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필드의 마스터피스 (2) >
95. 인필드의 마스터피스 (2)
5월 7일.
다저스 스타디움의 원정팀 전용 클럽하우스.
이곳은 이미 홈팀 다저스와의 3연전을 위해 짐을 푼 원정팀 선수들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한 상태였다.
"이봐, 파블로. 현금 좀 있어? 클러비한테 팁을 줘야 하는데 지갑이 사라졌어."
"내 아이패드 어디 갔어? 이런, 조나단! 그거 내 것인 것 같은데? 네 것은 어딨냐고? 네 빌어먹을 엉덩이 아래에 깔려있다는 걸 내가 꼭 말해줘야겠어?"
내셔널리그 서부 지구 2위의 애리조나 디백스.
1위 다저스를 4.5경기 차로 추격하며 지구 내의 유일한 대적자로 꼽히는 이들.
비록 개막 4연전을 내리 내주는 수모를 겪은 경험은 있었지만, 자신감만은 충만한 상태였다.
직전 원정,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의 강자 휴스턴을 상대로 2전 2승을 기록하며 기세를 높인 디백스의 투타진들.
더군다나 오늘만큼은 그들에게 악몽을 안겨주었던 원흉마저 외야에서 모습을 감춘 채였다.
다저스가 제출한 로스터 명단을 확인한 디백스의 감독 제레미 미첼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 떠올랐다.
"베이츠, 가끔 그 무표정한 양반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굳이 강을 유격수로 돌린다고? 아니, 따지고보면 프런트의 결정이겠군."
"제이크 포드가 중견수로 간다더군요. 사실 소문은 있었지만 이리 기습적으로 발표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타격 코치 호세 체스터.
지난 다저스와의 원정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을 맛보았던 그는 해준이 유격수로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차라리 기술적인 문제라면 모를까, 그런 식으로 타자들의 정신 상태를 잡아먹어버리는 존재는 처음 겪어봤었으니까.
그런 예기치 못한 재앙 앞에서는 코치인 그나, 경험 많은 베테랑 타자나 루키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타자들에게는 늪과 같았던 다저스의 외야에 변화가 일어난 상황. 가장 큰 피해자였던 디백스의 타자들로서는 분위기가 들뜰 수밖에 없었다.
"그 괴물 자식이 유격수라고? 좋았어! 오늘은 뭔가 좀 될 것 같지 않아?"
"제길, 이번에야말로 한 방 먹여주려고 했는데!"
"구석에서 죽어라 번트 연습 하던 거 다 봤는데 인제 와서 무슨 헛소리야. 그저 교회 가서 신께 감사하다는 기도나 드리라고 stupid."
"이제 마음 놓고 장타를 쳐낼 수 있겠군. 그 극단적인 외야 시프트는 꿈 속에서도 나올 정도로 끔찍했지."
단 한 명의 중견수에게 흔들리며 다저스에게 시리즈 전체를 내줘버린 전대미문의 개막 4연전.
그 악몽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크게 안도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폭발적인 상승세의 다저스, 유일한 단점은 단장 이반 브루스의 도박 기질?]
다저스 측 진영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그와는 정반대인 상태였다.
[다저스의 이색 기용. 그때마다 흔들렸던 다저스의 포지션 밸런스.]
[중견수의 전설 스테파니, 'Kang의 유격수 기용. 올해의 다저스가 만들어낸 최악의 선택이 될 것.']
[KBO 시절에도 올라운더로 뛰었던 Kang.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다르다.]
지역 언론을 포함, 온갖 매체에서 쏟아져내리는 부정적인 예측들.
다른 선수였다면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다저스 역사상 최고의 유격수로 기대 받던 제이크 포드와 혜성처럼 나타난 더 프릭 필더 해준이라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저스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는 유명 지역 방송국 SportSpec.
이곳의 패널들이 이번만큼은 비판적인 말들을 연일 쏟아내고 있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했다.
"강이 KBO 시절 분명 내야수로 뛴 기록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곳에서도 뛰어난 유격수였다죠? 하지만 이곳은 메이저리그입니다! 던지는 투수도, 그를 치는 타자도 다르죠."
"배트 스피드, 타구 속도, 스핀량, 그리고 한 단계 더 빠른 수비 템포까지! 그 모든 것이 KBO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생소할 겁니다. 이건 데이터로도 명백히 증명된 사실이에요. 제가 알기로 역대로 동양인 내야수 중에서 자국 리그의 수비 퍼포먼스를 유지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게 결국 내야수에서 외야수로 포지션을 옮긴 선수요? 셀 수도 없이 많죠!"
