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66화 (66/137)

66. 배드볼히터 (4)

9월 30일의 워싱턴 D.C.

네이비 야드 앞 아나코스티아 강 주변.

워싱턴 내셔널즈의 홈구장인 내셔널스 파크가 위치한 이곳은 2023년 워싱턴 내셔널즈의 마지막 홈 경기가 치뤄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해준이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저문 상태였다.

눈을 부시게 만드는 전광판, 웅성거리는 관중들의 목소리, 9월 말 저녁 워싱턴 특유의 선선한 날씨.

하지만 그라운드에 돌고 있는 열기는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9회 말 2사, 주자는 만루.

[Indians 2 : 1 Nationals]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1점 차로 리드 하고 있는 상황.

팽팽하게 당겨진 내야의 분위기가 해준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툭-

해준은 흐트러진 헬맷을 한 차례 건드려 제대로 시야를 확보했다. 그리고는 경기장을 한 차례 쭉 돌아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메이저리그 데뷔 타석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루어질 줄이야.'

그동안 그 재능에 비해 확실한 단점, 환경에 의해 마이너리그 혹은 일본프로야구에서 등장했던 아웃라이어들.

하지만 이번 재능의 주인만큼은 그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전 아웃라이어들에 비해, 전 세계 야구팬들이 모두 알고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

'더 히팅 프릭The Hitting Freak.'

타격 괴물 보로디미르 알비노 바르가스.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단명만 하지 않았다면, 대약물시대를 풍미했던 괴수 블라디미르 게레로를 뛰어넘을 것이라 기대를 모으던 아웃라이어.

'이런 선수가 70점.. PP급이라.'

해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시대를 대표했지만, 너무나 짧게 불타올랐던 선수. 전설들의 영역에는 결국 입성하지 못했기에 나온 평가였다.

그리고, 해준은 지금 그의 몸에 들어온 상태였다.

띠링-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아웃라이어(Outlier) '더 히팅 프릭The Hitting Freak']

-보로디미르 알비노 바르가스

[소속]

-워싱턴 내셔널즈

[특이사항]

-2021년 Triple A 4할 타자.

-MLB AL 2022년 신인왕.

-MLB AL 2년(2022,2023) 연속 타격왕

-좌투우타

-심장 박동 이상

[아웃라이어 업적]

-O-Swing 59.8%

-O-Contact 81.1%

하지만 해준은 그 내용을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니까.

'2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타격왕.'

그것도 같은 리그 타격 2위 이스마엘이 기록한 0.311을 훨씬 앞선 0.383의 타율.

심지어 이 시즌에 MLB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안타를 기록한 이치로의 262안타를 갱신해버린 괴물.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 선수의 진정한 무서움을 설명할 수 없었다.

-O-Swing 59.8%

-O-Contact 81.1%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는 공에 휘두를 확률인 O-Swing이 59.8%.

휘둘러서 타격에 성공할 확률인 O-Contact이 81.1%.

그에 반해 MLB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드볼히터 블라디미르 게레로의 O-Swing은 38.9%, O-Contact은 66.7%.

이는 실로 무시무시한 수치였다.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는 공을 던져도 일단 휘두른다면 80%가 넘는 확률로 배트에 공이 맞는다는 소리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이 선수는 파워가 부족했지만 말이야.'

실제로 몸 자체에서 느껴지는 힘은 그렇게 크지 않다. 심지어 팔이 게레로만큼 긴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보로디미르가 타격 괴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간단했다.

'말 그대로 괴물 같은 배팅 센스.'

보로디미르는 스트라이크존을 벗어나는 공들을 공략하며 무너지는 무게 중심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역대 최고 수준의 선수였다.

그렇게 무리하게 공략한다 해도 어떻게든 배트 중심에 공을 맞춰 안타를 뽑아내고야 마는 능력.

그런 괴물을 만루에서 상대하는 만큼, 마운드의 투수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고보니..'

그리고, 그제야 해준은 마운드 위의 투수가 눈에 익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190cm의 신장,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푸른 눈동자, 키에 어울리는 덩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네스 피쳐로서 한때 메이저리그를 호령했던 투수.

입고 있는 유니폼은 달라도.

'닉 스윈스키?'

그가 확실했다.

'그렇다면 여기는..'

그리고, 해준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이곳의 분위기를 이제야 완전히 이해했다.

'닉 스윈스키의 100승 달성 경기!'

121구를 던지면서 9이닝 5K 1실점 무자책 완투승을 기록한 닉 스윈스키가 100승 투수 반열에 이름을 올린 날.

스르륵-

그 순간, 기존의 메시지가 사라지며 떠오르는 홀로그램.

[퀘스트 링크 가이드]

*퀘스트 링크를 클리어할 시 보상이 주어집니다.

*목표

-안타 기록 하기

*보상

-최초 안타 공략 시, 더 히팅 프릭의 배팅 센스 획득

-그 이후, 배팅 센스 등급 상승

-최대 PP급까지 상승 가능.

퀘스트 내용을 살핀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안타를 치라 이거지.'

최초 공략 시, 보로디미르의 괴물 같은 배팅 감각을 획득.

