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76화 (76/137)

< 미스터 포벅스 in 스프링 (1) >

76. 미스터 포벅스 in 스프링 (1)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된 후.

그 뒤로 이어진 일정들은 생각보다 타이트했다.

"입단식, 기자회견, 주요 스포츠 매거진 인터뷰, 메디컬 테스트까지.. 굵직한 건 다 끝났고. 아.. 예전에 올스타전에서 얻은 소산 전자 광고는 내년으로 미루기로 했어요. 같이 출연하기로 한 여배우 쪽이랑 문제가 생겼다나 봐요. 우리야 좋죠. 안그래도 바빴는데. 에.. 그리고. 프로필 사진 촬영! 이건 나중에 하겠고.."

오광녹이 열심히 재잘거렸다.

그의 손에는 수많은 일정들이 빼곡히 적힌 수첩이 들려있었는데, 잠시 사이에도 통화를 한 번 거치고 나면 수많은 일정들이 새롭게 추가되고 수정되기를 반복했다.

"다저스에서 주최하는 소아암 어린이를 위한 자선 모금회가 있대요. 이것도 참석해야 하니까 다른 스케줄 미루고.."

해준은 그 모습을 보며 한 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오프시즌의 야구 선수가 이렇게 바쁘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작년까지는 별다른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수비 특화형 1군 선수. 올해는 모두의 관심을 받으며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명실상부한 KBO 최고의 타자.

그 느낌의 간격은 생각보다 컸다.

웬만한 일에는 무덤덤한 해준조차 적응하는 것에 시간이 걸렸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올해만 지나면 나아지겠지.'

비자를 매년 갱신해야 하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집을 구하거나 새 은행 계좌를 트는 등 번거로운 일들은 이미 끝마쳤다.

최근에는 뉴비치포트 인근에 위치한 그린 코퍼레이션의 운동시설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는 상황.

그곳에서 해준은 구단과 회사 측에서 보내준 트레이너들과 개인훈련에 한창이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자세하게 들어볼 수 있었다.

"속근섬유의 발달 정도가 동양인이라고 보기엔 어려운데요..? 오! 오해하시지는 마세요. 인종 차별이 아니니까. 인종 간 격차가 있는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올림픽만 봐도 알잖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올림픽 메달리스트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예요."

"보통 프로에서 5년 이상 활동한 선수들은 신체에서 삐걱거리는 부분이 한 곳쯤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미스터 강은... 마치 운동을 아예 해오지 않은 사람 같아요. 아, 근육이 아니라 관절 부위만 살핀다면 말입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근육의 피로도 회복 속도가 상상 이상인데요...? 뭐야, 이게. 저 혹시 약물 검사해봐도 돼요? 아,하하. 농담입니다. 정말 그랬다간 잘려도 할 말 없죠."

"인대의 탄력성이 미친 수준입니다. 관절의 유연성도 그렇고. 근골의 구조 또한 운동선수 중 상위 1% 안에 드는 수준이죠. 이 정도라면 펜스에 정면으로 몸을 부딪쳐도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 아, 그렇다고 정말 시도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 아웃라이어들과의 링크, 특수모듈과의 결합.

워낙 점진적으로 일어난 탓에 스스로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몸 상태는 이미 상식을 벗어난 수준으로 탈바꿈해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어진 운동신경 및 기초 운동능력 테스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전트 점프나 100미터 달리기부터.

런닝 후 체력 회복 속도, 전체적인 근력의 회복 속도까지.

전체적으로 해준의 신체 능력을 체크 해 본 트레이너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 NFL 가보실 생각은?"

"당신 혹시 올림픽 나갈 생각 없어요?"

"what the... 지금까지 그 점프력을 가지고 야구를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지금이라도 미식축구로 전향합시다. 근력이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거야 키우면 되는 거고. 순발력, 방향 전환 능력, 힘을 흘리는 센스, 전략을 파악하는 머리까지. 모든 게 완벽합니다."

"... 음. 제가 봐 드릴 부분은 없는 것 같군요. 모든 면에서 천부적입니다. 무언가를 새로 익히기보다는 타고난 센스를 이용하고 유지하는 연습만 해도 될 정도예요."

이 분야에서 이름난 트레이너들조차 혀를 내두르기 바빴다.

손을 봐야 하는 부분?

단 한 군데도 찾아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스스로가 유명 선수, 혹은 구단과 친분이 있다며 반장난 삼아 다른 종목의 전향으로 은근히 권유하는 빈도만 늘어났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살짝 진지해진 것 같지만.'

해준으로서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야구 말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 이런 말들도 계속해서 듣다 보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잘 생각해보면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진 않았으니까.

'... 색다른 아웃라이어라도 만나면 모르지.'

오래전의 일이라도, 분명 미식축구와 야구, 혹은 농구와 야구를 겸업했던 선수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두 분야 모두에서 올스타전을 뛴 희귀한 케이스조차 존재했었으니.

