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96화 (96/137)

< 인필드의 마스터피스 (3) >

96. 인필드의 마스터피스 (3)

1회 초.

구심의 플레이콜이 그라운드를 울린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다저스 스타디움 내의 분위기는 시작 전과는 매우 달라 보였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의 몇몇 팬들.

그들은 천천히 헥사곤 모양의 전광판으로 고개를 돌렸고, 중계석에서는 장내 캐스터 작의 비명에 가까운 해설이 이어졌다.

[Amazing Catch! 이 장면을 놓친 관객분들을 위해 전광판에서는 다시 한번 강의 놀라운 플레이를 보여줍니다! 보시죠, 강의 언빌리버블 플레이!]

시작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선발투수 케드릭의 초구를 강타한 파블로의 타구.

투수의 글러브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그 타구가 저공 궤도와 함께 2루 베이스 위를 통과했다.

그와 함께 급격하게 하강을 시작하는 타구.

배트에 그립이 긁혔는지, 마치 커브볼처럼 떨어지는 그 궤적은 분명히 금방이라도 그라운드에 처박힐 것만 같았다.

그에 몇몇 다저스 팬들은 탄식을 터트렸고.

"케드릭 이 빌어먹을 자식! 초장부터 난리군!"

"제길, 안타잖아!"

애리조나의 팬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타다!"

"시작부터 기세가 좋은걸!"

그 누가 보아도 안타가 확실해 보이던 상황.

그 순간.

"어?"

"...뭐, 뭐야?"

분명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주파해버린 한 유격수가 그 찰나의 순간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잔디를 박차며 그대로 공중에 몸을 띄우더니.

퍼어억-!

급격히 하강을 시작하는 타구를 절묘한 글러브 핸들링으로 그대로 걷어버린다.

그 뒤, 해준이 글러브를 들어 보이며 타구를 잡았음을 확인시켜주고, 심판의 아웃콜이 울리며 리플레이 장면은 끝이 났다.

그 장면을 다시 한번 확인한 애리조나 선수들의 얼굴 위에는 허탈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 괴물 자식..."

"돌아버리겠군. 유격수로 옮기고 나서도 저 정도 수비라고? 제길, 정말 소문대로 모든 포지션에서 중견수 레벨의 수비를 할 수 있는 거야?"

"아니, 누가 봐도 중전안타 코스였다고! 그걸 저렇게 잡아버리면 도대체 뭘 하라는 거야?"

반면, 이 놀라운 장면을 만들어낸 해준은 숨을 고르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글러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월리스 사에서 자신에 맞춰 커스텀마이즈한 유격수 전용 모델 A2000. 오늘따라 유독 착 달라붙는 착용감이 강하다.

'느낌이 좋다.'

감각이 좋다거나, 몸놀림이 가볍다거나 하는 영역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비에 있어서는 컨디션의 영향이 큰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무엇이든 될 것 같은 느낌이 가슴 한편은 꾹꾹 건드려오고 있었다.

'..뭔지는 알 것 같은데.'

프로 7년 차. 이런 느낌이 생소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어떠한 시그널인지는 알아차릴 만한 경험 정도는 있는 연차.

"..후으읍, 후우."

해준은 호흡을 안정시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는 이른 상황이다.'

고작 1회 초.

무언가를 확신하기에는 경기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2번 타자 타일러 필립스 삼진과 함께 이어진 1회 초 2사.

따아아악-!

[이번에도 날카로운 타구!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강의 놀라운 백핸드 캐...]

3번 타자 브라이스 알라드의 3유간 타구가 어김없이 글러브에 걸려들고.

2회 초 2사.

퍼어억-!

[....런닝 스로우! 벌써 두 번째 안타성 타구를 강탈당해버리는 애리조나 디백스!]

내야 안타성 타구마저 걷어내며 어마어마한 기세의 송구를 1루수 드레이븐의 글러브에 꽂아버리고 나서야.

해준은 확신할 수 있었다.

"..후우..후웁... 역시 그런가."

평소와 비교하면 유독 왼손에 착 달라붙는 글러브의 감각.

고작 2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향한 4번의 타구와 3번의 호수비.

생각하던 것이 틀림없었다.

'투수의 투구 궤적, 볼배합. 그리고 타자들의 스윙과 노림수.'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나타나곤 하는.

'타구 편향 현상.'