그 이후에는 최대 70점인 PP급까지 상승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상대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문 100승 투수. 그것도 전성기를 풍미하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이거 생각보다 쉽겠는걸.'

경기에 나서기 전 해준이 참고한 닉 스윈스키의 분석 영상은.

'다 기억나거든.'

닉 스윈스키의 100승 달성 영상이었다.

그리고 곧.

따아아악-!

보로디미르의 감각으로 무장한 채, 날카롭게 휘둘러진 해준의 방망이가 경쾌한 파열음을 뿜어냈다.

[퀘스트 달성에 성공하셨습니다.]

[더 히팅 프릭, 보로디미르 알비노 바르가스의 배팅 센스를 획득하셨습니다.]

[상태창에 어택 존Attack Zone이 추가됩니다.]

+++

1회 초, 해준에게 안타를 허용한 뒤.

닉 스윈스키의 투구는 그야말로 전성기 시절의 풍미를 조금씩 풍기고 있었다.

퍼엉-!

"스트라이크- 아웃!"

예리한 보더라인 피칭으로 루킹삼진을 뽑아내는가 싶더니.

따악-!

[빗맞았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는 이완석 선수! 닉 스윈스키 선수가 한창 타격감이 뜨거운 이완석 선수를 유격수 땅볼로 처리합니다.]

기다리지 않고 휘두르면 땅볼을 양산시켜버린다.

이완석이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와, 환장하겠네. 뭐야 저 인간. 타이밍도 못 잡겠고, 치려고 싶으면 볼이고. 또 안치려면 스트라이크야. 피칭 감각이 미친 수준이잖아."

포심, 슬라이더, 체인지업, 스플리터.

이 4구종을 스트라이크존 양쪽 모서리에 자유자재로 집어넣다 빼버리는 커맨드. 게다가 터널링도 깊어 방망이를 휘두른 뒤에야 그 궤적이 파악되는 괴랄함에 이완석 뿐만 아니라 세오레즈 타자들 모두가 치를 떨고 있었다.

"구속은 그렇게 빠르지 않은데요.."

삼진을 당한 조병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뻐엉-!

[145.1km/h]

실제로 닉 스윈스키는 1회 초 149km/h를 마크한 뒤로 단 한 번도 그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구속보다는 날카로운 커맨드, 터널링, 예리한 변화구 각을 앞세워 보더라인을 농락하는 스타일.

"구속만 빠르지 않다뿐이지, 투구 레벨이 이미 차원이 다르잖아."

하지만 이완석은 이건 불공평한 게임이라는 듯 툴툴거렸다. 저런 수준의 투수가 KBO에 와서 던지는 것 자체가 반칙이었으니까.

그 모습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 또한 눈빛을 빛냈다.

'1회 초, 미스터 강을 상대로 나온 실투성 스플리터 이후 모든 공의 커맨드가 완벽하다.'

'전력 피칭도 아니야. 타이밍과 궤적만으로 상대 타자들을 농락하고 있어. 이정도면 구속만 조금 내려왔다뿐이지 전성기 시절의 피칭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흔들리는가 싶던 스플리터도 제자리를 찾았다. 오히려 횡무브먼트가 살아나서 메이저리그 시절보다 까다롭다고 봐도 돼.'

완숙한 피칭으로 타자들을 농락하는 닉 스윈스키.

지금 상태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10승 이상은 올려줄 것 같은 모습에 스카우트들의 관심이 깊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흐름을 가져가며 게임을 지배하는 닉 스윈스키.

퍼엉-!

"볼, 베이스 온 볼스!"

하지만 그런 그도 출루를 허용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잡아주지 않기 시작하는 구심의 콜.

그 덕에 볼넷을 허용한 닉 스윈스키였지만,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스카우트들 앞에서 자국 타자들 망신을 줄순 없다 이거지.'

이런 텃세정도야 이해한다.

메이저리그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 따라줬을 때 먹히는 이야기였다. 확신에 찬 그가 다시 투구판을 박찼다.

'뭣!'

그 모습에 노심초사 볼넷이 나오길 기다리던 조진용 자신도 모르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150.1km/h]

갑작스럽게 올라간 구속.

결과는 닉 스윈스키의 구위에 밀린 2루수 땅볼.

"Come on-!"

오히려, 더욱 해보라는 듯 기합을 외치며 마운드를 내려가는 닉 스윈스키. 야구장 한편에서 그 모습을 보던 레나프의 김태문 단장은 만족스러운, 아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짝짝짝-!

"좋아! 아주 좋아!"

메이저리그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닉 스윈스키.

이대로만 가면 이번 영입은 대성공이나 마찬가지.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면 이 투수에 대적할 1선발은 존재하지 않았다.

뻐어엉-!

"스트라이크 아웃-!"

한편, 그 모습에 자극을 받았는지 평소 이상의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는 세오레즈의 1선발 맥스 프라이드.

투수전으로 진행되는 분위기에 경기가 해준의 타석이 돌아오는 3회까지는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진검승부겠군.'

'실전 감각을 되찾은 닉 스윈스키냐. 미스터 강이냐.'