'한 번 찾아가 봐..?'

해준이 그런 엉뚱한 생각에 빠져있을 때쯤, 오광녹이 전화를 끊었다.

"휴으, 죽겠네. 어쩔 땐 전력분석원 시절이 그립다니까요."

그 말에 해준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돌아갈래?"

"..... 형. 아니, 형님. 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지금 돌아가면 이운요 사장이 저 죽이려 들걸요?"

물론 오광녹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희대의 뒷통수 사건으로 불리는, KBO는 물론이고 해외 스포츠 언론들마저 뜨겁게 달궜던 4달러 이적 사건.

그 뒤로 언론에 비친 이운요 사장의 모습은 악귀나 다름없었다.

"그 사람이 출국금지 안 당했으면 형이나 저나 이미 이 세상 사람 아닐걸요? 그냥, 끽-"

오광녹이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프로야구구단의 구단주이자 사장에서, 이제는 범죄자 직전까지 몰려버린 이운요 사장.

그 드라마틱한 사건에 해외 스포츠 언론들마저 특집 기사를 냈을 정도였으니까.

당연히 국내 기자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검찰, 법원, 세오레즈 주주들 등 관계자들 사이를 배회하다, 조금이라도 새로운 소식이 뜨면 곧바로 기사로 써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런 날에는.

-4달라!!!

-4딸라!!!!!!

-통장에 4달라 밖에 없습니다! 이번엔 진짜입니다!

-저도 4달라 있는데 강해준 살 수 있나요?

-여기가 4달라면 KBO 전설급 선수 준다는 곳인가요?

-4달라 맨 빼애애ㅐㅐ앰!

-땡큐!

-4달라!

이를 조롱하기 위해 네티즌들이 찾아와 4달라가 포함된 댓글들로 도배를 해놓고 사라지곤 했다.

선수들에게 갑질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던 구단이 정작 가장 믿었던 선수에게 제대로 뒷통수를 맞아버린 상황.

이 통쾌한 권선징악의 사태는 당연하게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오레즈 측은 즉각 이번 계약은 무효이며 고소하겠다는 엄포를 놓았지만, 사실 별 상관은 없었다.

MLB에서 이번 계약을 인정했고, 미 대사관에서조차 별다른 문제 없이 취업비자가 발급됐으니까.

더군다나, 그런 분위기에 쐐기타를 가하듯.

[선수협, 대규모 자금 수급?]

[LA다저스, 2,000만 달러 송금 사실 확인해줄 수 없다.]

[200억 자금을 등에 업은 선수협. 강해준의 물밑지원으로 추정.]

[선수협, 전관 출신 변호사 선임? 세오레즈 이운요 사장 및 기타 관계자들 모두 고소 진행 중.]

[커지는 선수협 고소 사태, 9개 구단까지 급속히 확산!]

[최악의 경우 파업까지... 그럼에도 불구, 야구팬 91.5% 선수협 응원 및 지지]

선수협의 법정 다툼에 쓰일 자금 지원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당연하게도 세오레즈 측은 실제로 해준을 고소할 여유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한테 신경 쓸 겨를도 없겠지. 이운요 사장 같은 경우는 곧 있으면 잡혀갈 수도 있다는데."

해준은 그 말을 하면서도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때는 정말 높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야구를 하는데 훼방을 놓아 들이박고 보니 정말로 그 사람의 인생을 반쯤 끝내버렸으니까.

짝-!

그때, 한쪽에서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행크 그린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 이제 한국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돈까지 빌려줬으면 그쪽 일은 그쪽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 맞는 법이고. 우리는 이쪽 일에 신경 씁시다."

그 말에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었던 것 같던 스프링캠프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몸은 만족할 만큼 만들어졌고, 기술 훈련도 순항 궤도를 타고 있는 만큼 이제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에 적응할 준비를 해야 했다.

"먼저 여러 클라이언트나 관계자들을 통해 파악한 LA다저스 내의 분위기를 말해주겠소. 가장 먼저..."

해준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하자, 그에 만족하듯 미소를 띄어보인 행크 그린.

그의 입에서 LA다저스의 내부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LA다저스 스타디움.

지구 우승 20회, 리그 우승 24회, 월드시리즈 우승 7회를 거둔 명실상부한 서부 유명 명문구단.

그곳의 모든 전반적인 일(구단 운영, 마켓팅, 회계, 구장 운영 등)을 총괄하는 단장 이반 브루스는 눈앞의 스프링캠프 명단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기존의 25인 로스터에 들어갈 주전 선수들.

미래를 보고 스프링캠프를 경험시켜야 할 10명가량의 유망주.

혹시나 터질까 싶어 초청 자격을 내준 20명의 로또픽들까지.

이 리스트를 완성하기 위해 각 레벨의 마이너 팀에서 올라온 수 천장의 보고서와 수많은 수치 해석, 재정 상태, 팀의 분위기와 그로 인한 시너지 효과까지 고려됐고, 당연하게도 그 결과는 최상급이었다.

