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스터 포벅스 in 스프링 (3) >
78. 미스터 포벅스 in 스프링 (3)
야구팬들이 생각하는 스프링캠프란 간단했다.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곳이지."
"오랜 휴식으로 멀어진 실전 감각을 끌어오는 곳이기도 하고."
"팀원들과의 호흡을 맞추는 것도 중요한 요소 아니겠어?"
오프 시즌동안 개인으로 돌아갔던 선수가 휴식에서 벗어나, 팀에 일조할 수 있는 일원으로서 거듭나는 시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수들은 스프링캠프 기간을 거치며 페이스를 조절하고, 잠시나마 멀어졌던 공을 다루고 치는 감각에 적응해나간다.
하지만 스프링캠프라고 해서 선수들이 온종일 야구에 대한 감각이나, 기술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보다는 경쟁자에 더욱 신경 쓰는 순간 있고, 뜬 소문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며, 언제 마이너리그로 떨어지거나 방출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오히려 야구를 잊으려 할 때도 있다.
"그런 과정도 결국 스프링캠프의 일부지. 최근에는 잘 안 보였지만 말이야."
다저스의 주전 3루수이자 사모아인 특유의 근질이 돋보이는 대머리 사내 노아 존슨. 그는 최근에 스프링캠프에 돌고 있는 묘한 긴장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평화로워서 내가 키즈클럽 부모님 모임에 출입했나 싶었을 때도 있긴 했지."
다저스의 빅뱃, 드레이븐 래리 또한 만족스러움을 드러냈다.
시작은 예상치 못했던 한 선수로부터 시작됐다.
8년 4억 2000만 달러라는 MLB 역사상 최고 규모의 계약을 성사시키고, 소속 구단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갈기는 것마저 성공하며 미스터 포벅스라는 기괴스러운 별명을 얻은 해준.
그가 커다란 스포츠백에서 온갖 글러브들을 꺼내 들기 시작한 것. 그때까지만 해도 선수들은 크게 심각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해준이 KBO 역사상 탑 티어로 평가받던 올라운더라는 사실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저 그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동안 동양계 야수들은 한계가 분명했으니까."
"안정 지향적 포구 자세와 마인드, 약한 어깨, 과감하지 못한 심리. 메이저리그의 수비 템포를 못따라오고 버거워 하는 경우가 흔했지. 덕분에 그쪽에서 최고 소리 듣던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만 오면 흔한 마이너리거들의 수준도 못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도 했고."
하지만 해준은 달랐다.
더블 플레이, 컷 오프, 그라운드볼 처리, 플라이볼 처리 등의 훈련에서 수준이 다른 기본기를 보여주더니.
곧 이어진 라이브볼 배팅의 수비 훈련에서는 경악스러운 커버 범위, 글러브 핸들링, 몸놀림을 뽐내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타자가 스윙을 하는 순간에 이미 움직이고 있었지."
해준의 타구 반응 속도였다.
노아 존슨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젓자, 드레이븐 래리 또한 그에 동조했다.
"투수가 던진 공의 궤적과 그에 맞춰 휘둘러지는 스윙 궤적을 보고 미리 타구의 위치를 예측한다고? 솔직히 나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다고. 그 장면을 직접 보고 나서는 잠깐 내가 미쳐서 헛것을 보고 있다는 게 더 설득력 있었고."
릭 베이츠 감독이 무슨 생각인지 아직 시범경기에 출장시키지 않아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이 선수는 전파를 타는 순간 메이저리그를 강타할 히트 상품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그런 선수가 출장 보장 조항까지 달려있으니. 다른 포지션 선수들이 위협감을 느끼지 않으면 말이 안 되지."
자신들이 언제나 메이저리그 게임에서 뛸 것으로 생각했던 다저스의 야수들. 하지만 모든 포지션에서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 수비 실력을 가진 해준의 등장에 선수들은 평상시에는 볼 수 없는 의욕을 가지고 훈련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던 점은.
"프런트가 꽂아 넣은 몇몇 밥버러지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거지."
유한 성격으로 유명한 노아 존슨 보기 드문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야에서는 자신들이 단단히 버티고 있으니 그 분위기가 좀 덜했지만, 작년 다저스의 외야진은 도저히 용납될 수준이 아니었다.
현 다저스의 단장인 이반이 부임과 동시에 큰돈을 들여 데려온 올스타 출신 외야 3인방.
재작년, 그리고 작년 포스트시즌을 제대로 말아먹은 이들은 현재 다저스가 이름값만 화려한 선수진으로 불리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트레이드 시도도 해보았지만, 높은 연봉에 웬만한 구단들의 트레이드 거부권까지 쥐고 있는 이들을 데려갈 구단들이 있을 리 없는 노릇.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자리는 지켜내려 하니 유망주들의 의욕조차 꺾어버리는 암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다저스 측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들을 끌고 가고 있었다.