해준은 크게 숨을 한차례 들이쉬었다.

'설마 이런 경기에서 나타날 줄이야.'

릭 감독에게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모두에게 증명하기까지는 어느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중견수로서 만들어낸 임팩트가 워낙 컸던 만큼, 유격수로서도 그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한 경기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경기의 흐름이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간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보통 이런 경기에서 타자들의 흔들림은 극에 달한다.'

해준은 수비 이닝의 종료와 함께 애리조나 측 더그아웃을 힐끗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애리조나의 타자진을 통째로 뒤흔들어버릴 기회.

'..그리고 그 말은 그 흔들림을 제대로 이용할 기회가 왔다는 말이지.'

깊게 가라앉은 해준의 눈동자 위로 심상치 않은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5회 초 1사.

퍼어엉-!

"아웃!"

해준의 송구가 1루수 드레이븐의 글러브에 다시 한번 틀어박혔다.

[이번에도 강입니다! 불규칙 바운드가 걸린 타구를 그대로 맨손 캐치! 2루를 스스로 밟고는 곧바로 1루로 송구하며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는군요! 이 선수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중견수와 유격수, 외야와 내야! 그 모든 곳에서 경기를 지배해버리는 괴물 야수The freak fielder 강입니다!]

5회까지 애리조나 타자들의 안타성 타구가 잡힌 횟수는 총 5차례. 타구가 말 그대로 삭제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jesus! 말도 나오지 않는군."

"저런 선수가 그동안 중견수로 뛰었다고? 제길, 중견수 수비도 또라이 수준이긴 했지만.. 이건 정말 미쳤잖아!"

"Kang, 이 미친 자식! 경기가 끝나면 바로 저지를 사러 가고 말겠어!"

다저스 스타디움의 관중석에서는 초반과는 급격히 다른 함성 소리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따아악-!

간간이 외야로 향하는 타구가 있긴 했지만.

[플라이 아웃! 제이크 포드 선수 또한 안정적인 수비를 선보이며 외야 수비에 대한 의구심을 날려버립니다!]

제이크 또한 안정적인 수비를 선보이며 다저스 팬들의 환호성을 끌어냈다.

'..뭐야, 이거. 제이크가 유격수로 뛸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편하잖아?'

그런 상황에서 1루수 드레이븐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글러브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빨려 들어오는 송구들.

연습과는 다른 급박한 실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확성은 상승한 것 같았으니까.

3루수 노아 존슨 또한 감탄이 떠오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내 커버 범위가 줄어들었다. 준이 말도 안 되는 영역을 모조리 커버하고 있어. 덕분에 체력 부담을 덜었어.'

2루수 루이스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이봐, 제법인데?"

이제는 호의적인 눈빛과 함께 글러브로 어깨를 한 차례 툭 건드리고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루이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해준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내야 수비의 감각과 함께 애리조나 선수들의 스윙 궤적을 떠올렸다.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지는 수많은 스윙.

그리고 곧.

'역시. 타격 포인트가 흔들리고 있다.'

그것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아냈다.

그 누구보다 수없이 내외야를 넘나들며 깨달은 사실.

그것은 자신이 어느 포지션에서 수비하느냐에 따라 타자들의 반응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평생을 한 포지션에서 보내온 선수라면 모를 수 있다.

여러 포지션을 소화했더라도 그 실력에 편차가 큰 선수라면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포지션에서 타자들이 두려워할 만한 지배력을 발휘했던 자신만큼은 모를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타자들은 나를 향해 타구를 보내는 상황을 회피하기 시작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힘껏, 세게 공을 쳐 내더라도 그 방향에서는 안타성 타구가 아웃으로 둔갑한다면?

타자들에게 상상 이상의 공포가 되기 마련이다.

타격이란 예민한 생물체와 같아서 조금의 흐트러짐에도 슬럼프에 빠지고는 하니까.

자연스럽게 절망적인 가정밖에 떠오르지 않은 코스는 무조건적으로 피하려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가 진짜로 슬럼프가 찾아오는 순간이지.'

개막 4연전에서 이상할 정도로 장타력이 급감했던 애리조나 타선진이 그 예였다.

외야에서 자주 잡혔다면 더 힘껏, 더 크게 휘두르려 한다.

그로 인해 몸에는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고, 자연스러웠던 스윙 궤적은 흐트러진다.

반면.

따아악-!