"이제야 안정된 수비진을 구축한 상태에서 굳이 변화를 줄 필요가 있습니까? 더군다나 그 대상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라 불리는 제이크와 강입니다. 이건 정말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라고 밖에 볼 수 없군요."
다저스의 이번 결정에 쏟아지는 무수한 의문들.
하지만 그러한 반응들에도 다저스의 릭 베이츠 감독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다저스라는 최고의 명문 팀을 이끌다 보면 언론의 비난과 직면하는 일은 하루이틀이 아니지.'
그 모습에 넌지시 심정을 묻는 코치진의 물음에도 간단히 대답했을 뿐이었다.
"플레이오프에서 매번 탈락할 때에 비하면 양반이지. 안그런가?"
반면 다저스의 단장인 이반 브루스.
그는 한숨을 푹푹 쉬며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울리는 팬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바빴다.
-머리에 똥만 들어찬 브루스 자식! 다저스가 낳은 최고의 스타들을 그딴 식으로밖에 기용할 줄 모르다니!
-익숙하지 않은 포지션에서 수비를 소화하다가 부상이라도 입으면? 난 정말 다저스 단장실로 총을 들고 찾아갈지도 몰라. 이건 정말 멍청한 선택이라고!
-Kang이 유격 수비를 잘해도 문제야. 다저스의 외야진은 다시 구멍이 될 거라고. 포드의 운동 신경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중견수비를 유격수 시절만큼이나 잘 소화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의 인스타그램에 폭발적인 기세로 달리고 있는 댓글들.
그로 인한 알람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비공개 계정으로 돌릴까도 싶었지만.
'그것도 기사로 내보낼 기자 놈들이 몇 명인데. 그렇게 둘 순 없지. 게다가 내가 이번 결정에 확신이 없다는 뉘앙스를 풍길 수도 있고.'
머릿속을 스치는 몇몇 이유에 이반은 비공개 계정 전환 버튼에 올렸던 손가락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준. 정말로 그렇게까지 자신이 있는 건가?'
자연스럽게 오전에 걸려온 릭 감독와의 전화 내용을 떠올랐다.
자신을 유격수로 출전시켜달라는 해준의 요청.
제이크 포드 또한 동의했던 사항이었으니 언론의 비난을 감수한다면 포지션을 변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언론의 펜이나 팬들의 목소리가 아닌 전적으로 자신의 권한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과를 내야한다.'
이반 단장의 미간이 깊어졌다.
'그렇기에 내가 허락할 수 있었던 기회는 단 3경기. 그 이상은 정말 힘들어. 지금보다 여론이 악화된다면 팀의 분위기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모두에게 지금의 선택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해버린다면.'
그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뇌리에는 절로 그 이상적인 미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체력 부담을 떨쳐버리고 후반기에도 공을 터트릴 듯 때려내는 제이크 포드.
내야에서조차 믿기지 않은 수비를 선보이면서도, 메이저리그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리드오프로서 자리 잡은 해준.
상상만 해도 등골을 짜릿하게 울려오는 모습들에 이반 단장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힘이 돌아왔다.
다저스 스타디움이 한눈에 들어오는 스카이박스석.
그의 시선이 그라운드 위의 다저스의 내야진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
홈팀에게 배정된 연습 시간.
다저스의 내야진은 그라운드에 나와 수비 호흡의 사전 점검에 들어간 상태였다. 3개월 전, 스프링캠프 초창기를 마지막으로 해준과는 맞춰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필수적인 과정.
따아악-!
벌써 5번째.
3루 코치 호프먼의 날카로운 펑고볼이 3유간을 갈라놓으려 들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글러브.
곧 둔탁한 포구 소리와 함께 파공음이 이어졌다.
퍼어어엉-!
그렇게 1루수 드레이븐의 글러브에 틀어박히는 유격수 해준의 송구.
"휘유-! 준, 몸놀림이 죽이는걸!"
호프먼 코치의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해준의 유격수 수비를 점검 하기 위한 훈련인 만큼, 집중적으로 3유간 안타 코스를 향해 공을 보내던 호프먼 코치.
그때마다 해준은 불가사의한 예측 능력과 움직임으로 그 타구의 궤적을 어렵지 않게 끊어버리고 있었다.
"이쯤 하자고. 더 이상 사전 점검은 의미가 없을 것 같군."
호프먼 코치의 말에 종료된 내야 수비 세션.
잠시 뒤, 더그아웃 앞에 모인 다저스의 베테랑 내야진은 수비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호흡이 괜찮잖아? 이대로만 가면 되겠는걸."
1루 드레이븐 래리는 털털한 모습답게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고.
"제이크 녀석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네. 스프링캠프 때의 모습에서 전혀 녹슬지 않았는걸."
