그의 손에서 다시 한번 맹렬한 기세로 하얀 궤적이 쏘아져 나왔다.
'지금이다!'
그 순간, 해준의 두 눈이 번뜩였다.
위협구보다는 다소 낮고, 스트라이크존에 가깝다.
보통 타자라면 배트가 끌려 나오면서도 공 2개차이로 헛스윙이 이루어질 절묘한 코스.
하지만 토니 디에고 블랑코의 짐승 같은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이곳은.
"흡!"
자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등골을 쭈뼛 건드려오는 날카로운 감각.
숨을 들이킨 해준의 왼쪽 스파이크가 콰짓- 배터박스의 흙을 짓이기며 알갱이가 거칠게 튀어나갔다.
그와 함께.
따아아아아악-!
지난 5타석에서의 패배의 울분을 날려버리듯, 거칠면서도 시원스럽게 당겨진 극단적 풀스윙.
균형을 잃은 해준은 손에 느껴지지 않은 감각에 오른쪽 폴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텅-!
왼쪽 라인선상을 그대로 따라간 하얀 궤적이 폴대와 충돌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웃라이어 '공공의 적Public Enemy NO.1' 에드워드 쿠팩스의 커브 대응 감각을 획득하셨습니다.]
해준은 또 다른 송곳니를 손에 넣었다.
+++
5월 17일.
신시내티와의 3연전에서 2승 1패를 기록하며 여전히 내셔널리그 전체 승률 1위를 내달리는 LA다저스.
그런 그들과 결전에 임하는 워싱턴 내셔널스.
지구도 다르고, 라이벌 구도도 아닌 이들이었지만 워싱턴의 지역 언론들이 이번 경기에 가지는 관심은 생각보다 높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메이저리그의 떠오르는 스타 해준이 맞이할 진정한 고비라고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커브 구종 가치 전체 1위 워싱턴 내셔널스! 슈퍼 루키의 기세를 잠재우나?]
[괴물의 아킬레스건을 노리는 파리스의 화살. 내셔널스. 1, 2, 3선발 모두 리그 최상급의 커브를 구사.]
여전히 리그 최상위권의 기록을 유지하고 있는 해준이었지만, 최근 들어 커브에 대한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가 줄을 잇는 상황.
게다가 그를 의식하듯 이어진 워싱턴의 1선발 게빈 하우서의 코멘트까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선발 게빈 하우서. 'Kang? 뛰어난 타자이긴 하지만 이미 분석은 끝났다. 그의 거품은 곧 꺼지게 될 것.']
평소에도 MLB의 이슈메이커로 불리며 많은 팬들의 주목을 받고 있던 게빈 하우서.
그런 그의 발언은 수많은 언론들에서 재인용 되며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스타가 될 것이라던 게빈 하우스의 평가.
당연하게도 그 영향력이 가벼울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해준의 전체적인 평가가 내려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역사에서도 탑 티어로 꼽힐 것이 분명한 이레귤러적인 수비. 4/5/8의 슬래시라인을 기록하고 있는 타격 성적까지.
메이저리그 신인왕을 넘어 리그 MVP를 정조준하는 괴력적인 페이스의 선수를 비웃을 야구팬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인간미가 있다고 봐. Kang이 커브까지 치게 되면 메이저리그는 말 그대로 파괴될 테니 말이야.
-모든 구종을 완벽하게 칠 수 있는 인간은 이스마엘뿐일걸? 그가 이상한 거지 Kang이 이상한 게 아니야. 커브를 공략하지 못해도 그는 여전히 4할 타자라고!
-얘들아, 이게 말도 안 되는 걱정이라는 거 알아? Kang의 패스트볼 타율 성적은 5할에 근접해. 그런 그가 커브 타율이 낮다고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야? 혹시 다저스가 커브를 못 친다는 이유로 Kang을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내길 희망하는 거야?
-그냥 이번 기회에 쉬는 것도 괜찮을 텐데? Kang의 수비는 많은 체력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여. 그에게도 휴식이 필요할 거라고.
-그게 좋겠네! Kang이 괴물 같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어도 그는 24세의 루키라고. 페이스를 조절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선택일 거야.
-출전한다고 해도 고작해야 워싱턴 전에서 대충 아웃당하다가 다음 시리즈에서 또 폭발하겠지. 이건 큰일이 아니라고.
오히려 워싱턴 전을 휴식 기간으로 삼자는 주장에 힘이 실릴 뿐이었다. 커브를 치지 못해도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수. 그것이 현재 해준에 대한 평가였으니까.
반면, 해준의 약점을 지적했던 워싱턴 언론에 대한 조롱 댓글들만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기 시작했다.
-자, 이제 다른 타자들의 약점에 대해 말해보실까? 먼저 워싱턴의 리드오프부터 말해보자. 잠깐. 얘는 그냥... 칠 수 있는 구종 말하는 게 더 빠르겠는데?
-내 6살짜리 조카의 분석에 의하면 워싱턴 놈들은 패스트볼,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등에 약해. 이것들만 보완하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할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쉽네.
-커브 구종 가치 1위? 패스트볼 구종 가치는 왜 보이질 않지? ...아, 저 아래 있네? Kang의 패스트볼 타율이 메이저리그 몇 위라는 걸 까먹은 건 아니겠지?
이런 상황에서 워싱턴 내셔널스 선수들이 몰려있는 클럽 하우스의 분위기가 밝을 리가 없었다.
북미 전체에서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슈퍼스타로 발돋움 하고 있는 해준. 더군다나 아시아 지역의 팬들까지 SNS로 우르르 몰려와 워싱턴 언론의 행태를 비꼬기 시작하자, 몇몇 이들은 계정을 비공개로 돌릴 정도였으니까.
"제기랄,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미쳐버리겠군. 그냥 한마디만 하면 우르르 달려들어서 린치를 놓아버리니... 이번에는 몇 개월 만에 풀 수 있으려나?"
말은 하지 않았지만 괜한 입방정으로 불필요한 사태를 불러온 1선발 게빈에 대한 분위기가 좋을 수는 없었다.
그러한 공기를 알아챈 워싱턴의 투수 코치가 다가와 물었다.
"이봐, 괜찮나 게빈?"
재작년, 워싱턴이 7년 3억 1,000만 불이라는 거금을 들여 영입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인 게빈 하우스.
평소에도 슈퍼스타 기질이 강하고 논란이 되는 코멘트를 많이 불러오는 그였지만 2년 전까지는 별 다른 상관이 없었다.
항상 그를 덮을만한 성적을 기록했었으니까.
하지만 FA를 통해 워싱턴으로 이적한 후 성적은 2승 11패 ERA 4.52의 부진.
올해조차 0승 3패 ERA 5.34를 기록하며 최악의 먹튀라 불리고 있던 게빈 하우스.
그가 이를 악물며 악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실력으로 증명하면 됩니다. 그게 메이저리그 아닙니까?"
전성기 시절, 거칠 것 없던 그의 발언들은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자해 도구로 전락한 상황.
게빈 하우서가 으득-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 그렇다면 내가 그 자식을 잡아내면 나를 뭐라고 부를 거지?"
팬들의 반응에 프라이드에 큰 상처를 입은 게빈 하우서.
그가 재기를 노리는 눈빛과 함께 글러브를 들고 클럽하우스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 공공의 적Public Enemy No.1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