[1루 땅볼! 무리해서 밀어낸 타구가 힘없이 드레이븐의 앞으로 굴러갑니다!]

내야에서 라인드라이브, 혹은 땅볼로 잡혔다면 그 방향을 수정하려 든다.

때마침 나타난 타구 편향 현상이 그것을 극대화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해준에게 타구가 몰리며 더욱 몸집을 불린 애리조나 타자진들의 두려움.

그리고 그것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

'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지.'

늪에 빠진 동물처럼, 애리조나 타자들은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자신이 만든 늪에 급격하고도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타자의 스윙 궤적을 읽어낸 해준이 다저스의 내야수들에게 다시 한번 사인을 전달했다.

[이번에도 강이 지시를 전달합니다! 3루 코치 호프먼이 어떠한 사인도 전달하지 않았음에도 말이죠! 선수 스스로가 벤치에서 나오는 시프트가 아닌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시프트를 고안하는 믿기 힘든 장면들이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유격수와 2루수가 전체적으로 1루 방향을 향해 치우치고, 3루에는 노아 존슨만이 서있도록 형성되는 시프트.

'이 빌어먹을 자식들이..'

애리조나 타자가 이를 갈며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따아아악-!

빨랫줄 같은 타구를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정면! 2루 베이스 뒤편에 서 있던 강의 글러브에 파블로의 타구가 다시 한번 빨려 들어갑니다!]

다저스 내야진의 시프트는 어떠한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철옹성과 같은 거미줄에 걸려 극히 극소수의 타구만이 외야로 향하고 있는 상황.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스카이박스석에서 그 장면을 내려다보던 이반 단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시프트 조정 권한을 요청했을 때까지만 해도 의아하긴 했지만 허락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해준에게는 이미 외야에서 시프트를 조정하고 결과를 만들어냈던 전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내야에서의 시프트는 그 레벨이 달랐다.

"투수의 궤적과 코스, 포수의 볼배합, 타자의 미묘한 스윙 궤적의 변화까지 모조리 현장에서 계산해 시프트를 그때그때 조정한다고?"

이반 단장으로서는 아연질색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외야에서의 해준은 마치 짐승과 같았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운동신경과 순발력, 타구 궤적 파악 능력으로 그라운드를 커버했던 그라운드 위의 야수.

반면, 내야에서는 그 운동신경과 순발력에 더해 말도 안 되는 분석 능력으로 다저스 내야진을 제 손발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미쳤군.. 미쳤어. 이래서 그토록 이나 자신할 수 있었던가?"

이미 언론의 분위기 같은 것은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다저스 스타디움 내의 관중들은 이미 해준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고, 현장의 관계자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해준이 시프트를 조정할 때마다 눈알이 빠져나갈 듯이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완전히 압도해버렸군... 그 애리조나를 말이야."

작년과 재작년.

지난 2년간 끊임없이 다저스를 학살하다시피 짓누르며 포식자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했던 애리조나.

그들이 단 한 명의 선수으로 인해 개막 4연전에 이어 또다시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반 단장의 그런 감탄사가 사라질 틈도 없이.

따아아아악-!

[큽니다! 고개를 들지도 않는 강! 수비에서 애리조나를 압도해버린 그가 이번에는 타석에서 경기를 지배합니다!]

해준이 만들어낸 거대한 포물선이 다저스 스타디움의 하늘을 갈라버리고 있었다.

"이번 시리즈. 이미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군."

시작은 불안함과 함께였지만, 끝에 이르러서는 확신이 담긴 음성과 함께 눈빛을 빛내기 시작한 이반 브루스.

그에게는 벌써부터 다저스의 찬란한 미래가 엿보이는 듯했다.

잠시 뒤 9회 초.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해준의 의도대로 단 한 점도 내지 못한 애리조나는 5점 차의 스코어로 참패, 다저스와의 3연전 첫 경기를 패배로 기록한다.

그렇게 7일이 흐르고.

[Unbelievable! 다저스에 나타난 괴물 유격수가 이번에도 안타성 타구를 잡아냅니다!]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3위,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 중.

[다저스 투수진의 커브 구종 가치가 유의미적으로 상승했습니다!]

믿기지 않은 수비들의 연속으로 다저스의 실점을 크게 낮춰버려, 구종 가치를 상승시키는 데 성공한 해준.

그 눈앞에 기다리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인필드의 마스터피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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