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배드볼히터 (5)
"닉 스윈스키는 노련한 사냥꾼이지."
파이어리츠 스카우트 존 배쉬.
그는 닉 스윈스키를 사냥꾼에 비유했다.
"언제나 이중삼중으로 덫을 놓거든. 도망가고 도망가다 보면, 결국 그곳도 그가 의도한 함정인 경우가 비일비재해."
피네스 피쳐로서 메이저리그의 강타자들을 상대해온 닉 스윈스키. 그가 뛰어난 심리전의 대가라는 것은 결코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다저스의 국제스카우트 크리스 배그웰은 그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려보면 사방이 그가 쳐놓은 트랩뿐이라고들 하죠."
뛰어난 볼 컨트롤 능력과 같은 변화구라도 조금씩 궤적을 달리하는 손 감각. 다른 투수들이 꿈에서라도 가지고 싶어 하는 이 능력은 닉 스윈스키에게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냥감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몰아넣기 위한 도구.
크리스 배그웰의 말에 존 배쉬가 검지로 머리를 툭툭 쳐보였다.
"그는 사냥감이 어디로 도망갈지, 무엇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언제 이빨을 드러내는지. 그 모든 걸 꿰뚫고 적절하게 대응하니까. 투수는 결국 머리로 완성된다는 걸 보여주는 선수지."
그리고, 사냥감들은 뛰어난 사냥꾼의 몸에 베인 무수한 혈향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기 마련이다.
이미 수많은 동족들을 사냥해왔다는 증거니까.
"지금 세오레즈 타자들이 보여줬던 모습이 그것과 다름없었지. 하지만 역시.. 미스터 강은 많이 다르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존 배쉬는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기대는 했지만,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던 장면.
따악-!
"파울!"
다시 한번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10구째, 홈플레이트 바깥 영역을 공략하는 백도어성 슬라이더가 이번에는 포수 뒤 그물망을 강타한 것.
카운트는 3-2.
사냥감을 함정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한 사냥꾼 닉 스윈스키.
그가 조금씩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고 있었다.
"사냥꾼을 사냥하는 야수라.."
의미심장의 의미를 담은 존 배쉬의 중얼거림. 크리스 배그웰이 회색빛 홍채가 그 어느 때보다 깊어졌다.
"상대를 몰아넣은 쪽은 사냥꾼이 아니었군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루어진 기세의 역전.
어느새 경기장이 술렁이고 있었다.
+++
"후욱."
3회 초 1사.
경기의 흐름을 한 손에 잡아 쥐고 뒤흔들던 닉 스윈스키에게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잘못 생각했군.'
어느새 10구를 넘어서고 있는 승부.
먹잇감을 사냥한다는 생각으로 승부에 임했던 닉 스윈스키였지만, 결국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던져도, 카운트를 몰아넣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전까지의 타자들과는 달랐다.
타이밍을 흐트러트리고, 타자의 머릿속에 강한 잔상을 남긴다.
그 뒤, 허를 찌르는 투구로 헛스윙, 혹은 루킹삼진을 끌어내던 닉 스윈스키.
하지만 정작,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몰린 것은 자신이었다.
'내 영역이 사라졌다.'
스트라이크존 주변을 농락하듯 넘나들던 영역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넓어진 해준의 스윙 궤적이 그 모든 곳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슬라이더, 체인지업, 스플리터, 그리고 포심.
예상치 못한 타이밍, 허를 찌르는 코스로 넣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 같은 배트 컨트롤이 그 모든 곳을 커버한다.
그리고, 그때가 되서야 닉 스윈스키는 상대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부터 느껴지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보로디미르. 그 친구와 닮았어.'
타격 괴물 보로디미르 알비노 바르가스.
이대로 성장한다면 괴수 게레로와 비견되는 재능이라 칭송받던 워싱턴의 기대주.
닉 스윈스키는 얼굴도, 체격도, 분위기조차 닮지 않은 해준에게서 그와 같은 격의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단순히 상대 타자가 파울을 많이 쳐내는 데 성공해서?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다.'
닉 스윈스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더욱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것.
보로디미르가 MLB에서 활약하고 있을 당시, 투수들이 입을 모아 말하던 그 느낌.
'압박감.'
어디로 던져도 쳐낼 것 같다는 그 심리적 압박감이 해준에게서 전해지고 있었다.
'그냥 배드볼히터라고 해서 이런 느낌이 오지는 않지.'
같은 배드볼히터들이라도 그 수준에는 격차가 있는 법이다.
바깥쪽 아랫부분만 잘 치는 선수, 하이패스트볼 영역에만 휘두르거나, 몸쪽 깊숙한 코스에만 강한 유형까지.
하지만 해준의 스윙 궤적은 그 전방위적인 모든 코스를 무리 없이 커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무게 중심이 잘 잡힌 상태로 공을 베어버릴 듯 휘둘러지는 날카로운 타격.