다른 팀의 단장들이 본다면 이게 무슨 복에 겨운 로스터냐며 항의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반은 여전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테이블 위에는 이번 오프시즌에 받은 혹독한 언론의 평가지들이 올라가 있었다.

『LA다저스 오프시즌 평가』

[2026년 성적]

95승 68패 승률 0.715

내셔널리그 서부리그 1위

디비전시리즈 1승 3패, 포스트시즌 마감.

[오프시즌 보강 등급]

B-

[주목할 만한 영입]

*타자

2루수, 재거 해럴드 *연봉 1,800만 달러(전 보스턴 레드삭스)

(타율 0.241 출루율 0.279 장타율 0.488 OPS 0.767)

멀티 유틸리티, 해준, 강 *연봉 5,400만 달러(?)(전 서울 세오레즈)

(KBO 출신, 타율 0.250 출루율 0.404 장타율 0.557 OPS 0.961)

좌익수, 조시 게일 *연봉 490만 달러(전 탬파베이 레이스)

(타율 0.276 출루율 0.311 장타율 0.461 OPS 0.772)

*투수

아담 리베로(전 시카고 화이트삭스)

(51경기 2승 7패 20홀드 63.4이닝 59탈삼진 ERA 4.31)

프레디 호킨스(전 애리조나 디백스)

(68경기 3승 3패 22세이브 67.1이닝 68탈삼진 ERA 3.91)

루크 가버(전 뉴욕 메츠)

(17경기 5승 6패 1홀드 75.1이닝 53탈삼진 ERA 3.28)

[평가]

내셔널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선발진, 수호신과 다름없는 마무리, 스타 플레이어들로 득실거리는 타선까지.

그럼에도 로스터는 화려해 보이기만 할 뿐, 개혁점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선발진의 강력한 땅볼 유도 능력을 살리지 못하는 내야진은 여전하며, 불안한 불펜에서는 이적 시장에서 6,000만 달러를 쏟아붓고도 B급 선수들의 방출과 영입을 반복했을 뿐, 조금의 보강도 이루어졌다 볼 수 없다.

또한...

(.......... 중략...)

........ 안한 내야진을 다잡기 위해 보스턴에서 베테랑 2루수 재거 해럴드와 KBO의 Kang을 영입했지만 이들의 능력은 미지수인 상태.

특히나 옵션으로 가득 찬 Kang의 계약서를 본다면, 다저스 프런트는 한인 마켓팅에만 신경 쓸 뿐 정작 이 선수를 신뢰하고 있는지조차 의문.

2027년의 다저스는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그 여전하다는 것은 이전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다는 말이며, 팬들에게 있어서 가을 야구 우승 가능성은 올해도 희박하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Tony Jaffe

"으음.."

이반의 신음성이 이어졌다.

전교 50등이 어느 날 3등을 한다면 그것은 축하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전교 3등이 매일 3등만 한다면 돌아오는 것은 칭찬보다는 왜 더 올라가지 못했냐는 질책뿐이었다.

더군다나, 그 전교 3등을 위해 수많은 자금을 쏟아부었다면 왜 1등을 하지 못했냐는 비아냥까지 뒤따른다.

당연히 이반으로서는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지난 5년간, 평균 페이롤 순위 MLB 전체 2위.

지구 우승은 당연했지만, 리그 우승은 2회뿐이며 월드시리즈의 우승컵은 단 한 번도 들어 올리지 못했다.

그에 반해 라이벌 샌프란시스코는 이미 한 번의 우승컵을 들어 올린 상황. 그것도 재작년 다저스에게 7차전 끝내기라는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하며 LA 전역을 절망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야 말았다.

5년째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 중이었지만, 그 사실은 2년이 지난 아직까지 이반의 속을 시리게 만들고 있었다.

이반은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로스터를 살폈다.

"... 희망은 역시 이 선수뿐인가."

크리스 배그웰이 보내온 영상을 본 순간.

이반이 유레카를 외쳤다는 사실은 다저스 프런트 내부에서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강력한 선발진, 마무리, 타선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포스트시즌에서 미끄러지는 다저스의 약점.

바로 중요한 순간마다 터져나왔던 수비의 구멍.

그리고 그 수비를 보강해줄 최적의 조각.

크리스 배그웰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 다저스를 구원해줄 유일하면서도 최후의 마스터피스.

"내외야를 가리지 않는 최상급 유틸리티라.."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긴 고민이 이어졌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득실거리는 다저스의 내야진과 외야진.

이미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포화 상태와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디든지 들어갈 수 있단 말이지.."

곧 생각을 굳힌 이반이 수화기를 들었다.

"아, 릭. 날세. 이반. 내야진 포지션에 자리 좀 만들 예정이야. 기존에 작성된 스프링캠프 명단에서...."

다저스의 스프링캠프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미스터 포벅스 in 스프링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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