3루수 노아 또한 자신의 수비 범위를 교묘하게 넘나들며 안정된 수비력을 보이는 해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2루수로 출장하는 루이스 화이트만은 달리 생각하는지 평소 불만이 있을 때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쳇,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송구를 통해 호흡을 맞추는 경우가 잦은 1, 3루수와 달리, 2루수와 유격수는 동선이 겹치는 순간도 많고 그만큼 서로의 긴밀한 호흡이 중요하다.
다저스에 처음 넘어온 순간부터 제이크와 맞추던 호흡에 익숙해져 있던 루이스는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다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릴렉스하라고 루이스. 설마 지금 긴장하는 거야?"
그 모습에 노아가 웃으며 묻고, 드레이븐이 진짜? 라고 묻는 표정과 비웃으려는 조짐을 보이자 루이스가 황급히 변명했다.
"제길, 지금 불안감을 느끼는 게 나뿐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너희들이 이상한 거라고. 준이 분명 개인적인 캐칭 능력이 뛰어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실전에 들어서 한 번도 호흡을 맞춰보지 않았어. 게다가 지금 언론이랑 팬들의 반응 좀 봐. 여기서 실수라도 한 번 나오면? 볼 필요도 없지! 우리가 한 세트로 박살이 날 게 뻔하잖아? 제길, 그러고 보니 SNS계정도 미리 비공개로 돌려놓을 걸 그랬군."
루이스의 그런 반응에 드레이븐이 끝내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터트렸다.
"SNS 계정 폐쇄? 이봐, 루이스. 설마 틴에이저들이 호르몬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는 댓글에 30대 메이저리거가 쩔쩔매는 거야?"
루이스는 그런 드레이븐의 반응에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남자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드레이븐에게는 1년치 시즌의 놀림감이었으니까.
"자, 그쯤 해두자고. 어찌 됐든 준은 충분히 준비됐고, 이제 뛰는 일만 남았으니. 어때 준. 느낌은 괜찮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포수 마르쿠스가 다가와 상황을 정리하며 묻자,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요. 스프링캠프 이후로도 감각이 죽지 않을 정도로 훈련은 해왔으니까요."
타구 판단 속도, 전체적인 몸놀림, 글러브 핸들링, 런닝 스로우 도중의 송구까지.
2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내야를 떠나있던 해준이었지만, 내야에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격수로서의 감각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기대하지. 사실 포수석만큼 유격수의 멋진 수비를 보기 좋은 곳도 없거든. 눈 호강 좀 시켜달라고."
애리조나와의 경기 시작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현재.
언론에서 드러났듯, 다저스 스타디움의 분위기조차 평소와 같지 않았다.
수많은 팬덤층을 탄생시켰던 스타 유격수 제이크 포드의 갑작스러운 중견수 전환.
최상급 수비를 보이며 중견수로 자리 잡았던 해준의 유격수 투입.
팬들의 입장에서는 현재 다저스의 이 선택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다저스의 클럽 리더나 다름없는 마르쿠스로서는 지금의 분위기를 자신이 단숨에 불식시켜주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해준은 그 시선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서 쏟아지는 의심 섞인 눈길들.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
해준은 KBO 시절부터 무수히 겪어왔던 그 경험들을 떠올렸다.
백한타 시절의 자신부터 시작해, 체인지업, 슬라이더, 스플리터를 차례대로 공략해나가며 깨부수어 나가던 그 의심 어린 시선들.
메이저리그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곧 시작이다.'
경기 시작 시각이 다가오며 수없이 떠올랐다 스쳐 가는 생각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잡념들이 착 가라앉고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휴우..."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호흡을 고르고 있던 해준의 머릿속이 맑아졌을 때는 어느새 그라운드 위에 올라온 상태였다.
경기 시작 1분 전을 가리키고 있는 전광판.
그것을 확인한 해준은 조용히 전의를 끌어올리며 자세를 낮췄다.
그렇게 잠시 뒤.
"플레이볼!"
천적 애리조나와 다저스 간의 3연전이 막을 올랐을 때.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애리조나의 리드오프 파블로 제퍼스.
그의 방망이가 다저스의 선발 케드릭 피나의 초구를 힘차게 강타했다.
따아아악-!
경쾌한 파열음이 울리는 다저스 스타디움.
타석에서 쏘아지듯 튕겨나간 그 하얀 궤적은 내야 그라운드 위를 빠르게 갈라놓았다.
그 순간.
"흐읍-!"
모두의 시선을 앗아가 버리는 폭발적인 움직임이 터져 나옴과 함께.
[---what the....!]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장내 캐스터의 경악 어린 비명성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
다저스 스타디움의 드넓은 내부.
이곳을 가득 채운 관중들의 흥분 어린 환호성이 터져 나올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 인필드의 마스터피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