이제는 조금만 삐끗한다면 안타를 허용할 것이 분명하다.
"후우.."
답답함이 섞인 숨을 내뱉은 닉 스윈스키.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제부터는 저 강해준이라는 타자를 보로디미르와 같은 수준으로 봐야겠지.'
어떤 공을 던져도 답이 나오지 않은 상황.
닉 스윈스키는 자연스럽게 보로디미르와의 마지막 승부를 떠올렸다.
'내가 그때 어떻게 했더라?'
어마어마했던 컨택 수준에 비해, 파워가 매우 부족했던 보로디미르. MLB 2년 통산 타율 0.363 출루율 0.399 장타율 0.403이라는 괴랄한 슬래시라인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것을 떠올린 닉 스윈스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그렇기에 배트를 피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무브먼트에 초점을 맞춰 공을 때려 박았던 것이 기억났다.
보로디미르가 무서웠던 점은 주자가 있을 때 발휘되는 그 컨택 능력이었지, 장타력이 아니었으니까.
고민을 마친 닉 스윈스키가 투구판을 밟았다.
'어차피 삼진 예고를 한 이상, 더는 도망 다닐 수도 없다.'
물론 해준과 보로디미르는 같은 선수가 아니다. 해준에게는 보로디미르에게는 없는 장타력이 있으니까.
하지만 닉 스윈스키는 이 이상 고민을 이어가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수많은 구종, 그에서 나뉘는 구질, 코스, 타이밍.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것들이 타자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을 것이 분명한 상황.
'아무리 강타자라도 이 상황에서는.'
날카로운 변화구에 좋은 반응을 보이기 힘들었다.
생각을 마친 닉 스윈스키가 있는 힘껏 발을 박찼다.
파앗-!
"흐읍!"
지금 이 순간, 그의 선택은 무브먼트만을 강조한 스플리터.
그 이유는 간단했다. KBO 공인구 특유의 두텁고 높은 실밥이 만들어내는 횡적 무브먼트가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손을 떠난 궤적이 홈플레이트 바깥에서 안쪽으로 휘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 이런.'
닉 스윈스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손에서 공을 놓는 순간, 타석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세.
'너무 과소평가했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어마어마한 스윙 궤적을 뿜어내고 있는 해준에게는.
따아아아아악-!
보로디미르에게는 없던 파워, 더불어 상대의 의도를 꿰뚫어 보는 눈이 있었다.
3회 초 1사.
[우측! 이건 높습니다! 닉 스윈스키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습니다. 확실합니다! 강해준 선수가 메이저리그 100승 투수 닉 스윈스키로부터 대형 홈런을 뽑아냅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닉 스윈스키가 경기 초반부터 실점을 허용했다.
+++
"허헛, 이것 참. 빅 플라이라니."
"이것으로 검증됐군."
"메이저리거를 상대로도 압도적인 모습..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그냥 메이저리거인가? 100승 투수 닉 스윈스키야. 그것도 폼을 보면 전성기 시절에 가까운 닉이라고."
순식간에 담장 너머로 사라진 해준의 홈런포.
그 모습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마저 감탄을 터트린 채였다.
전성기 시절 피홈런률이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도록 낮았던 닉 스윈스키. 그런 그가 악명 높던 삼진 예고까지 선언한 상황.
그 순간 터져 나온 홈런포였으니까.
무엇보다도 스카우트들의 시선을 모았던 점은.
"저 배트 컨트롤. 보로디미르가 떠오르지 않아?"
"파워까지 본다면 게레로지. 순수한 로파워에서는 밀릴지 몰라도, 실질적인 게임 파워에서는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는데."
"파워에 컨택까지 합쳐졌다면 무결점 타자 이스마엘이지. 미스터 강은 제2의 이스마엘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있다고."
MLB의 전설적인 타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해준의 배트 컨트롤.
"물론 이전에도 타격 정확성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긴 했지. 하지만 그때는 뭐랄까.."
전광판에서 리플레이 되는 해준의 스윙을 다시 체크한 스카우트가 말했다.
"한 지점을 정해놓고 받쳐 휘두른다는 느낌이 강했어."
그 말에 다른 스카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 싸움의 우위에서 오는 압도적이면서도, 깔끔한 스윙이었지."
백한타 시절의 6년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데이터를 파고들었고 활용하는 방법을 익혔던 해준. 그것이 아웃라이어들의 재능과 만나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며 지금의 괴물 같은 성적을 기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로디미르라는 규격 외의 재능과 만난 지금.
해준은 또 다른 영역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옆에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스카우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뭐, 지금은 그냥.. 영역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폭격해버리는 폭격기가 떠오를 정도야."
수준 높은 투수들에게서 볼 수 있는 보더라인 피칭. 해준은 그것을 압도적으로 박살 내버리는 힘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기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은 아쉬움을 토해냈다.