'여기서 쳐낸다면..'

그 순간을 기다리는 스카우트들.

'메이저리그 레벨에서도 무조건 먹힌다는 소리다.'

'평가가 더욱 올라가겠군.'

내년에는 메이저리그에 있을 것이 확실한 두 선수의 진검승부에 다시 한번 그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

레나프의 주전 포수 송현국.

그는 감탄이 어린 눈길로 마운드의 닉 스윈스키를 바라보았다.

'과연 메이저리거다.'

리드는 이미 그에게 넘긴 상태였다. 타자의 스윙 궤적을 읽어내고, 무엇을 노리는지 간파하고는 볼배합을 즉석에서 수정하는 능력.

자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으니까.

'저런 괴물쯤 되니 평범한 구속으로 메이저리그에서 100승을 거뒀겠지.'

겉으로 보기에는 4가지 구종이지만,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회전을 주며 조금씩 달리 들어오는 변화구들.

구질로만 따지면 족히 10개는 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그 구질들이 타자의 타이밍을 꿰고는 스트라이크존 모서리에서 들어오고 빠지길 반복한다.

지켜보자 싶으면 스트라이크, 치려고 하면 배트 끝에 걸려 땅볼을 양산해버리는 괴물.

포수 송현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나라 투수들과는 비교가 불가하다.'

거기에 더해 디셉션도 훌룡하고, 투구 리듬도 호흡을 잡아내기 까다롭다.

국내에는 구속도 뛰어나고, 변화구의 각이 날카로운 투수도 많지만 이런 식으로 게임을 운용할 수 있는 레벨에 도달한 선수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아예 없는 수준이지.'

그런 선수들은 이미 메이저리그로 떠나 이름을 남긴 지 오래였고, 심지어 최근 10년동안은 거의 나오지도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송현국은 이번에야말로 해준의 패배를 예상했다.

'강해준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우물 안에서 성장한 개구리. 바다에서 이름을 떨치던 고래와 비견하기는 힘들지.'

하지만, 타석에 해준이 들어서자.

'... 뭐지?'

미트를 들어 보이던 송현국의 손이 잠시 멈칫거렸다.

그 사이, 무언가 달라졌으니까.

그리고, 수십 년을 포수로 살아온 베테랑답게 송현국은 그 무엇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 밀리지 않잖아.'

메이저리그 100승 투수 닉 스윈스키.

그리고 그 위명에 어울리는 투구 내용에 세오레즈 타자들을 알게 모르게 긴장으로 몸이 굳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아니, 오히려 밀어내고 있다.'

타석에서의 해준은 왠지 모를 자신감으로 가득 찬 채, 숨 막히는 기백을 뿜어내고 있었다.

+++

'이건...'

타석에 들어서게 되면, 간혹 그런 것들이 느껴지는 날이 있다.

감각이 여기저기 제멋대로 확장하고, 손을 뻗쳐 타격존이 평소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기분.

컨디션이 한계까지 올라왔다거나, 유독 몸이 가볍다거나, 사이클이 절정에 올라왔을 때나 경험하는 매우 짧은 그 순간.

[아웃라이어 '더 히팅 프릭'과의 링크가 활성화 중입니다.]

['더 히팅 프릭'의 배팅 센스가 적용됩니다.]

해준은 아웃라이어 보로디미르와 링크되며, 시간이란 선 위에서 점처럼 머무르던 감각이 어느새 선 그 자체가 되어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감각은 어택 존이라는 이름으로 시야 한편에 작게 떠올라있었다.

어택 존Attack Zone.

타자가 공략하는 타격 존을 4개의 구역으로 나눈 것.

홈플레이트 위, 스트라이크존을 뜻하는 하트Heart.

그 바깥쪽을 뜻하는 쉐도우Shadow.

다시 그 바깥쪽을 뜻하는 체이스Chase.

그리고 가장 외곽을 뜻하는 웨이스트Waste.

사실상 쉐도우 영역까지가 일반적인 타자가 공략 가능한 지점이며, 체이스부터는 일류 타자라도 범타가 8할 이상인 구역이었다.

웨이스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배트가 닿기도 어려운 장소.

[보로디미르의 배팅 센스]

*스트라이크존 외부 구역을 공략 시, 안타 확률이 상승합니다.

*현재 감각 레벨: 쉐도우Shadow(30)

반면, 퀘스트를 달성한 자신은 쉐도우 영역까지 감각이 확장된 상태였다.

'이거라면..'

해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운드로 고개를 돌렸다.

가슴 속 깊숙이서부터 올라오는 왠지 모를 자신감.

보더라인을 농락하며 선수들의 방망이를 이끌어내는 닉 스윈스키. 삼진 예고를 선언했던 그가, 전성기의 모습에 가까운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밀릴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스윈스키를 잡아낼 수 있다.'

해준이 자세를 잡았다.

미칠 듯이 뻗어져나가며 한계를 확장한 해준의 배팅 센스.

그것이 닉 스윈스키가 지배하던 보더라인의 영역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 배드볼히터 (4) > 끝

< 배드볼히터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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