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77화 (77/137)

< 미스터 포벅스 in 스프링 (2) >

77. 미스터 포벅스 in 스프링 (2)

2월 19일.

애리조나 피닉스에 위치한 캐멀백렌치-글렌데일 구장.

투·포수들에 이어 야수들마저 남김없이 합류한 2027년 LA 다저스의 스프링캠프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담거나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몰려든 취재진들과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든 팬들까지.

여기저기서 다저스 스타군단 멤버들의 이름이 연이어 흘러나왔다.

"제이크! 당신을 보려고 투손에서부터 달려왔어요."

"휘유- 빅뱃 드레이븐. 여전히 멋진 덩친데요? 인터뷰 한 번만 합시다."

"해럴드! 해럴드! 보스턴에서 다저스로 넘어온 기분은 어때요?"

다저스 내야의 코어이자 프렌차이즈 스타인 제이크 포드.

메이저리그 11년 차 베테랑으로 화끈한 성격과 함께 폭발적인 장타력으로 유명한 빅뱃 드레이븐 래리.

보스턴의 베테랑 2루수로 오프시즌에 다저스로 트레이드 된 해럴드 재거까지.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선수 중에는 스타가 아닌 이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몇몇 취재진은 선수들에게서 오프시즌 근황, 혹은 올 시즌 다저스의 분위기에 대한 코멘트를 따내러 돌아다니기 바빴다.

"마르쿠스는 여전히 전력분석실에 박혀있다고? 라커룸 취재 허용 시간이 끝나가는데.."

"윌리엄은 벌써 A구장으로 이동했답니다."

"제길! 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더라니."

하지만, 올해 따라 유독 많은 카메라가 한 선수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한 기자가 그 광경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긴 누가 지나가길래 저렇게 북적거려?"

"이 친구야. 그걸 모르고 기자 명찰 달고 당당하게 돌아다니나? 미스터 포벅스(Mr. four bucks)잖아."

"... 미스터 포벅스? 4달라?"

미국 내에서 달라를 뜻하는 bucks.

동료 기자의 질타에 그는 어째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오프시즌 다저스와 8년 4억 2000만 달러라는 빅딜을 성사시키며, MLB의 화제 인물로 떠오른 야수 강해준.

하지만 그에게 붙은 별명은 비스트 같은 것이 아닌 미스터 포벅스였다.

"포스팅 이야기를 아직도 모른단 말이야? 세상에. 자네 어디 화성에서 취재하다 왔나?"

그리고 이어진 비하인드 스토리는 곧 그는 탄성을 터트릴 수 있었다.

"허, 구단을 상대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단 말이야? 보통 배짱이 아닌데."

그리고는 곧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놓칠 수 없지. 훈련 끝나고 인터뷰나 한번 따볼까."

"뭐, 그건 마음대로 하시고. 영어도 유창하고 인터뷰 하기 좋은 선수라더군."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해준의 훈련 모습을 살피던 기자는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 그런데 저 친구. 외야수야 내야수야?"

+++

시즌을 시작하기에 앞서, 프런트가 가장 신경을 쏟아붓는 것은 당연하게도 팀의 로스터를 꾸리는 것이다.

포지션, 선수들의 컨디션, 몸값, 부상 상태, 유망주들의 성장, 시즌이 진행되며 발생할 체력 문제까지.

수많은 변수들과 요소들을 망라하여 짜여지는 로스터.

그런 면에서 LA다저스의 로스터는 명실상부한 스타군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로스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었다.

제2의 A-로드로 불리는 유격수 제이크 포드라던가, 지난해 55홈런을 때려내며 홈런왕을 차지한 3루수 노아 존슨.

빅뱃(Big bat)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타격을 자랑하는 드레이븐 래리와 보스턴의 스타였던 2루수 재럴드 해거까지.

내야진만 살펴봐도 하나같이 화려한 이름들뿐이었으니까.

외야 또한 이에 전혀 밀리지 않았으며, 포수는 그 유명한 명예의 전당급 선수인 마르쿠스 영이 버티고 있는 상황.

투수조는 따로 떨어져 훈련하니 그 위세를 느껴보진 못했지만, 그쪽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그런가... 좀 그렇지 않아요? 처음 볼 때는 몰랐는데, 확실히 그래요."

그리고, 들뜬 모습으로 스프링캠프를 관찰하던 오광녹은 얼마 지나지 않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온도가 다른 것 같지 않아요?"

이번 스프링캠프의 참가자는 총 61명.

평소보다 많은 수의 선수들을 데리고 시작한 LA다저스의 스프링캠프는 여느 해와는 다른 극단적으로 나누어진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광녹이 이번 스프링캠프 명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번 캠프의 참가자는 총 61명. 메이저리그 구단들 중에 가장 많은 선수들을 데려왔어요. 하지만..."