"아쉽군."
"아쉽지. 아쉬워. 내년은 돼야 저 괴물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텐데 말이야."
"그전까지 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배트 컨트롤은 보기 힘들 거야."
"이 리그가 결국 저 선수의 모든 것을 담아내지 못하는군."
KBO라는 리그가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거대해져 버린 해준의 재능. 소속 리그의 한계를 넘어선 재능은 그 모습을 드러내기에 환경이 너무나 제한적이었으니까.
보더라인을 넘나드는 커맨드를 자랑하는 닉 스윈스키.
그와의 치열한 공방전에서나 극명하게 그 재능이 드러났을 뿐, 수준 있는 투수의 수가 극도로 적은 이 나라에서는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재능이 아니었다.
"저 배트 컨트롤은 보더라인 위를 타고 노는 로케이션을 형성 할 수 있는 투수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재능이야. 그런데 이 나라에 그런 투수가 있긴 하나?"
이곳의 투수들은 스트라이크존에 밀어넣기도 바쁘니.. 저 모습이 빛나는 장면은 보기 힘들겠지.
"있기야 있겠지. 하지만 그런 투수가 얼마나 되겠나?"
스카우트라는 직책을 벗어나, 잠시 한 명의 야구팬으로서.
위대한 재능이 아직은 작은 우물에 갇혀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스카우트들.
그렇기에 그들은 그 뒤로 이어진 해준의 타석 하나하나를 눈에 새겨버릴 듯한 기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늘 경기가 미스터 강의 레벨이 가장 잘 드러난 경기겠지.'
'이 이상 저 선수의 재능이 드러날 판은 없어. 숨소리 하나까지 캐치한다.'
'다른 경기는 볼 필요가 없다. 메이저리그 수준의 공방에서 드러나는 재능. 이 순간이 가장 큰 참고가 될거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닉 스윈스키가 더 버텨줘야 할텐데.'
어느새 이상한 방향으로 닉 스윈스키를 응원하기 시작한 스카우트들. 그리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스트라이크- 아웃!"
닉 스윈스키는 홈런을 허용한 뒤에도 흔들림 없는 모습을 유지했다. 4회에 안타를 허용하긴 했지만, 병살을 유도하며 무실점.
"Come on-!"
5회마저 삼진 하나를 곁들인 삼자범퇴로 다시 기세를 올리는 닉 스윈스키.
하지만.
[특수모듈 '스택형 타구속도Type-Stack Exit Speed'가 적용 중입니다.]
-현재 누적된 타구 속도 스택
*첫 번째 타석: 1%
*두 번째 타석: 4%
[특수모듈 '철인The Iron Man' 타격 파트가 적용 중입니다.]
-현재 종합 피로도: 21.9%
*타격 사이클이 절정에 다다랐습니다.
*타구 속도가 상승합니다.
*발사 각도가 상승합니다.
특수모듈의 조합으로 그보다 더한 기세를 타버린 해준을 막기란 불가능했다.
슈우욱-!
칼날과 같은 예리함으로, 바깥족 보더라인을 타고 들어가는 닉 스윈스키의 백도어성 슬라이더. 해준의 배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따아아악-!
이 공마저 잡아먹어 버렸다.
[이건 큽니다! 갑니까! 갑니까! 이건....]
그렇게 8월 29일.
가을야구를 한 달 남긴 이날.
[갔습니다! 강해준 선수! 그가 레나프의 비밀 병기, 메이저리그 100승 투수 닉 스윈스키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합니다!]
[HOMRUN!]
[타구질 분류 HARD 판명]
[속도........]
[.........]
[특수 모듈 '철인The Iron man'의 타격 파트가 발동합니다.]
[타격 수치를 계산합니다.]
[피로도가 1.1% 감소합니다.]
-현재 종합 피로도: 21.0% -> 19.9%
[타격 연동 구간(피로도 20% ↑) 탈출!]
[타격 사이클 폭주 구간(피로도 10% ↑)에 진입합니다.]
[앞으로는 특수 모듈 '철인The Iron man'의 타격 사이클 폭주 구간이 발동합니다.]
[더는 피로도가 감소하지 않습니다.]
[피로도 누적 속도가 수비 연동 구간인 60%에 이를 때까지 증가합니다.]
전설과 같았던 9월의 폭주가 시작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패넌트레이스 1위 서울 세오레즈, 2026년 정규시즌 우승!]
[아직도 믿기 힘든 괴물 강해준의 9월 활약 다시보기]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스카우트가 한 구장에? 믿기 힘든 진풍경에 해외 언론까지 취재 발길 이어져.]
[한국 야구의 전설 강해준의 마지막 시리즈. 한국시리즈 예매 사이트 마비. KBO의 행복한 비명!]
가을야구가 찾아왔다.
< 배드볼히터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