드레이븐 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로드리게즈나 로빈슨 같은 경우는 주전 자리 보장 안 되면 트레이드해달라고 난리 칠 게 눈에 훤한 놈들이잖아? 메이저리그 주전이라는 사실을 밖에서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걸 삶의 목표처럼 여기는 놈들이니까. 여기서 만약 미스터 포벅스가 그 녀석들을 밀어내는 데 성공이라도 한다면? 그에 질린 그 녀석들이 스스로 떠나기를 자처하고 남는 자리를 누가 차지하려 들겠어?"
"40인 로스터, 혹은 거기에도 못 들고 마이너로 사라질 친구들에게 기회가 돌아간다는 소리지."
노아 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저리그의 한 팀이 보유할 수 있는 선수의 수는 40명. 비록 시즌이 시작되고 개막전 25인 로스터에 들지 못하더라도, 40인 안에 이름만 유지하고 있으면 1군에 콜업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설사 한 타석만 소화하고 다시 마이너로 내려가더라도 마이너 옵션이 소모되니 나쁘지만은 않은 상황. 더군다나 구단 측에서 마이너 옵션을 3번 소모한 상황이라면, 메이저리그에 그대로 자리를 잡을 수도 있게 된다.
그러니 시즌 시작과 동시에 마이너로 내려가더라도, 40인 로스터 안에만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한다면 스프링캠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
덕분에 스프링캠프 내에서 해준에 대한 평가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루키, 혹은 오랫동안 마이너를 머물렀던 선수들이야 대환호하는 분위기지. 미스터 포벅스가 어중간한 놈들을 휘저어버리고 혹여나 쫓아내는 데 성공이라도 한다면 본인들에게 기회가 돌아오니까."
현재 LA다저스 스프링캠프의 야수조 세력 구도는 크게 3층으로 나뉜 상태였다.
노아 존슨, 드레이븐 래리, 제이크 포드 등 다저스의 내야 핵심코어 층.
트레이드, FA 등을 통해 비교적 최근 수급됐으며 나름 이름 좀 날리며 포지션을 점유하고 있는 중간층.
그리고, 스프링캠프가 끝나면 마이너리그로 돌아갈 하위층까지.
해준은 이 중간층에 해당하는 선수들의 위치를 흔들어대고 있었고, 느슨하게 흘러가던 스프링캠프의 경쟁 구도는 어느새 팽팽한 특유의 긴장감을 되찾고 있었다.
"그동안 어중간한 선수들만 잔뜩 모아왔어. 연봉 보조든 뭐든 어떻게든 다이어트 한다는 심정으로 몇 명은 쳐내도 됐을 텐데 말이야. 가끔 외야수 놈들을 보면 야구선수가 아니라 출근 도장을 찍는 회사원처럼 보일 정도라니까? 팀 분위기만 좀 먹어 들어가고 있었다고."
드레이븐 래리가 투덜거렸다.
많은 스타급 선수들이 몸값이 올라가고 명성이 쌓이기 시작한다면 철저한 비즈니스적 마인드로 무장하기 시작한다.
다저스는 그런 선수들을 성적만을 바라본 채 무분별하게 끌어들여 왔고, 그 결과가 개인의 성적은 뛰어나지만,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팀 분위기였다.
워크에씩이 유독 심각했던 선수 같은 경우는 충분한 퍼포먼스를 끌어낼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옵션 달성을 위해 부상을 숨기고 경기에 출장하기까지 했을 정도였으니까.
그에 발끈한 드레이븐 래리가 라커룸에서 몇 번이나 난동을 피웠지만, 결국 바뀐 것은 없었다.
그 선수는 다저스를 떠났지만, 결국 얼굴만 달랐을 뿐 비슷한 마인드의 선수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을 뿐이었으니까.
3월 10일.
노아 존슨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 라커들을 둘러보았다. 바로 어제, 마이너행 통보를 받은 18명의 선수가 단체로 라커를 비웠다. 덕분에 시끌벅적했던 자신의 주변은 휭하니 빈 상태였다.
"그러고 보면 벌써 캠프도 중반에 이르렀군."
드레이븐은 과거를 떠올리며 붉게 물들었던 얼굴색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여기서 15명이 더 떨어져야.."
개막전의 25인 로스터가 완성된다.
한 차례 거름망으로 걸러진 정예 중의 정예.
그렇게 존슨과 래리가 로스터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 타격코치 데빈이 라커룸에 들어섰다.
"응? 다른 선수들은 다 어디 갔지?"
"좋은 아침입니다, 데빈. 그런데 출근 시간 전입니다. 새벽 6시잖아요."