"다른 구단에 비해 사용할 수 있는 로스터의 가용 인원은 더 빡빡하지."

그라운드를 벗어난 해준은 물로 목을 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2월의 애리조나는 햇빛은 강했지만 정작 기온은 10도에서 훨씬 못 미치는 환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의 유니폼은 땀이 듬뿍 배어 있었다.

하지만 25인 로스터에 진입이 확정된 다른 스타 플레이어의 모습은 달랐다.

"마르쿠스나 노아 같은 베테랑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너무 여유롭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메이저리거 특유의 여유가 잔뜩 베인 모습. 물론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었다.

선수마다 자신의 페이스가 있고, 주전급 선수들은 시즌 개막전에만 맞춰서 몸 상태와 감각을 끌어올리면 그뿐이니까.

하지만 해준은 그것보다, 지금의 이 미묘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임으로 치면 고인물들이 넘쳐나서 뉴비가 도저히 진입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느낌?"

오광녹의 비유는 정확했다.

한쪽은 너무 여유롭고, 다른 한쪽은 이미 풀이 죽어있다.

실제로 40인 로스터에라도 이름을 올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어야 할 마이너 선수들조차 눈빛에서 언더독 특유의 힘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번 다저스의 야수진 계획을 살펴보면 내야 6명, 외야 4명, 포수 2명. 하지만 사실상 뚫고 갈 방법이 없는 포화상태나 마찬가지죠. 모두가 이름을 날렸던 스타 플레이어들에 성적도 확실하니까요. 게다가 대부분 트레이드 거부권에 마이너리그 옵션도 없는 선수들이고.. 덕분에 액티브 로스터를 건너뛰고 40인에 이름을 올리는 게 목적이라고 해도... 뭐, 그쪽마저 너무 탄탄해서 변동의 여지는 보이지 않고요."

다저스는 그 넘치는 자금력과 크리스 배그웰의 정확한 안목으로 수많은 선수를 끌어모았다.

하지만, 지금 상태를 보면 그게 너무 과한 듯 보였다.

"뎁스의 변동 가능성이 아예 사라졌으니 그 아래 선수들의 의욕이 날 리가 없지."

이런 광경은 해준으로서도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시즌을 운영하다 보면 부상 선수, 혹은 부진한 선수도 생기기 마련이고, 그 틈을 치고 잡초처럼 새로운 얼굴들이 가능성을 드러내기 마련.

하지만 다저스는 그때마다 유망주보다는 돈으로 그 틈을 메꾸기 바빴고 그 결과가 이 괴물처럼 변해버린 뎁스였다.

그리고, 해준은 그 사실을 지적하는 한 가지 사설이 떠올랐다.

'넘치는 스타, 부족한 허슬인가.'

한 팀의 테마란 베테랑에서 유망주로, 그 유망주가 또 다시 성장해 다시 그 아래의 유망주에게로 이어지는 팀 특유의 DNA와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다저스는 무자비한 자금의 투입으로 그 갈래를 끊어버리고 뎁스를 외부에서 끌어온 스타들로 가득 채워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팀의 DNA 같은 것들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본래 소속 팀에서는 그 팀의 충실한 DNA 일부 중 하나였을 것이 분명한 스타 플레이어들.

그런 그들이 한 자리에 순식간에, 과도하게 모여버리자 기존의 팀 특성이 희석되고 이도 저도 아닌 공기가 자리 잡아버렸다.

그 결과가 제 몸을 아끼며 부상 위험을 줄이고, 안전한 길만을 택해온 선수들의 집합체.

개개인의 성적은 뛰어날지 몰라도 위기의 순간에 한 발자국 더 내디뎌야 하는 상황에조차 이들은 침묵하곤 했다.

다저스의 기존 선수들조차 그 분위기에 잡아먹혀 버린 듯, 신인 시절만 해도 허슬로 유명했던 제이크 포드조차 그들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러니 악바리 샌프란시스코한테 발리고 아무 말도 못 하..... 지."

오광녹은 마침 옆을 지나가던 한 라틴계 선수의 눈치를 보며 말소리를 줄였다.

하지만 해준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크리스 배그웰이 이 광경을 보면 땅을 치겠는걸.'

2021년, 2022년, 2023년, 3년 연속으로 신인왕을 배출하며 화수분 야구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다저스. 그런 곳이 3년도 채 되지 않아 팀의 컬러를 잃어버린 채 단순히 스타들로만 가득한 집단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뭐, 물론 나도 굴러들어온 돌이긴 하지만.'

해준은 고개를 저었다.

스프링캠프에 오기 전 행크 그린으로부터 미리 사전 정보들을 들어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록 초반이지만 이런 분위기라면 보지 않아도 뻔하다. 선수 개개인이 뛰어나니 평소에는 강력함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몰라도, 팀의 끈끈함이 필요해진 순간이 오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려버릴 것이 분명했다.

해준은 마침 B구장 한편에서 야수들의 합동 훈련을 바라보던 감독 릭 베이츠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서 내게 이런 걸 원한 건가?'

재작년, 라이벌 샌프란시스코와의 챔피언십 결전에서 패배하며 감독이었던 넬슨 해리슨이 물러났고, 그 자리를 프런트 출신인 릭 베이츠 감독이 차지했다.

그리고, 그런 그가 해준과의 첫 만남에서 한 말은 간단했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 포지션 연습을 해보라고?'

해준은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

해준이 스프링캠프에 합류한 지 하루 뒤.

단장인 이반과 통화한 릭 베이츠 감독은 해준을 호출했다.

"상부에서는 자네를 유격수로 쓰자더군."

"유격수라면... 제이크와 경쟁하게 되는 겁니까?"

해준은 살짝 놀란 어조로 물었다.

타출장 슬래시라인 341/411/585.

그와 함께 42홈런을 때려낸 대형 유격수로 제2의 A-로드라고 불릴 정도로 전도유망한 선수인 제이크 포드.

그런 그가 순순히 유격수 자리를 양보할 리 없었다.

하지만 릭 베이츠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임시일세. 자네에게만 말하는 것이지만 상부에서는 유격수인 제이크에게 체력 문제로 외야수로의 포지션 변경을 권유하고 있으니. 그때가 된다면 다시 말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 물론 자네 수준의 수비라면 어딜 들어가도 리그 최상위권의 모습을 보여줄 테니 이런 임시 방책을 내린 것이기도 하고."

그 말에 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알아두고 유격수 수비 연습을 하죠."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이 묘했다.

"그건 자네 선택에 달렸네."

"제 선택이라면.."

"유격수를 노릴 수도 있고, 3루수도 괜찮겠지. 좌익수는 어떤가? 모든 포지션에 능하다고 들었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미친 소리나 다름없었다.

포지션의 결정 권한이 당사자인 선수보다는 감독에게 있는 이유는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권위로서 선수들 간에 일어날 포지션 다툼이나 세력 다툼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 하지만 릭 베이츠 감독은 오히려 반대의 말을 꺼내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해준은 릭 베이츠 감독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이용해서 이 팀의 굳어버린 경쟁 구도를 뒤흔들어 보시겠다?'

프런트 출신의 2년 차 감독.

스타플레이어들이 모여있는 이 구단에서 그런 감독이 가지고 있는 권위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사실상 내리는 명령을 듣는 것도 감독의 생각이라기보단 프런트의 지시라 생각하고 따르는 거겠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선수들을 모아놓고 경쟁심이라던가, 허슬 같은 소리를 강요해봤자 귓구멍에 조금도 그 소리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나선다면?

경기 출장이 보장되어있는 자신인 만큼, 해당 포지션을 고집한다면 그 포지션의 선수들은 큰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니, 굳이 그런 의사를 드러낼 필요도 없지. 그냥 연습만 하더라도 충분한 무력시위가 된다.'

해당 포지션의 선수의 몸에 배어있던 여유는 사라질 테고, 주전 자리를 지키기 위해 경쟁심을 불태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루즈하고 널널하게만 느껴지던 지금보다는 훨씬 팀의 분위기가 올라올 것이다.

'애초에 지금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지.'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우승을 위해서 야구를 하러 온 것이지 그저 시간이나 때우다 돌아가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 그럼 구단에 그렇게 보고해주시면 됩니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마음에 드는 포지션 있으면 그 자리를 노려보죠."

계약서의 조항을 이용한 대담한 선전포고.

다저스의 수뇌부에서도 이런 일방적인 통보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에 반쯤은 포기한 심정으로 되지도 않은 소리를 던져봤던 릭 베이츠 감독의 눈동자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 역시 단순한 선수가 아니다.'

KBO를 떠나는 과정이 범상치 않다고 생각해 한 번 운을 띄워봤을 뿐인데, 곧바로 사정을 꿰뚫어 보고 수락한다.

더군다나, 상황 조율하기도 바쁜 자신과는 다르게 이 선수는 판 자체를 뒤엎어버릴 힘이 있었다.

"... 그렇게 보고하지."

릭 베이츠 감독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변 하나 없을 것 같던 LA다저스의 스프링캠프.

그곳에서 작은 이변의 징조가 시작되고 있었다.

< 미스터 포벅스 in 스프링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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