노아 존슨이 어깨를 으쓱하며 시계를 가리켰다.
시침은 아직 6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데빈 코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저스 최상위 연봉 3인이 가장 부지런하군. 준도 오는 길에 마주쳤네만."
준은 해준을 부르는 코치들 간의 명칭이었다. 아무래도 선수들과는 다르게, 미스터 포벅스 같은 부정적인(?) 별명을 부르기에는 꺼림칙했으니까.
"그런데 왜 벌써 오셨습니까?"
노아 존슨의 말에 데빈이 씨익- 웃으며 종이 한 장을 팔랑였다.
"경기 출장 로스터는 새벽에 붙이고 도망가야 제맛 아니겠나?"
3월 10일, 캐멀백랜치에서 열리는 로키스와의 경기.
"그러고 보니 3명 모두 출장이군?"
그곳에서, 릭 베이츠 감독이 그동안 꼭꼭 숨겨뒀던 해준의 첫 번째 출장이 결정됐다.
데빈 코치가 종이를 붙이고 사라지자 노아 존슨이 화이트보드로 다가갔다.
1 Hae Jun Kang (CF)
1번 타자에 중견수 출장.
"중견수라... 이 말은."
"릭 베이츠 감독님이 드디어 결정을 내렸단 말이지."
드레이븐 래리 또한 이를 드러내며 씨익-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
다저스 스프링캠프.
시범경기가 시작된 지 벌써 7일째였지만, 해준은 아직까지 단 한 경기도 소화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멀리서부터 다저스의 스프링캠프를 보기 위해 찾아온 다저스 팬들은 해준의 포지션에 대해 갑론을박을 나누기 바빴다.
"좌익수를 노리고 있다던데?"
"무슨 소리야. 내가 봤을 때는 유격수를 연습하고 있었다고."
"다들 모르는 소리 하네. 강의 타격 실력 못 봤어? 타격에만 집중하라고 지명타자롤을 소화할 거야."
"헛소리하네. 다저스에서는 강을 인터리그에서만 뛰게 할 생각이라든? 4억 2천만 불짜리 선수를?"
매번 다른 글러브, 다른 포지션 연습을 이어가며 취재진과 팬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해준의 행보.
언론에서조차 팀원들에게 혼란을 주는 이런 모습은 팀 케미스트리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며 경고하고 있었지만, 정작 팬들에게는 그것이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가고 있었다.
모든 포지션을 괴물과 같은 실력으로 소화해내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게임에서도 보기 힘든 그 유니크함에 해준은 이미 수많은 코어 팬들을 양산한 상태.
그때, 팬들을 위한 게시판에 로스터가 붙었다.
1 Hae Jun Kang (CF)
그곳에서 해준의 이름을 확인한 팬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좋았어! 드디어 그 개 같은 로드리게스 자식을 안 봐도 되겠는걸!"
"중견수로 활용할 생각인가? 확실히 내야는 2루를 제외하고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긴 하지."
"이제 로드리게스는 트레이드 해버리자고! 그 자식이 2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을 망친 걸 생각하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아."
"무리일걸? 아직도 그 자식이 멀쩡한 걸 보면 단장의 비디오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으드득-
그 사이, 벤치 한편에 앉아 눈빛을 불태우고 있던 중견수 가브리엘 로드리게스. 그는 동양에서 건너온 일개 타자가 올스타 출신인 자신을 밀어냈다는 사실에 분노를 삼켰다.
'릭 베이츠. 나를 이런 식으로 밀어낸다 이거지?'
그동안 언론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사사건건 릭 베이츠 감독과 갈등을 일으켜온 외야 3인방 중 한 명인 가브리엘 로드리게스. 그는 애써 호흡을 골랐다.
'괜찮다. 아직 기회는 많아.'
이제 첫 출장이다.
그것도 다른 나라, 다른 구장, 다른 환경, 다른 상대.
모든 것이 어색한 이곳에서 저 선수가 시작부터 뛰어난 활약을 보여줄 리는 만무했다.
'그래, 수비는 인정하지.'
수비만은 여태껏 본 것이 있으니 인정할 수밖에.
하지만 배팅만큼은 아니었다.
기본적인 투구 어프로치부터 시작해, 구질의 다양함, 회전수, 공 끝의 더러움까지. 모든 것이 그가 뛰었다는 KBO와는 레벨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1회 초.
로키스의 공격이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고, 1회 말 다저스의 공격 이닝에 해준이 타석에 들어섰을 때.
--------텅!
초구부터 관중석 의자로 떨어져 내린 타구.
'...초구부터 홈런?'
로드리게스의 눈동자가 불안함으로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 미스터 포벅스 in 스프링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